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50화 (149/200)

# 150

150. --- 조건 (4)

국제 헌터 협회장, 헤레이스 얼터는 도현을 헌터 협회의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 뒤 주절주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도현은 한마디로 축약했다.

“그러니까, 나보고 세계의 모든 워프를 없애라는 말입니까?”

“아니, 우 헌터님 홀로 지구의 모든 워프를 파괴하실 순 없죠. 그건 신이나 가능한 일. 우 헌터님께 워프를 파괴할 수 있는 헌터들의 육성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육성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워프에 들어가서 경험을 쌓는 것이지요.”

“겸사겸사 파괴도 하고요?”

헤레이스 얼터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비서와 가드 헌터 모두를 물렸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앞뒤도 재어 보지 않고 도현에게 달려들었을 거다.

언행과 단어에 무척 신경 써서 돌려 말했던 그는 도현의 말에 모든 게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도현의 입 모양이 전혀 다른 언어를 말하고 있었으니까.

‘통역에 관련된 뭔가를 사용하고 있는 거겠지…….’

그게 아이템이든, 능력이든. 자신의 노고까지 통역해 주지는 못한다.

중국의 재앙을 막아 내 준 일에 이어 아일랜드와 아일랜드해의 모든 워프를 파괴해 준 그 모습에 흥분한 나머지 그를 너무 좋게만 봐 버렸다.

그 덕에 차갑기 그지없는 도현의 모습에 엄청나게 실망해 버렸고.

짧은 대화로 도현의 성향을 파악한 헤레이스 얼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중국이 재앙을 겪고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였습니다. 그 중심축이 된 건 소림의 우슈보 스님과 비휴단이라는 헌터 팀이더군요. 그들을 키워 낸 건 우 헌터죠. 이미 확실한 증거 사진과 목격자의 녹취도 있습니다.”

그러곤 발뺌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헤레이스 얼터는 근 두 달 만에 3급에서 1급이 된 차도식과 2급 하지현, 2주 만에 2, 3급이 된 프로페셔널 팀을 언급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은 도현의 자국이니 입을 댈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워프 헌팅이나 파괴는 헌터의 의무이니 당연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제 헌터 협회에서는 그저 무료 봉사를 원치 않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분명히 지급할 생각입니다.”

도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미국은 어떤 상황입니까?”

“…미국 말입니까? 최소한의 피해로, 안정적으로 워프 브레이크를 막아 낸 유일한 나라죠. 곧 캐나다와 멕시코로 워프 브레이크 원정에 나선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미국 헌터 협회장 와이어트 콜트 씨와 리암 루카스 씨는 많은 헌터에게 귀감이 되시는 분들이죠.”

헤레이스 얼터는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현을 꼬집듯 말했다.

그 의중을 모를 리 없는 도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미국에 부탁하시죠.”

“무, 무슨! 우 헌터! 헌터의……!”

“아아, 의무니 책임이니 지껄이지 마세요. 전 한낱 인간이라 부담스럽거든요. 그래서 헌터도 그만둘까 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그는 도현을 직시하며 경고했다.

“그 말, 세계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어도 괜찮습니까? 물론 헌터 우도현은 옹졸하고 편협한 인간으로 철저하게 알릴 겁니다만.”

“여기나 저기나 대의를 참 좋아해. 적이 누군지 분간도 못하면서.”

빈정거림에 헤레이스 얼터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힘을 가진 자에게 의무와 책임은 당연하다!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힘 또한 사라져야 하는 것! 우도현, 재앙을 막은 공은 인정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도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턱을 치켜들고 도발했다.

“해 봐. 대신 그 값은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도현이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하자 그는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우도현, 네가 아일랜드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네 동료를 찾고 있었지. 그런데 흔적조차 없다는 건 텔레포터를 희생으로 왔다는 증거. 조력자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영국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쾅!

문이 벌컥 열리며 30명이 넘는 헌터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워프 브레이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동원된 헌터를 보니 고생하고 있을 헌터들과는 달랐다.

