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 방문자 (1)
페론드는 눈을 깜빡였다.
처음 보는 공간, 처음 보는 장식품과 소파들.
그 사이에 다채로운 색깔의 그림이 움직이는 큰 액자까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페론드는 이 공간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너무 듣다 보니 친숙하다 못해 정겹다고 할까.
그리고 세 발자국 앞에 익숙한 사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마주한 듯 하얗게 질려 굳은 얼굴.
문을 넘어오기 전, 황실 기사단을 굴리러 간 ‘트론’과 사뭇 달랐다.
겉모습은 오히려 더 젊어진 느낌인데, 저 눈동자가 끝이 어딘지 모를 깊은 바닷속 같다고 할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딱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다행히 지구에 돌아갔구나.”
페론드는 더할 나위 없이 활짝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가 도현을 와락 껴안았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들렸다.
페론드는 친우를 위해 이렇게 말뿐인 축하밖에 못해 주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러면서도 지구로 돌아간 친우를 볼 수 있게 된 이 기회가 너무도 감사했다.
언젠가 자신이 죽으면 트론은 무조건 고립될 게 뻔했으니까.
그가 다른 차원의 인간인 건 상관없었다. 다만, 성장하지 않는 몸과 그와 반대로 대적하지 못할 만큼 강한 힘이 걱정되었다.
‘제브라드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잘 믿지도 않는 제브라드에게 진정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과 함께하는 트론보다 안정되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흐뭇함과 벅찬 가슴에 한참을 껴안고 있으니, 트론이 헛기침을 했다.
“론, 좀 놔줘.”
아아, 목소리에 담긴 감정도 확실히 다르다. 습기를 먹어 살짝 잠기긴 했지만, 앳된 느낌보단 성숙함이 먼저 다가왔다.
평소라면 학을 떼며 쌍욕을 날렸겠지.
아니, 애초에 이렇게 안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도망갔을 거다. 그리고 난 그 반응이 재미있어 계속하다 보면 황비 에이카가 또 질투에 눈이 멀어 황성을 뒤집었을 거고…….
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래도 황비는 굉장히 지혜로운 여자다. 단, 나와 트론이 엮이는 걸 뺀다면.
어쨌든 이곳에 에이카는 없으니 괜찮다.
페론드는 입에 걸린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팔을 풀었다.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트론의 시선에 집요함이 보였다.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행동이겠지.
도현이 물었다.
“…언제쯤이야?”
누군가 봤다면 이상한 물음이겠지만 페론드에게는 익숙했다.
“트론은 베로카를 굴리러 갔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는 페론드를 보며 도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어야 기억하지, 머리가 좋은 도현이라도 일일이 기억하는 건 어렵다.
그걸 이해한 페론드가 한마디 덧붙였다.
“곧 옆 나라인 세시아를 칠 거야.”
“아, 그때.”
전쟁 준비를 말하는 것이었다.
노르세아스 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제국력 10년밖에 안 된 신생 제국이었으니까. 그런 제국 서남쪽에 붙은 세시아는 제국의 3분의 1 크기의 땅이지만, 350년이 넘는 단단한 역사를 자랑했다.
그만큼 웬만한 밑바닥부터 최상의 단맛까지 다 본 곳이랄까.
그러다 보니 나라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도 잘 알았다.
쉽게 말하자면 뭣도 아닌 거로 제국을 긁어 대는 통에 짜증 난 도현이 그냥 치러 가려는 거다.
그걸 막아선 황실 기사단 플래티넘단의 단장 베로카가 황실의 위험을 들먹이며 막아섰고, 강제로 굴려지는 중이었다는 것.
결론은 도현 혼자 세시아의 왕족과 왕위를 이을 수 있는 귀족들을 다 없애 버리지만, 페론드는 세시아를 제국으로 흡수하지 않는 대신 왕족의 성을 폐지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도현이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알려 주지 않았고, 그 답은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세시아는 세 나라로 찢어졌다.
왕으로 앉은 3명은 세습되지 않는 남작이었는데, 모두 이전의 왕족 피를 아주 옅게나마 잇고 있던 혈육이었다.
경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페론드가 농담처럼 툭 내뱉었다.
‘아마 저 나라의 평민 사이에도 분명 왕가의 피가 흐를 거야.’
