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56화 (155/200)

# 156

156. 진실? 현실? (2)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진동을 멈춘 땅에 모두 안전하게 착지했다.

도현은 기절했다가 조금 전 깨어난 치에샤에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짧게 내뱉었다.

“넌… 조금 이따 따로 보자.”

“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녀는 우울함을 더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 옆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떨어졌다.

“아들!”

“도현아!”

“조카야!”

“싸가지!”

“처남님!”

도현의 부모님과 강혁, 차 부부, 차도식의 제자 김경희, 프로페셔널 팀, 그 뒤로 비휴단과 주펑까지 줄줄이 딸려 왔다.

도현은 놀란 그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손을 들어 벌어지는 입을 막으며 말했다.

“다. 다 이야기할 테니까, 좀 기다려 주세요.”

또다시 해명의 시간이라니…….

도현은 브로콜리 같은 세계수 위로 뜬 메시지 창을 훑으며 탄식했다.

띠링!

[신성 마나를 품은 세계수가 농장(임시)에 뿌리를 내립니다! 농장은 세계수의 비호를 받으며 더 튼튼하고 강력한 세상이 됩니다!]

[우도현교의 교세가 확장됩니다! 다양한 형태의 신도들을 포용합니다! (자세히 보기)]

빌어먹을 우도현교 교세도,

튼튼하고 강력한 세상도,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

뒤에 이어진 건 식사였다.

공터를 집어삼켰던 세계수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서든 볼 수 있었고, 인식하면 만질 수 있었지만, 공터는 공터대로 쓸 수 있는 반 신기루가 되었다.

그 신기한 모습에 모인 이들은 한 번 놀라고, 도현이 오랜 시간 지냈던 차원 ‘제브라드’가 농장과 합쳐지며 바뀌었다는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놀람은 계속 이어졌다.

‘제브라드’ 세계에서 방문자로 다녀갔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이런 날 실력 발휘해야지!”

이오르가 팔을 걷어붙이며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이 술을 부르짖었고, 냉큼 토토와 모르달이 아공간에 차곡차곡 재어 두었던 술을 풀었다.

음식과 술이 차려지며 도현이 할 해명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그러자 도현은 소리 없이 치에샤를 데리고 자신이 아는 가장 조용한 장소, 남쪽 바닷가로 향했다.

둘은 조금 거리를 두고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았다.

철썩, 철썩-

밀려왔다 물러가는 파도를 말없이 보던 치에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숨을 토했다.

“당신을 만나는 날이 제 기일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많이 변했네요.”

도현은 미간을 좁혔다. 어두운 밤을 때려 박은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고생했다며.”

“네……?”

“지구 때문에.”

그녀는 놀라 도현을 바라봤다.

자신이 아는 도현은 절대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겸연쩍게 웃었다.

“…방문자 시스템에 넣어 둔 메시지 들은 거죠?”

“어. 왜?”

“안 듣고 꺼 버릴 줄 알았죠.”

끌 수도 있었나?

“그건 몰랐네.”

알았다 해도 그녀가 남긴 메시지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당신이 시스템 자체를 무시할 거라 생각했어요.”

“무시?”

“제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게 당연했으니까요.”

치에샤가 몇천 번이고 반복했던 과거에서 그 시스템을 적용한 건 마지막까지 해서 100번 조금 넘는 과거였다.

그 모든 상황에서 도현은 단 한 번도 좋게 방문자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나마 좋게 받았다고 평가한 건 방문자가 넘어오면 기절시켜 방문 앞에 문이 열렸을 때 던져 버리는 식이었다.

당연히 스코어는 F겠지만, 보상은 스코어와 상관없이 지급되니까.

심각했을 때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호텔에 머물러도 나타난다는 걸 알아낸 도현은 워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이어지는 페널티를 10회까지 채우고 시스템 자체를 날려 버리기도 했다.

그런 과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치에샤에겐 처음부터 방문자를 잘 받은 지금의 도현이 완전히 딴사람이라고 봐도 무색할 정도였다.

‘제브라드에서 500년이나 있어서 그런 걸까?’

그녀가 반복했던 몇천 번의 과거에서 도현이 제브라드에 있었던 시간은 많아 봤자 100년. 짧았을 때는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엄청난 시간을 제브라드에서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의 과거는 확실히 시작점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너무 긴박했으니까…….’

부족한 포인트도, 한계에 다다른 자신의 정신도.

일주일만 다른 차원에 다녀오면 4, 5년은 우습게 흐르는 공간에서 적게는 몇 개월, 많게는 몇 년씩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돌고 돈 과거 중에 도현을 방치한 최초의 과거가 되긴 했었다.

‘정말 몹쓸 짓을 했었구나.’

다시 과거를 돌아보자 죄책감이 가슴을 깊게 눌렀다.

그런 그녀의 눈은 뚱한 얼굴로 바다를 보고 있는 도현에게 꽂혔다.

그는 치에샤의 말에 조금 심각해졌다.

‘정말 얼굴에 티가 나나?’

예전에도 자주 듣던 말이긴 했다. 뭐, 제브라드야 가장 자신을 많이 봐 왔으니 이해라도 되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주변인들이 바빠 딱히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없…….

아니지. 매부가 그러지 않았나.

귀찮지 않게 하겠다고.

‘어째 주변인들이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은지.’

머리를 긁적이던 도현은 치에샤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나, 신 안 한다.”

“네……?”

치에샤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네 계획대로 휘둘려 줬잖아. 그래서 농장에 제브라드가 제대로 안착했고. 그럼 된 거 아냐?”

“아, 아니, 그게…….”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도현의 입이 봇물 터지듯 말을 내뱉었다.

