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 진실? 현실? (1)
도현의 눈앞, 메시지 창이 흡사 커맨드 창이라도 된 듯 알림이 주르륵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 차원의 동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동기화 완료까지 필요 시간 계산 중…….]
[싱크로율 98퍼센트! 곧바로 동기화에 들어갑니다.]
[차원 ‘우도현’의 조건에 맞춰 차원 ‘농장(임시)’에 전체 이주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금방 되는 건가?”
마치 게임 패치를 받는 것처럼 바로 진행되니, 괜히 짜 맞춘 계획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스멀스멀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듯 항의처럼 붉은색 알림 한 줄이 띄워졌다.
[심각한 문제 발생! ‘마계’와 ‘천계’는 농장과 융합될 수 없습니다.]
“거기도 제브라드였는데 왜 안 돼?”
대답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왔다.
[해결 방법 탐색 중……. 탐색 완료.]
[‘이웃 초대’가 아직 2회 남았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기존 창 위를 덮으며 의사를 묻는 창이 뜨자 도현의 마음은 조금 복잡미묘해졌다.
“진짜 계획한 게 맞나?”
이웃을 남겨 뒀다기보다는 까먹었다는 게 더 맞지만, 반대로 이웃을 전부 만들어 뒀다면 마계와 천계는 버렸어야 하니까.
어쨌든 지금은 선택권이 없다.
[‘마계’와 ‘천계’가 이웃이 됩니다!]
[두 세계가 기존 차원에서 벗어나며 확장됩니다! 확장 완료까지 7일(지구 시간) 소요. 기존 공간은 출입 가능합니다.]
다시 올라가는 알림을 보던 도현은 차원과 세계의 개념이 좀 다른 의미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세계란 개념이라서 이웃인 건가?”
그래서 엄마의 블랙홀 랜드도 자신의 농장과는 달랐던 걸까?
오가는 것도 포탈로 이어져 있으니까.
세계라면 그만큼 성장성도 있다는 말일 거고.
[전체 이주 완료!]
[차원 ‘농장’이 5배 확장되었습니다!]
[이주를 완료한 생명체들과 기존 생명체들에게 맞춤 가이드(튜토리얼)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이놈의 시스템…….”
나쁘지 않다. 오히려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 ‘알아서 적응해.’라는 서바이벌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 게임 같은 느낌은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 같게 느껴진달까.
[새로운 차원이 탄생했습니다! 이름을 다시 지어 주세요!]
이런 건 좀 나오지 말라고!
도현은 한숨과 함께 양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500년 동안 그렇게 거부했던 ‘신’이란 걸 결국 떠맡았다는 현실감이 확 몰려왔다.
“아, 모르겠다!”
도현은 일말의 고민 없이 창을 꺼 버렸다.
[차원의 이름은 1회에 한해 언제든 수정 가능합니다.]
[차원의 이름이 ‘농장(임시)’로 설정되었습니다.]
“하, 쉬고 싶다.”
소파에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퀭해진 눈을 문지르던 도현은 어쩌다 이 상황까지 온 건지 찬찬히 되짚었다.
제브라드 차원에 떨어진 일.
당연하다는 듯 하라던 신.
깽판 후 귀환.
잠깐의 휴식.
기다렸다는 듯이 해일처럼 밀려온 방문자와…….
“아, 생각을 말자, 말어.”
그냥 안타까운 생명들이 살 곳을 마련해 줬다고 위안 삼는 게 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신의 대리자라고 떴을 때부터 예상은 했잖아.”
현실을 외면하는 행동일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그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어? 가만? 대리자?”
도현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왜 이걸 몰랐지? 넘기면 되잖아?”
언제 죽을상이었냐는 듯 생기를 되찾으며 후보를 위해 다시 머리를 굴렸다.
제일 만만한 건 사가였다.
이미 신이니, 떠넘기기에 딱이니까.
“하지만 지구가 걸려.”
이렇든 저렇든 아직은 지구 쟁탈전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남은 놈은?
