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 방문자 (2)
열린 방문 앞.
문 사이로 보이는 곳은 페론드의 서재였다.
도현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는데, 황제의 지식 창고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음담패설이 가득한 책부터 페론드가 도현을 만나고 쓰기 시작한 일대기가 꽂힌 곳이기도 했다.
도현은 고개를 들어 방문 위를 바라봤다.
남은 시간은 3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보내기 싫은 거지만.
그런 도현을 말없이 지켜보던 페론드가 툭 내뱉었다.
“같이 갈래?”
“……!”
순간 도현의 눈동자가 떨렸다.
“장난이야. 그랬다간 지금의 트론은 뭐가 되겠어.”
페론드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론, 너는 모르겠지.
이런 나 때문에 네 모든 게 사라질 줄은…….
솔직히 후회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가 희생했다면 천 년은 버틸 제국이 그렇게 덧없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테니까.
억지로 웃는 입꼬리가 떨려 왔다.
이젠 정말 보내야 했다.
도현은 아직 서 있는 페론드를 재촉했다.
“가야지.”
“트론.”
“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 둬.”
말없이 빤히 보자, 재수 없을 만큼 멋진 웃음을 입에 걸며 말했다.
“절대 희생하지 마. 혹여 그 결과로 모든 걸 잃는다고 해도.”
“…….”
“나의 검이자 나의 친우인 트론은 그럴 권리가 있어.”
“…새끼, 졸라 멋있는 척은.”
도현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어떻게든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다.
아마도 얼굴은 엉망이겠지.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다시 재촉하려는데 페론드가 탄성을 냈다.
“아, 나 돌아가면 아카데미 설립할 거야.”
“아카데미?”
갑작스러운 말에 도현은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햄버거 먹을 때 헌터 스쿨? 그런 말을 들었거든. 인재를 찾기보다 인재를 양성한다. 왜 이걸 생각 못했지? 이참에 기사, 마법사, 그리고 행정에 필요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거지.”
아… 뜬금없이 설립한다고 하기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더니.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그리고 이 모든 걸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도 대단했다.
“그럼 간다.”
페론드는 내일 또 볼 것처럼 가볍게 말하며 문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도현은 눈을 부릅뜬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뒤로 돌아선 페론드가 도현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개구쟁이처럼 외쳤다.
“복세편살!”
달칵.
“하아… 저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나 싶었더니…….”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친우다.
현재 방문 가능자 수:0
%$#@! 스%코&어:SSS
조언:더없이 훌륭*니다! 5주^간$ 고@! 많^으셨&습@다! 이#서 시$스!템 제작#님의&한 말씀 있겠%니다!
오류가 덕지덕지 묻은 메시지 창에서 눈길을 끈 건 제작자였다.
“시스템 제작… 한 말씀……?”
그리고 예고 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으흠! 잘 들리나요?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면 네, 정말 잘 들리는 거군요. 꽤 오랜만이죠? 제브라드입니다.」
기억 속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해맑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이가 갈렸다.
“발뺌하더니 네가 만든 게 맞잖아…….”
씹을 듯 중얼거렸다. 대답을 원했지만,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절 찾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겠죠? 다 좋은데, 저번처럼 깽판만큼은 참아 주세요.」
치고 싶어도 네가 절대 추방했잖아?
도현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늘 짧게, 본론만 요구하시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네요. 먼저 심심한 사과를 올립니다.」
…됐으니 본론…….
「당황하셨을 거예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방문자도, 대뜸 지구를 탐내는 신들도, 그리고 헌터와 시스템도. 이 모든 게 왜 귀환하고 1년 뒤에 밀려왔는지 궁금하겠죠.」
듣고 보니 그랬다.
그냥 바로 시작하든가.
「조금은 일상을 즐기셨으면 했어요. 앞으로 일어날 일은 당신이 겪었던 그 어떤 것보다 힘들 테니까.」
참 고맙네. 제브라드에 떨어지고 150년 만에 처음 본 자리에서 신이 되라고 강요하던 누구 씨와 다르게 말이야.
조소가 절로 나왔다.
그러든 말든 이야기는 흘러갔다.
「지구에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건 당신을 보내기 위해 차원의 문을 열었을 때입니다. 신에게 농락당한 지구는 멸망을 앞두고 있었죠.」
뭐?
도현은 두 눈을 깜빡였다.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신을 잡으려 했던 당신은 철저히 농락당했습니다. 차원 이동으로 힘을 절반이나 잃은 대가도 컸지만, 이미 신은 지구의 힘을 손에 넣은 후였죠.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요. 이게 첫 번째 과거였습니다.」
첫 번째 과거……?
「저는 이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방법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모든 원인은 제 욕심에서 비롯됐으니까요. 태양계라는 차원의 보호막을 뚫고 다음 대의 제브라드를 찾기 위해 소환 코드를 심어 놓은 게 화근이었죠.」
제브라드로 넘어가게 된 계기. 이건 신 제브라드가 말해 줬기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막대한 포인트를 소비해 과거로 향했습니다. 지구를 되돌리기 위해서요. 다행히 포인트는 넉넉했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횟수가 100번이 되고 1,000번이 넘었을 때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더군요. 어쩔 수 없이 다른 차원에서 용병으로 뛰기도 했었답니다.」
용병? 신도 용병을 뛴다니, 신의 세계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아마 당신도 봤을 거예요. 제 전투복. 늘 그랬듯 비싼 값에 혀를 찼겠죠.」
어……?
뭔가 이상한데?
도현의 기억에는 완전무장한 제브라드의 모습이 ‘처음’이었다.
「후후, 당신이라면 이상함을 느꼈을 거예요. 맞아요. 그날이 당신에게는 처음이지만, 저에게는 마지막 과거였죠. 정말 ‘처음’은 매우 달랐어요.」
도현이 제브라드 차원으로 처음 넘어갔을 때.
