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53화 (152/200)

# 153

153. 모르달 효과 (1)

제브라드 대륙 동쪽 끝에는 신기한 섬이 하나 있었다.

마나와 단절된 섬, 룩소르.

저주받은 섬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곳이었다.

이름 그대로 마나가 통하지 않기에 찾는 모험가는 없다시피 했고, 오가는 여행객들이라 해 봤자 그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주기적으로 섬을 벗어났다가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잔잔한 파도가 모래를 쓸어내리는 한적한 룩소르의 서쪽 해안가.

30미터가 넘는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은발의 한 소녀가 풀썩 모래 위에 떨어졌다.

그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사라지며 금발의 미청년이 모래사장에서 까치발로 나와 발을 털며 구시렁거렸다.

“아, 힘들어! 찾는다고 죽는 줄 알았네.”

“고생했다. 그래도 감은 안 죽었더구나.”

이오르와 사가였다.

다짜고짜 룩소르에 가야 한다는 말에 고생길이란 걸 알면서도 이오르는 눈을 반짝이며 나섰다.

무려 신의 부탁이었으니까.

이렇게 고생해 주는데, 고생한 대가로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겠나.

차원 이동이라든가, 차원 이동이라든가, 차원 이동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너무 의욕에 차 서두른 탓에 이오르는 온몸에 내려앉은 피로에 짜증이 났다.

당연했다. 뱃길로 두 달이나 걸릴 거리를 5시간 만에 돌파했으니까.

그것도 제브라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는 지역에서 말이다.

이런 강행군도 이오르라서 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강한 육체와 블루 드래곤이라는 속성의 이점도 있었지만, 요즘 심심치 않은 샌드백이 되어 준 노아로 인해 체력과 근력은 이 제브라드에서 최강이었다.

물론 신을 제외하고.

이오르는 당장에라도 풀이 듬성듬성 난 바닥에 엎어지고 싶었지만, 들러붙는 모래의 질감에 몸을 떨었다.

‘하, 침대에서 자고 싶다.’

그 욕구를 위해서라도 사가를 재촉했다.

“아버지, 어디로 가?”

“섬 중심, 뽀르뚜에 가면 된다.”

“뽀르뚜? 이름이 왜 그래?”

이름을 듣자마자 인상이 구겨졌다.

중심부라고?

멀리서 봤을 때만 해도 인간의 몸이라면 두세 시간은 걸어야 할 거리였다.

힘들어 죽겠는데. 걷기도 싫었고 도시 이름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무슨,

“원시 부족이지.”

“그, 어……? 진짜 원시 부족이야?”

오히려 사가가 의아해했다.

“룩소르에 와 봤던 게 아니냐?”

“어… 지나가다 잠깐?”

성인이 되자마자 제브라드의 끝과 끝을 오가던 차에 떨어졌다고는 말 못했다.

‘좌표라도 뜨면 텔레포트하면 되는데…….’

이 섬의 제일 큰 문제점이 좌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간을 좁히던 이오르는 먼저 저만치 걸어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사가를 보며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끄응… 아이고, 삭신이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게 듣기 싫었는지 사가의 손짓이 빨라졌다.

“시간 없다. 빨리 오너라.”

“어? 왜… 엑?”

사가가 이오르의 팔뚝을 잡자마자 둘의 몸은 사라졌고, 다시 나타난 곳은 사가가 말했던 뽀르뚜라는 원시 부족이 사는 마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이오르는 씩씩댔다.

“아버지, 텔레포트할 수 있었으면서 날 개고생시켰어?”

이렇게 개고생하며 날아온 이유가 뭔지 따졌지만, 사가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그 먼 거리는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아들을 그렇게 부려 먹어?”

“저길 봐라.”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울컥했지만, 아버지라서 참았다.

늘 이랬으니까. 그렇다고 잘 참았던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바라는 게 있으니까 한 번쯤은 따라 줘야겠지.

뚱한 시선이 사가의 검지를 따라 마을로 향했다.

30채가 되지 않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 마을이라 하기엔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사가가 가리킨 곳은 마을 중심의 한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못사는 평민들이나 쓸 법한 돌집이란 것 정도.

