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 모르달 효과 (2)
에놀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이게 아닌데…….
내가 바랐던 건, 내가 원했던 건… 좀 더…….
“이, 이거 어, 어쩜까요……?”
당황한 모르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놀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상황을 다시 눈에 담았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광채를 뿜고 있는 동그란 돌. 그 크기만 해도 들고 있는 모르달의 절반이나 될 정도로 큰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저게 세계수… 옛 이름으로 말하자면 태초의 나무의 목숨 줄인 ‘핵’이다.
그리고 저 핵이 있는 이곳은 에놀드가 그렇게 찾고 찾았던 태초의 신전이고…….
“모르달 님이 그러실 줄은…….”
바닥에 쓰러진 엘프 하나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비통한 얼굴로 모르달을 노려보다 고개를 툭 떨궜다.
은발과 은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전체가 녹색인 태초의 엘프.
저들은 문지기이자 이 핵이 있는 태초의 신전을 지키는 수호자다.
에놀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할 정도로 강한 엘프.
그 수가 여섯이나 있었지만…….
모르달이 저 핵을 건들자마자 픽 쓰러지더니, 결국 저렇게 숨을 거두었다.
“하아…….”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누가 알았겠나.
출발은 좋았다.
모르달을 데리고 오자마자, 자신이 접근할 기색만 보이면 경계하던 세계수는 어디 가고 기다렸다는 듯 가지를 내려 주었으니까.
두툼한 나뭇가지가 평탄한 길이 되어 걷기만 했다. 그 시간이 심심할 거라 생각했는지, 세계수는 자신의 가지를 흔들어 그 속에 사는 요정부터 기생 몬스터까지 보이며 지루함을 달래 주었다.
다행이라면 그 몬스터들은 호의를 보내왔다는 것 정도.
그렇게 곁가지가 끝나 굵은 나무줄기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생소한 생김새의 셋은 태초의 엘프로, 잔뜩 긴장했던 에놀드의 마음과 달리 호의로 맞이해 주었다.
이 모든 게 모르달 효과… 아니, 신의 심부름꾼이란 효과라니.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그저 잎을 타고 날아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에놀드는 이오르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완전히 다른 세계수 속 세상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나뭇가지에 기생해 사는 다른 나무나 식물이 숲을 이룬 곳이 있다면, 처음 들어 보는 종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문명도 보였다.
말 그대로 ‘세계’인 이곳.
그런 세계수의 시작이라 불리는 첫 줄기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태초의 신전이 있었다.
에놀드는 신전을 보고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20년간 몸을 담았던, 지겹도록 봐 왔던 그 신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청량할 정도로 이렇게 정순한 신성력을 가진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것이다.
‘제브라드 님은 아직 살아 계신다!’
에놀드 머릿속엔 사가의 말도, 기억을 잃었다는 모르달의 말도 묻혔다.
당연했다. 신이 사라졌다면 이 신성력은 뭐란 말인가?
신성력은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힘. 그런 힘이 있는 한, 신은 존재한다.
그렇게 제브라드를 머릿속에 그리던 에놀드가 정신을 차린 건 머릿속에 울린 한마디 때문이었다.
-신교, 우도현교의 대신관 에놀드 아드노타. 그대의 신, 우도현이 부른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도현… 신이 됐다고……?
아, 아니, 제브라드 님은 아직-
갑자기 태초의 엘프가 모르달을 향해 소리쳤다.
“모르달! 그대는 신을 배반한 것인가? 제브라드 님의 신성력이 갑자기 사라졌다!”
“눈속임? 아니야. 우리를 속일 수는 없을 터! 너는 제브라드 님의 심부름꾼이 아니구나! 누구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이게 말이 되는…….
“크읍!”
예고 없이 몸속 마나가 뜨겁다고 생각됐을 즈음,
태초의 신전에서 느꼈던 그 청량함을 닮은 마나가 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마나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신성 마나……?
얼떨떨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상황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인간! 네놈의 몸의 마나는 무엇이냐? 불결함이 가득한 힘이라니, 침입자 두 놈을 처단하라!”