100분의 1이라 해도 흐른다는 말에 도현은 처음으로 소름 끼쳤었다.
“뭘 골똘히 생각해?”
그때의 소름에 고개를 흔드니 페론드가 궁금했나 보다.
“아… 뭐, 그때 있었던 일쯤?”
도현이 세시아를 치러 갔을 때 제국의 황실은 평온했다.
오히려 혀를 내두르게 된 건 세시아가 세 나라로 찢긴 후였는데, 하루가 멀다고 목숨을 걸고 침입하거나 먹을 것, 입을 것, 황실을 채우는 모든 소품으로 위협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
그 덕에 베로카는 굴려졌던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짝 맛이 가긴 했지만, 노르세아스 제국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베로카를 떠올리던 도현이 작게 웃자 페론드는 뚱해졌다.
자신이 아는 트론이 너무 어른 같아 보여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세월에 트론을 빼앗긴 느낌.
도현이 의아해했다.
“안 물어보네?”
“뭘?”
“일어날 일.”
“물어봐서 뭐 하게. 나의 트론은, 나의 제국은 강해.”
오만함의 극치인 발언.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자신 때문에…….
“트론.”
흐려지려는 도현의 눈이 페론드를 향했다. 당당하면서도 오만함이 서린 짙은 금빛 녹안.
새삼 눈앞에 선 사람이 페론드라는 걸 깨달았다.
“왜?”
“너에게 있어 나와 함께한 시간은 어땠지?”
도현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페론드가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에게 물었던 말이었다.
지금에 와서 다시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땐 ‘최고였다.’라고 말했었지.
지금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겠지.”
뚱했던 페론드가 진한 웃음을 지었다.
“하핫!”
“…그 집착은 내가 아니라 에이카에게 보여 주라고.”
투덜거리며 시선을 돌리던 도현의 눈에 주방이 들어왔다.
페론드와 이야기가 나왔다 하면 꼭 한 번쯤은 논쟁을 벌였던 고기.
채소는 한 주먹도 먹지 않으면서 고기는 돼지 한 마리는 먹어 치울 정도로 편식이 심한 녀석이었다.
그중에서도 햄버거에 큰 관심을 보였었지.
햄버거라. 그러고 보니 근처에 패스트푸드점이 있었지?
이오르가 오기 전이었다면 만들어 먹일 생각을 했겠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도현은 이참에 페론드에게 자신이 사는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5시간의 진상 이오르를 겪은 뒤라 혹시나 싶어 본 방문 위에는 다행히 시간은 잘 떠 있었다.
문제는 남은 시간.
45분…….
넉넉잡아 1시간이었단 말인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왜 그래?”
눈꼬리가 올라가던 도현은 의아해하는 페론드를 보고 화를 가라앉혔다.
과거의 인물, 그것도 몇백 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방문자로 온 친우.
그만한 페널티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겠지.
그래… 볼 수 있다는 게 어디겠어.
아쉽지만 도현은 빠르게 수긍했다. 남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론, 햄버거 먹을래?”
도현은 빠르게 움직였다.
페론드를 데리고 패스트푸드점에 오자마자 모든 종류의 먹거리를 다 시켰다.
“나오는 대로 주시고, 최대한 빨리 만들어 주세요.”
주문을 받던 직원은 당황해하면서도 빠르게 주문을 넣었다.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헌터가 눈앞에 있다니.
더군다나 조금 전 포털 사이트에 뜬 국제 헌터 협회 괴멸 뉴스의 당사자가 어떻게 한국에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긴 테이블을 낀 6인석에 앉아 기다리는 페론드는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트론의 말대로 마법이 아닌 기계 문명이 발달한 지구.
저마다 작은 책 크기의 기계를 들고 보거나 조작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
가끔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트론이 말했던 세상에 없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만큼 뭔가 달라진 거겠지.
특히 같은 옷을 입은 남녀가 무리 지어 앉은 한 자리는 주문하는 도현에게 시선이 꽂혀 떠나질 않았다.
한 남학생이 말했다.
“저기 우도현 헌터 아냐? 중국에서 제로급 몬스터도 혼자 처리하고, 이번에 영국의 국제 헌터 협회를 괴멸시키기도 했잖아.”