“지구에 남은 신은 셋. 한 놈은 지구 신이라 했고, 한 놈은… 사가가 건들지 말랬으니 지켜보고. 마지막 놈, 그놈만 없애면 되잖아.”

엉망이 된 지구의 땅이 뒤처리로 남겠지만, 그거야 헌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 지구의 복잡한 일은 끝날 거다.

남은 농장이야…….

치에샤는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소리를 꽥 질렀다.

“지금, 그게, 말이에요?”

“뭐가?”

“신이란 게 그렇게 쉽게 주고받는 건 줄 아냐고요!”

“여기 그 결과가 이렇게 있는데?”

심드렁한 눈이 그녀를 향했다.

“저, 저도 목숨 걸고 저지른 거라고요!”

“이야, 한때 도박판에서 좀 사셨나 봐? 근데 운도 좋네. 잭팟만 터졌잖아?”

입술이 비틀어지며 내뱉는 신랄한 비꼼에 치에샤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내 계획대로 된 건 단 하나도 없어요! 있다 해도 당신의 힘을 되찾은 것밖에! 애초에 난 지구와 제브라드 차원을 합치려 했지, 농장……!”

차갑게 가라앉은 도현의 눈을 보고서 무슨 말을 떠들어 댔는지 깨달은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하. 그런 빅피처라니.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도현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정말 호구라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줄 알아?”

치에샤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을 옥죄는 지독한 살기에 끊어지려는 정신만 붙잡는 데도 벅찼으니까.

“뭐, 신이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세월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지. 근데 말이야. 너라면 적어도 내가 느끼는 감정의 티끌은 알 거라 생각했어.”

지구를 살리기 위해 몇천 번이나 되는 과거를 반복한 그녀 아닌가.

그러니 적어도 500년이란 세월 동안 자신이 느낀 ‘허무함’이나 ‘무기력’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랬는데.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너.”

그렇다면 그대로 되돌려 주는 수밖에.

“네 거였으니…….”

“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겨우 말을 뱉어 내는 그녀의 얼굴은 식은땀과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신성력을 가졌다 해도, 인간의 몸은 어쩔 수 없나.’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신성력. 예전이었다면 이 살기쯤은 코웃음도 안 쳤을 텐데.

신이었다는 걸 인지했어도 느껴지는 괴리감은 어쩔 수 없었다.

도현이 살기를 거두자마자 치에샤는 쓰러질 듯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알고 있잖아요……? 지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안다.

워프가 사라지고, 몬스터가 종적을 감춘다면 인류는 멸망할 거다.

변한 지구는 흔한 풀 한 포기마저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워프의 모든 것을 농장에 때려 박았다.

적어도 지구 자체는 안전 구역으로 만들고 싶어서.

하지만…….

‘돈이 있는 자들은 블랙홀 랜드로 완전히 이주해 버렸지.’

현재 지구는 위험했으니까.

아니, 위험하지 않은 대한민국임에도 그랬다.

블랙홀 랜드가 더 확장해 지구의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지구에 무엇이 남을까?

이 생각이 들었던 건 아일랜드에서 만난 헌터들 때문이었다.

아일랜드를 구해 준 은인으로 대했기에 좋게 말한 것이지, 그들이 한국을 칭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유토피아.

그리고 한국인은 ‘선택받은 자’였다.

블랙홀 랜드라는 새로운 세계. 그 세계에서 평등하게 주어지는 가능성이라는 기회.

특히 가진 자들에게 있어 가능성이란 건 마약과도 같았다.

세계가 워프 브레이크라는 큰 난관에 부딪쳤기에 느낄 수 없었을 뿐이지, 만약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겠지만, 속은 금방 썩을 거다.

정신 지배로 대한민국 정부를 주물렀던 전 대통령같이.

이런 이유로 사가가 주변을 둘러보라 한 줄 알았지만.

‘개소리였어.’

제브라드에 가려고 시간을 끈 게 분명하다.

솔직히 가만히 있는 놈 건든 건 신 아닌가?

사라진 둘을 찾으러 뒤져 볼 차에 이변이 일어났다.

페론드가 나타났고, 방문자 시스템에 남겨 둔 신 제브라드의 말을 듣고 나니 농장과 제브라드 차원이 하나가 되어 버렸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면 사고가 정지한다던가?

딱 그 상황을 겪은 도현은 깨달음을 얻었다.

굳이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하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음을.

그 예가 한국 헌터 정부 수립이고, 중국의 소림과 비휴단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도 다시 상기했다.

백수. 좀 더 나아가 요리라는 취미를 가진 백수.

그렇다면 누구 씨의 말마따나 알을 미친 듯이 까 대는 큰 바퀴벌레만 잡고 적당히 맡겨 버리면 될 일이다.

마침 농장을 맡길 인재도 여기 있으니까.

그러나 이 계획은 도현만의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치에샤는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는 성장을 멈추게 되죠. 그런데 그 원동력이라는 위험이 없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인간이, 동물이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으니까!”

도현이 심드렁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제브라드 차원을 거름으로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했다?”

“비유는 좀 별로지만, 결론은 그러네요. 한국말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죠.”

“그럼 그건 직접 그 도깨비랑 얘기해. 전부 넘겨드릴 테니까.”

그녀는 변하지 않는 도현의 모습에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못 느끼는 건가요, 아니면 외면하는 건가요?”

“본론만.”

“정말… 그놈의 본론……. 좋아요. 본론만 말하죠.”

치에샤가 불쾌감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도현을 빤히 보며 내뱉었다.

“당신의 어머니. 이대로 죽게 놔둘 건가요?”

엄마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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