그래도 주변의 나무나 흙으로 지은 집들과 달리 깔끔하고 볕도 잘 드는 자리였다.

저 집이 왜?

의아해하면서도 먼저 걸어가는 사가를 따라 이오르도 걸음을 옮겼다.

마을은 조용했다. 이방인이 들어왔다면 나와 볼 법도 한데,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느껴지는 기척은 100명. 집 숫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까지 조용할 정도라니.

뭔가 위험한 것 같아 멈추려던 이오르는 사가의 걸음이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려고 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린 아니사 님, 그리고 이오르 님.”

마을 밖에서 사가가 가리켰던 돌집. 그곳에서 청년과 앳된 티를 아직 못 벗은 여자가 함께 걸어 나왔다.

이오르는 방금 하려던 말도 잊고 입이 벌어졌다. 지금 사가의 모습과 앳된 여자가 똑 닮았기 때문이다.

“싸, 쌍둥이? 아버지, 설마…….”

“제브라드 님이시다.”

“어, 어어-?”

경악하는 이오르를 향해 청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오르 님. 우도현교 첫 번째 대신관 미도론이라 합니다. 이분은 치에샤 님. 신 제브라드 님의 환생체이십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이오르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사가를 레어에서 처음 본 게 아니었다면 에놀드가 찾고 있던 쌍둥이 신녀로 착각했을 거다.

은발에 은색 눈동자였으니까.

‘그런 것치고 레어에 왔던 에놀드는 아버지를 보고 동요하지 않았어.’

‘어째서?’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에놀드는 자신의 능력을 시시콜콜 알려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이 외딴섬에 나타난 또 다른 여자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힘, 고유의 파장이 달라.’

익숙한 제브라드교의 신성력이 느껴졌다.

이오르는 확신했다.

‘에놀드가 찾던 쌍둥이 신녀다.’

동시에 신교가 무너졌음에도 쌍둥이 신녀의 행방을 찾지 못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알 수가 있나.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그 쌍둥이 신녀가 사실은 제브라드의 환생체라니…….

‘이게 말이 돼?’

이오르는 연타로 받은 충격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이오르를 향해 치에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순간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며 차분해졌다. 그래서 더 당혹스러웠다.

방금 얼굴을 보고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이런 호감을 느낀다니. 이게 ‘이 세계의 신’이 가진 힘인 걸까?

얼떨떨해하는 이오르를 제쳐 두고 치에샤가 사가를 바라봤다.

“린 아니사,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상황이 많이 급박한가요?”

“아니에요. 다만… 제한 시간이 늘었다 줄었다 하니,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해요.”

이오르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자 몸을 비틀었다.

양 팔뚝을 긁던 이오르는 자신을 쳐다보는 미도론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첫인사가 우도현교 ‘첫 번째’ 대신관이랬지.

자신이 알기로는 에놀드를 제외하고 정식으로 대신관이 된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말발이 아닌 힘으로.

방문자였단 소리인데, 첫 방문자는 헤미오르였는데?

모두가 모였을 때 도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

헤미오르가 흘렸던 한마디가 떠올랐다.

‘저를 보시고 ‘또냐?’라고 하셨어요. 분명 제가 가기 전 방문자가 있었을 거예요.’

치에샤와 사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른 것도 눈치 못 챈 이오르는 미도론을 보며 물었다.

“네가 첫 번째 방문자지?”

“예, 그렇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미도론은 하늘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벌써 14년 전이군요. 갑자기 들이닥친 용병단에 마을은 순식간에 불탔었죠. 겨우 1년 전에 성인식을 치른 전 너무나도 어렸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세뇌된 것처럼 깊은 숲을 향해 내달렸었다.

거기에는 마을 사람들만 아는 동굴이 있었으니까.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인 만큼 끝이 어디로 이어졌을지 모르지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죽기 살기로 동굴에 도착했고, 입구에 들어가기 무섭게 벌컥 열린 문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잠이 덜 깬 도현이 부스스 일어나 인상부터 구겼으니까.

그가 용병단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직감했다.

“그땐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도현 님은 처음 본 저에게 따뜻한 밥을 주셨지요.”

“그놈이 밥을 줘?”