“격을 갖출 만큼 강한 놈.”
머릿속에 몇 사람이 떠올랐다.
매부와 강혁 삼촌, 그리고 중국 소림의 우슈보 스님.
거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 격을 갖추겠어.”
그래, 그게 문제다.
격이란 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것이니까.
자신이 격이란 걸 알게 된 것도 제브라드 차원에서 신 제브라드가 찾아오기 얼마 전이었다.
“하, 모르달이 사고만 안 쳤……?”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모르달이 어떻게 제브라드에 간 거지?”
갑작스럽게 다른 문제로 전환되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화풀이 상대가 필요한 것일지도.
“어쨌든 차원이란 게 그렇게 쉽게 오가는 곳이 아니지.”
신의 종특 아닌가.
“신?”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건 딱 한 놈… 아니, 한 마리뿐이다.
“사가…….”
이를 으득 씹으며 일어선 도현의 몸이 사라졌다.
시야가 바뀌었다.
도착한 곳은 늘 그렇듯 농장의 자신의 집이 있는 공터.
그곳엔 이미 모여든 이들이 꽤 되었다.
신난 토토부터 농장 첫 주민인 인어족과 주변 지대의 이름 있는 몬스터들이 몰려와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세상이 바뀐 것에 놀라 모여든 것 같았다.
“아빠! 노리터 커졋써! 엄청, 엄청 커졋써!”
“도현 님! 갑자기 세계가 확장됐습니다!”
토토와 휘르카가 도현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다.
어?
그 둘을 보던 도현은 예전과 달리 머리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토토(돌원숭이족)]
나이:0(생후 45일)
Lv. 843
대장장이(불카누스의 화신)
체력:42,690
마나:71,582
힘:10,854
지능:10,004
민첩:11,083
*현재 유체화 중
*언어 마스터:한국어, 몬스터어
[휘르카(밤의 인어족)]
나이:591
Lv. 678
밤의 인어족 수장
체력:30,486
마나:35,124
힘:5,635
지능:2,581
민첩:3,459
*현재 지상에서 생활 중
*케라우노스(밤의 인어족 수장 전용)
*블랙홀 랜드-농장 총괄
*농장 네임드 NPC 활동 중
블랙홀 랜드 주민들처럼 상태창이 펼쳐졌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잠깐, 이거 그 전에 격의 조건인가로 봤던 사가 상태창이랑 비슷한데?
생각이 들자마자 ‘잠재력을 확인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 창이 뜨는 걸 꺼 버렸다.
이미 머릿속은 터지기 직전이었으니까.
일단은 다른 건 제쳐 두고 토토가… 상당히 뭐가 많은데…….
흔히 말하는 스탯 말고도 ‘언어 마스터’에 눈이 꽂혔을 때, 새로운 메시지 창이 그 위를 덮었다.
띠링!
[신교-우도현교의 대신관들을 대상으로 신의 부름을 진행합니다!]
동시에 하늘에서 빛기둥 3개가 도현 주변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3명이 아니었다.
“노, 농장임다요…….”
에놀드의 목에 올라탄 모르달과,
“농장? 지구가 아니라? 제브라드… 아, 기절했지. 미도론? 설명 좀?”
“하아…….”
혼잣말 해 대는 이오르와 한숨을 내뱉는 사가.
“이오르? 사가 님? 어… 싸, 쌍둥이 신녀……!”
미도론에게 안겨 있는 소녀를 보고 놀라는 에놀드.
그리고-
“켈륵, 켈륵, 이게 무슨 일이야? 딸꾹!”
“나 아님! 폭발 회로 안 썼음! 암튼 아님!”
“윌도! 회로가 아니라 폭약을 넣었잖아!”
“으음……? 난 오늘 비번이라고! 자고 있는데 방해… 우, 우도현 님?”
짧고 굵은 드워프 4종 세트까지 함께 배달되었다.
이젠 나올 한숨도 없는 도현은 미도론을 보고 덤덤히 말했다.