신 제브라드는 도현이 소환될 장소에 먼저 찾아가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차원을 넘어오게 된 이유와 해야 할 일까지, 친절히 가르쳤지만 도현은 모든 걸 거부하고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마지막으로 되돌린 과거는… 사실 당신이 넘어오는 것조차 인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어요. 저 또한 마지막의 마지막… 시도였거든요. 그래서 제브라드에 돌아오자마자 당신을 맞이하러 갔지만 벌써 150년이 지나 있었던 거죠.」
신과의 첫 만남.
그런 최악이 없었다.
몇천 번 반복할 정도라면서 성격 파악은 안 되나?
뭐… 애초에 150년이 지났으니 무슨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만.
「당신은 늘 한결같았죠. 어떻게 그렇게 철벽일 수가 있어요? 한 번쯤은 신이 되겠다고 말할 만도 한데.」
투덜거림에 도현은 픽 웃었다.
당연하잖아. 난 처음인데.
…한편으론 입안이 썼다.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을 일이었을 텐데, 책임을 진다니.
그런데 그 고생할 바에야 소환 코드인가 하는 걸 없애면 되지 않나?
도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제브라드가 억울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사실은 처음 소환 코드를 심었던 그 부분만 빼내면 될 일이죠. 저보고 멍청하다고 구시렁거리고 있겠죠? 그런데 그것만큼은 손댈 수 없었어요. 가상현실 게임이란 게 다른 신의 간섭으로 발전한 문명이라서 그렇대요. 저작권 위반인 거죠. 참… 신도 힘든 직업이에요.」
‘그래도 제브라드에서 페론드를 만난 건 후회하지 않잖아요?’라는 말이 이어졌지만, 도현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아무튼… 그 방법이 안 되니 다른 계획을 시도했어요. 지구를 멸망시킨 신이 둘이 되고 다섯이 되고……. 어디에도 해피엔딩은 없었어요. 마지막엔 신이 일곱이 되었더군요. 솔직히 이번도 어떤 결과를 맺을지는 모르겠어요.」
뭐라고……?
성공한 계획이 아니라는……?
제일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다다다 이어졌다.
「대신 모든 걸 갈아 넣었답니다! 왜 제가 마지막이라고 하는지 아나요?」
…나 지금 처음 듣는데 알 리가 없잖아.
「신도 생명이에요. 한계가 있다는 거죠. 다만 그 길이가 무척이나 길다는 거고요. 그런데 과거를 많이 반복해서인지 몸이 버티질 못하더라구요.」
에헤헤헷, 백치미 가득한 웃음이 들렸다.
도현은 끄응, 앓으며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너무 피곤하다…….
「방문자는 당신이 저로 인해 제브라드의 생명을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시스템입니다. 물론, 당신의 힘을 되찾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에요. 참, 보상 중에 농장은 용병질로 얻은 포상 같은 건데, 솔직히 자세히 들여다본 게 아니라서 무엇인지는 모르겠네요.」
그걸 믿으라고?
되지도 않는 거짓말은.
신이 사라지는데, 차원이 멀쩡할 리가 있나. 보험이지.
그렇게 보면 방문자 시스템의 목적도 차원 이사가 목적 같은데?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방문자는 선물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조금, 아주 조금 더 힘들었지만요.」
생색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건 고마웠다.
힘이 쭉 빠진 목소리가 조잘조잘 계속 떠들어 댔다.
「결국 모든 걸 당신에게 떠맡기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요. 염치없지만 제브라드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불분명한 미래는… 지금의 당신이라면 충분하리라 믿어요. 제가 아는 우도현, 당신이라면…….」
이후로 제브라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헛소리를 들은 것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직업이 ‘신의 대리자’에서 ‘신’으로 변경됩니다!]
[‘신의 대리자 2’ 퀘스트가 ‘신의 길 2’로 변경됩니다!]
[전대 신의 의무를 이어받아 신 제#라@… 오류 발생! %브&드의 시간 축이 비정상적으로 늦습니다.]
[시간 축 복구를 시작합니다……. 복구 완료.]
[#^%$의 신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신교, ‘우도현교’ 확인. 신교에 따라 차원의 이름이 ‘우도현’으로 변경됩니다.]
[신교 ‘우도현’교에 ‘신성력’이 생성됩니다!]
[오류 발생! 신도들의 몸에서 ‘마나’ 존재 확인. ‘신성력’이 ‘신성 마나’로 진화합니다!]
[신도들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신교에 3명의 대신관이 탄생했습니다! 신의 부름을 진행합니다.]
[오류 발생! 신이 속한 차원 ‘지구’ 확인, 신에게 귀속된 세계 ‘농장’ 확인.]
[차원 ‘우도현’은 차원 지구와 공존이 불가합니다.]
[차원 ‘우도현’은 차원 농장과 공존이 불가합니다.]
[신의 부름이 취소되었습니다.]
[차원 ‘우도현’의 힘이 미약해집니다.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지 않을 시 차원 붕괴가 시작됩니다.]
도현은 알림 메시지를 빤히 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메시지가 쭉쭉 올라가는 만큼 도현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제브라드… 가 내 이름으로 바뀌었고, 한 번 다녀와… 추방 때문에 못 가잖아……. 공존은… 하아, 뭐라는 건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다시 갑작스러운 경보와 함께 메시지가 또 올라가기 시작했다.
삐삐삐-!
[심각한 문제 발생. 차원 ‘우도현’을 지탱하는 태초의 나무를 펫-모르달이 파괴했습니다!]
[차원 붕괴가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차원 ‘우도현’ 소멸까지 4시간 59분 남았습니다.]
“…모르달……?”
네가 왜 거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