태초의 엘프들이 자신과 모르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셋이었던 엘프들은 정신을 판 사이 두 배로 불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일단 비운 그는 이곳에서 탈출을 떠올렸지만, 그건 희망에 가까웠다.
특히 혼자가 아닌 모르달까지 있음에야…….
에놀드의 안타까운 시선이 모르달에게 향했다. 하지만,
“큽! 왜, 왜 이런 거지?”
“무, 무기가 박히지 않는다……!”
“화살도 튕겼어! 어, 어떻게?”
모르달을 둘러싼 엘프 넷이 아무리 공격해도 모르달의 몸에 닿은 무기와 활은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대신 모르달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풀쩍풀쩍 뛰어다니기 바빴다.
“쿠엑! 으헉! 아, 아픔다욧! 왜 갑자기 공격하고 난리임까욧?”
그렇게 도망치던 모르달은 신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르달!”
한 박자 늦게 모르달을 외친 에놀드는 자신에게 붙은 두 엘프를 향해 어쩔 수 없이 마나로 감싼 주먹을 휘둘렀다.
“크헉! 이, 무슨 힘이……?”
“불결하다! 이 불결한 힘은 무엇인가?”
한 방에 배를 잡고 주춤대는 엘프들이 의아했지만 빠르게 움직였다.
어쨌든 공격이 먹혔다. 탈출할 수 있다!
뒤늦게 따라붙는 엘프들을 무시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간 에놀드는 멍하니 굳을 수밖에 없었다.
신전 중심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낮은 단상 위에 선 모르달이 자신의 키 절반만 한 둥근 돌을 품에 안고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마자 모르달에게 달려들던 엘프 넷이 갑자기 크게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에놀드를 따라 들어왔던 두 엘프마저 바닥에 널브러졌다.
에놀드는 멍하니 모르달에게 물었다.
“모르달… 그게 뭐지?”
“이 엘프들이 핵이라고 했슴다요! 소인도 도망치다 잡은 검다요! 근데, 근데 저 엘프들이 갑자기…….”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모르달을 보니 알고 한 행동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신전의 신성력은 언제 있었냐는 듯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거지?”
저 핵을 건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왜 자꾸 가슴이 미친 듯이 불안하게 떨리는 걸까.
진정되지 않는 맥박에 에놀드는 주먹으로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모르달, 일단 세계수에서 나가자. 나가서, 이오르와 사가 님께 여쭈어봐야겠어. 무슨 일이-”
쩌, 쩌저저적.
불길한 소리가 세계수를 울렸다. 에놀드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었지만,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마른 흙냄새가 스쳤다.
“모르달!”
그는 단숨에 지면을 박차 모르달의 꼬리를 잡았다.
“으에엑! 꼬, 꼬리 잡지 마심쑈! 아, 아픔다요오옷!”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과 달리 모르달은 품에 안은 돌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휘이이이잉!
거센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둘의 몸을 띄웠다. 동시에 세상이 진동했다.
드드드드드!
“무, 무슨 일임까욧? 왜, 왜 세계수가 무너짐까욧?”
바람이 예상보다 강하게 불자, 에놀드는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모르달을 냉큼 품에 안고 마법을 펼쳤다.
“실… 드! 7중첩!”
청량한 느낌의 마나가 몸속을 빠르게 돌았다. 그러자 짙푸른 파란색의 구가 둘을 감쌌다. 그 위로 빠르게 두 번째 구가, 또 그 위로 세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구가 감쌌을 때, 빠르게 솟구치던 둘은 금세 세계수를 벗어나 하늘에 내동댕이쳐졌다.
퍼어어엉!
대포를 쏘아 올린다면 날 법한 소리가 세상을 울리며 세계수가 파편이 되어 비처럼 쏟아졌다.
돌을 안고 있던 모르달이 멍하니 세상 아래를 바라봤다.
터진 세계수. 그게 허상이 아니라는 듯, 초토화된 그 자리에는 바싹 말라 버린 나무의 밑동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조각난 세계수의 파편들은 이 세상 저 먼 바다까지 날아가 떨어졌다.
방향을 모른다면 보이지도 않을 눈곱만 한, 제국 쪽을 향해 날아가는 수백 개의 파편도 보였다.