“미도론, 정말 오랜만이네.”
“우도현 님… 미천한 종이 이제야 신을 뵙습니다!”
미도론은 기쁨에 찬 울먹임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치에샤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도현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을 기세였지만,
“잠깐만.”
그걸 손을 들어서 막은 도현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가를 빤히 쳐다봤다.
“할 말 없어?”
도현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사가를 향했다.
뜨거운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사가는 헛기침하더니 괜히 땅바닥을 보면서 말했다.
“그… 저… 확인 좀 해 보려고…….”
“확인?”
“제브라드 님이 진짜… 영면에 드셨는지…….”
도현은 짧게 후,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럼 조용히 곱게 혼. 자. 다녀올 것이지, 저기 흰 가래떡은 왜 데려가?”
모르달을 향해 턱짓하며 따지자 사가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오히려 모르달이 에놀드에게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도현에게 달려와 세계수 핵을 꺼내 보이며 주절주절 자백하기 시작했다.
“도련니이이임! 세계수가 폭발했슴다요! 갑자기 수호자들이 공격해서 도망가다가 잡았는뎀쑈. 이게 세계수 핵임다요! 잡자마자 수호자들이 쓰러지고 세계수가 팝콘처럼 폭발했슴다요! 에놀드 도령 말론 세상이 붕괴한다고 했슴다요! 하루 만에 말임다아아! 어쩜까욧?”
랩하듯 숨도 안 쉬고 말하는 모르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농장 중심지를 울렸다.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을 정도였는데, 반대로 그 목소리에 치에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도현은 이마를 부여잡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낭창낭창한 흰 가래떡의 기행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세 번은 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브라드 차원 붕괴야 예정된 일이었고.
그곳이 집이었던 방문자들의 앞날도 조금 걱정이 됐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긴 하지만…….
왜 수습은 내가 해야 하는지…….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그냥 좀 빨리 구했다고 생각해야지.
지금이야 지구와 시차가 거의 없었지만, 예전이었다면 실시간으로 지원한다 해도 100배 차이였으니 제대로 돕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 눈앞에 두는 게 나은 거라고.
도현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다 모르달의 앞발에 들린 둥근 돌을 빤히 봤다.
세계수 핵이라.
워프에도 핵이란 게 있긴 했는데, 세계수도 핵을 가지고 있었다, 라.
확실히 사가가 만든 워프들은 대부분이 제브라드의 세계관이 밑바탕이 되어 만든 것들이니 핵이란 게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도현은 세계수 핵을 받아 들었다.
손에 올려지기 무섭게 세계수 핵은 짙푸른 색으로 변하더니 자아라도 가진 듯 떠올라 그대로 공터 땅속에 파고들어갔다.
드드드드드!
땅이 진동했다.
순식간에 나무줄기가 땅을 비집고 치솟았고, 잎이 무성하게 달리더니 크기를 불려 갔다.
“무슨… 잭과 콩나물 실사판도 아니고…….”
탄식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던 도현은 심상치 않은 땅의 진동에 황급히 손을 튕겼다.
그러자 모두에게 보호막이 씌워지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콰과과과과!
조금 전 올라왔던 줄기는 장난이었는지 공터를 가득 채울 만큼 두껍고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았다.
“세, 세상에…….”
농장의 변화를 느끼자 빠르게 업무 지시를 맡기고 기쁜 마음에 달려온 오제아가 세계수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마계의 기록으로 세계수가 어떤 ‘것’인지 아는 그녀는 실제로 그 위용을 접하자 말을 잃었다.
‘그런데… 뭔가 외형이 좀 다른데?’
짙은 회색에 가까운 줄기와 가지에 너무 많은 잎이 구름 조각처럼 보인다던 그 몬스터와 달리 이 세계수는 정말…….
“무슨 브로콜리 하나 심어 둔 거 같네.”
도현의 감상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네, 네?”
“그렇잖아. 줄기고 잎이고 할 것 없이 저렇게 푸르딩딩하니.”
푸, 푸르딩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