“진짜 아무리 헌터라지만, 저 정도면 애니 주인공 아냐? 원 펀치! 영상 없었으면 믿을 사람 하나도 없겠다.”
“난 싫어. 헌터만 보고 헌터 스쿨에 입학했는데, 워프도 다 없애 버리고. 무슨 독식도 저런 독식이 다 있어? 이제 뭐 하고 살아야 해?”
불만을 토로한 남학생의 말에 한 학생만 제외하고 모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 안 한 여학생이 말했다.
“블랙홀 랜드 있잖아. 난 오히려 나뉘니까 좋은데? 우리나라도 안전해지고. 그냥 복잡한 세상 편하게 생각하고 살자고. 복세편살!”
수긍했던 남학생 하나가 여학생의 말에 맞장구쳤다.
“동의어보감! 오졌고요~ 지렸고요~ 레릿… 케엑!”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른 다른 여학생이 투덜댔다.
“헌터 스쿨 다니면서 급식체 남발이야? 이럴 땐 띵언이라고 하면 끝이지.”
낄낄대며 장난을 치던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페론드는 맞은편에 앉는 도현을 발견했다.
“신기해?”
“당연하지. 넌 안 그랬냐?”
“어. 적응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누가 그랬더라?”
“재미없는 놈.”
그 한마디에 도현은 키득거렸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주문한 지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새 직원이 음식을 가지고 자리까지 가져왔다.
쟁반에 가득 쌓인 먹을 것. 페론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이렇게 빨라?”
“내가 말했잖아. 내 나라는 ‘빨리빨리’가 장난 아니라고. 너도 빨리빨리 먹어야 할 거야.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도현은 히죽 웃으며 햄버거 하나를 들어 햄버거가 반 정도 보이게 포장지로 감싸 페론드에게 넘겼다.
“손에 묻으니까 이렇게 먹으면 돼.”
그리고 콜라를 테이블로 빼고 쟁반 위에 감자튀김을 가득 부었다.
감자튀김이 들어 있던 케이스를 펼쳐 케첩을 쭉 짜 세팅을 끝냈다.
“본래 감튀는 뜨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거든.”
감자튀김을 하나 들어 찍어 먹어 보이자 페론드는 빈손을 들어 따라 했다.
“와…….”
뜨끈한 감자튀김의 짭조름한 맛과 케첩의 단맛에 감탄이 안 나올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눈을 휘며 도현이 말했다.
“쥑이지? 햄버거도 한 입 먹어 봐.”
이렇게 먹는 거라며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먹어 보이자, 페론드는 입을 쩍쩍 벌려 턱을 풀어 주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
페론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드러운 빵과 고기의 조합은 좋았다. 그 향긋한 향에 이어 입안에 퍼지는 매운맛이 문제였다.
씹지도 뱉지도 못하고 도현을 쳐다보자 킬킬 웃고만 있었다.
일부러!
“콜라 마셔. 마시면 괜찮아.”
빨대를 끼운 콜라를 냉큼 받자마자 꿀꺽꿀꺽 마시던 페론드는 따가운 탄산에 벌어지려는 입을 소드마스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참았다.
도현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며 음식물을 모두 삼킨 그는 햄버거를 내려놓자마자 도현의 목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너, 너! 일부러 그랬지? 어?”
가볍게 피하는 바람에 테이블에 엎어질 뻔한 몸을 가까스로 폈지만, 이 놀림에 대한 복수를 못한 게 아쉬웠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물 흐르듯 피하는 동작도.
새삼 미래의 트론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웃던 도현은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맵지만 맛있잖아. 이것도 먹어 봐. 치킨너겟이라는 건데 맛있어.”
갈색의 바구니에 든 음식이었다. 소스 중에 붉은색이 마음에 걸렸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던 탓에 다시 속는 셈 치고 먹어 보니 달콤한 맛에 적당히 매운맛이 섞여 있었다. 이건 정말 취향 저격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음식은 이후로도 계속 나왔다.
햄버거도 좋았지만, 차가운 우유에 쿠키를 섞은 아이스크림도 맛있었고, 얼음 알갱이가 씹히는 아이스크림도 좋았다.
특히 튀긴 치즈와 튀긴 닭고기는 먹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신세계를 경험했고.
그렇게 계속될 것 같던 시간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끝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