“어, 어! 저, 저거 위험한 거 아님까요?”
정신을 차린 모르달은 자신을 놓지 않는 에놀드를 툭툭 쳤다.
반응이 없자 몸을 비틀며 소리를 꽥꽥 질러 댔다.
“넋 놓고 계심까욧? 에놀드 도려어엉! 정신 차리심……! 에엥?”
손이 스르륵 풀리며 모르달의 몸이 떨어졌다. 이대로 지상에 추락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 실드 안에서는 둥둥 떠다닐 수 있었다.
모르달은 손에 든 돌을 아공간에 집어넣으며 에놀드의 옷을 붙잡고 올라가 그의 뺨을 톡톡 쳤다.
“이보심쑈, 에놀드 도령! 정신 안 차림까욧?”
그제야 에놀드의 흐리멍덩한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생기라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기만 하던 에놀드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깊게 한숨 쉬며 말했다.
“…모르달, 큰일 났어…….”
“뭐가 말임까요? 지금 저기 세계수 파편이 날아가는 것보다 큰일이 있슴까요?”
모르달이 투덜거렸지만, 에놀드는 그걸 받아 줄 정신이 없었다.
“이 세계가… 붕괴한다.”
아주 힘겹게 뱉은 심각한 말이었지만, 모르달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건 이미 알고 있슴다요. 새삼 왜 그러심까요?”
에놀드가 발끈했다.
“네가 세계수 핵을 건드는 바람에 세상이 붕괴한다고! 지금 계시… 를 받았단 말이야! 이 망할 거대 흰족제비야!”
“말이 심하심다요. 소인이 아니더라도 신이 사라진 세계는 어차피 사라지게 되어 있슴다요. 그 전에 도련님이 신이 되시겠지만 말임다요.”
에놀드는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이미 도현은 이 세계의 신이 됐어. 그래서 이름도 우도현 차원이 됐다고! 그런데도 붕괴한다고! 그것도 하루 안에!”
“…뭐라굼쑈?”
***
도현은 눈앞의 메시지 창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차원 ‘우도현’을 농장과 합치겠습니까? (예/아니요)]
[차원 ‘우도현’이 붕괴하기까지 3시간 30분 남았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답은 하나다. 농장과 합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 못하는 이유는…….
“결국 제브라드 손에 놀아난 거잖아?”
도현은 모르지만 신 제브라드가 원하는 결과는 이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구와 제브라드가 합쳐지길 원했으니까.
그렇다면 두 세계는 엄청난 힘과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 태양계라는 보호막도 제대로 가동될 것이고, 무엇보다 도현이라는 아주 강한 신이 버티고 있기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상이 된다.
그 세상에 환생해 신이 된 도현을 지켜보며 세상을 즐기려 했던 그녀의 계획이 틀어지게 된 이유는 아주 사소한 데에 있었다.
신 제브라드가 도현을 늦게 맞이한 150년이란 시간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처음’으로 깽판을 쳤고, 다급하게 돌아온 그녀는 도현을 보낸 뒤 세상을 돌보지 못하고 다시 떠났다.
도현이 지구에 되돌아가 1년이라는 휴식을 취하면서 누그러진 성격과 방문자가 완전히 달라진 점도 한몫했다.
도현이 음식에 큰 의미를 두게 된 것도, 그리고 신 제브라드가 마지막이라 탈탈 털어 준 모든 것 중 모르달도, 농장도.
처음부터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주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차원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지, 신까지 되돌려지는 건 아니니까.
마지막이기 몇십 번 전에 모르달을 가족으로 들였지만,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런 가족을 도현에게 보내고 과거로 돌아가 봤자 모르달은 사라진 과거에 묻혀 버리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마지막까지 모르달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한 변수들이 모였기에 지구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이었다.
반대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걸 알게 된 도현이 농장에 신경을 쏟으면서 제브라드 차원에 관한 일은 적극적으로 처리했다.
그녀가 도현이 방문자 페널티를 다섯 번은 받을 걸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도현은 머리를 벅벅 긁다 혀를 차며 메시지 창의 ‘예’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