“그놈이 밥을 줬다고?”

이오르와 사가가 깜짝 놀라 동시에 되물었다. 미도론은 작게 웃을 뿐이었다.

분명 말투나 행동은 거칠었지만, 그 속의 따뜻함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소한 호의가 미도론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었다.

더는 신 제브라드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단련하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재능은 있었는지 채 반년도 안 되어 이름을 날리는 용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나로 검을 만들어 냈을 때, 원망했던 신 제브라드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거래를 했습니다. 신의 목적은 우도현 님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제 목적은 우도현교가 이 세계를 지탱하는 신교가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오르가 설마, 하며 입을 뗐다.

“신교가 반발하지 않은 이유가……?”

“예, 그중 하나였죠.”

“미쳤네, 미쳤어. 신이 제 신도들을 죽이다니.”

그 시선이 닿은 치에샤는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사가에게 말했다.

“궁금증이 다 풀렸으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가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녀의 계획이 틀어졌다고. 그래서 실행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쿠구구궁!

땅이 옅게 진동했다.

넷의 시선이 똑같은 곳으로 향했다. 이 섬에서 먼 곳이지만, 그곳은 이 세계에서 최고로 강한 몬스터이자 이 세계를 지탱하는 세계수가 있는 곳이었다.

치에샤가 살짝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에놀드 씨가 언젠가 태초의 나무를 뽑아 버리실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요.”

미도론이 흥분에 차 말했다.

“치에샤 님, 우도현 님께서 드디어 신이 되셨습니다! ‘진짜’ 대신관이 되었어요! 신의 부름이 시작……! 아?”

굳어 버린 미도론에게 치에샤가 설명했다.

“취소됐죠? 그럴 수밖에요. 그는 지구에 있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태초의 나무가 뽑혔으니 곧 그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으아아악! 당최 무슨 말들을 하는지 못 알아먹겠네!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면 안 돼? 어?”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이오르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듯 벅벅 긁어 대며 성질을 냈다.

치에샤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가 이 세계의 신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는 지구에 있죠. 두 차원은 공존하지 못해요. 아니, 지구 근처에만 가더라도 이 세계는 소멸하죠.”

“그래서……?”

“그가 이 세계에 올 방법은 없어요. 제가 절대 추방했으니까. 그런데 신이 없는 세계는 결국 붕괴해요.”

“하… 뭐야, 그게? 이러나저러나 다 죽는 거잖아? 근데 세계수랑은 무슨 상관인데?”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게 태초의 나무를 없애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이 바로 붕괴하니까.”

이오르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이노야! 무슨 말버릇이……!”

“그럼 뭐라 하는데? 이 세계가 사라진다는데! 다 죽는다는데?”

싸우는 둘 사이에서 치에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야 이 세계가 살 수 있으니까.”

“뭐……?”

이오르가 되묻자, 그녀는 확고하게 다시 대답했다.

“이 세계는 그의 세계와 합쳐질 겁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이오르의 입이 헤벌쭉해졌다.

‘지구와 합쳐진다고? 그럼 이제 지구에서 사는 거잖아?’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실실 웃는 이오르에게 치에샤가 설명을 이었다.

“린 아니사와 이오르에게 드릴 부탁은 태초의 나무를 뽑기 위함이었어요. 예상과 달리 에놀드 씨가 해냈지만……. 그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네요. 어떻게 약점을 알아낸 거죠?”

이번에는 사가가 물었다.

“치에샤, 세계수에 약점이 있었나요……?”

“네. 태초의 신전에 있는 심장… 그 핵을 빼내면 돼요. 하지만 태초의 신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요. 길도 숨겨져 있고, 태초의 엘프들도…….”

그러자 이오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 그럼 에놀드가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네?”

“모르달이 같이 갔거든.”

처음으로 치에샤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가가 미안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제브라드 님, 아직 도현 그놈이 지구의 신이 되지 못했어요.”

잠시의 정적. 그녀는 그럴 리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네……? 뭐라구요……?”

“아직 지구에는 3명의 신이 남았어요. 실제로는 하나죠… 처음 지구를 삼켰었던 그 외눈박이요.”

치에샤는 눈을 깜빡이더니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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