2급 그린 두 놈을 빼면 나머지는 3급 블루.

영국에서도 비밀리에 헌터를 육성한 듯했다.

30명의 헌터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도현을 빙 둘러싸자 헤레이스 얼터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살인을 꺼린다는 걸 알고 있지. 제아무리 제로급 헌터라 해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도현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꼭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알아?”

둘러싼 헌터들과 헤레이스 얼터는 대답 대신 힘을 끌어 올렸다.

그 기세에 협회장실의 집기와 유리창이 터져 나가며 거친 바람이 실내를 휘저었다. 균열이 생긴 한쪽 벽은 구멍이 뻥 뚫렸고 들이치는 바람이 흉흉한 소리를 냈다.

31명이 내는 위압감에 2급 헌터라면 긴장했을지 모르겠지만, 도현은커녕 1급 헌터의 발목도 못 잡을 전력이었다.

경험이 없어서겠지.

이제야 2, 3급이 나오기 시작한 상황이니까.

저들이 갖다 붙인 제로급도 체감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럼 제대로 보여 줘야지.”

도현의 발밑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의아해하던 헌터들은 연기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자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힘을 더 끌어 올려 맞섰다.

하지만.

“커억!”

연기에 잡아먹힌 30명의 헌터들은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고, 혼자 남은 헤레이스 얼터는 하얗게 질려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어디 가? 나랑 같이 나가야지?”

“으아아아- 어억!”

검은 연기가 그의 목을 잡아 들자 도현은 건물 밖 허공으로 나갔다.

“어? 저게 뭐야?”

“사람인데? 혹시 헌터 제로?”

“카메라, 뭐 해? 어서 찍어! 일단 찍으라고!”

협회 건물 아래가 웅성거렸다.

거기는 몰려든 기자들과 주차된 차들로 가득했는데, 도현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카메라들이 일제히 하늘에 뜬 그를 담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우도현 헌터 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검은 연기 때문에 어떤 능력도 사용할 수 없었던 헤레이스 얼터는 공포에 사로잡혀 빌고 또 빌었다.

도현은 그를 무시한 채 자신의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국제 헌터 협회의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받기만 뭐해서 직접 나왔습니다.]

지상에서 탄성이 흘렀다. 환대, 그에 보답은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그 속에는 의아함도 있었다. 협회장인 헤레이스 얼터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도현은 발아래 카메라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받은 만큼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도현은 입을 다물며 몸에 잠재된 리갈루스의 힘을 끌어 올렸다. 발밑에서 천천히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사방팔방으로 쏘아졌다.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러나 연기가 닿은 곳은 영국 전체에 퍼진 워프였다.

콰지직! 펑!

새카맣게 물든 워프들은 녹아내리더니 금세 자취를 감췄다.

오오오-!

영국 전체가 들썩였다. 헌터 제로라는 환호가 하늘을 뒤흔들 정도로 크게 이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확인하지 못했다.

워프를 없앤 검은 연기가 땅에 스며드는 것을.

“따, 땅이! 우도현 헌터님, 제발!”

허공에 있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던 헤레이스 얼터는 머릿속을 울리는 경종에 다급해졌다.

헌터 제로라 불리는 우도현. 중국의 제로급이라는 재앙을 처리할 정도로 강한 헌터다.

그가 왜 제로급인지, 제로급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힘을 가졌는지 깨달은 헤레이스 얼터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모두가… 영국이 지워질 수도 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저 하나 때문에 영국이 지워지는 건…….”

“아무도 안 죽여. 누가 말한 것처럼 살인은 꺼리는 편이라서.”

땅에 스며든 검은 연기는 빠르게 영국 전체로 퍼졌다.

그렇게 모든 땅을 잡아먹었을 때, 도현은 국제 헌터 협회 건물을 검지로 가리켰다.

스스슥.

검게 물든 건물은 본래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고, 건물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기절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헤레이스 얼터는 이제 넋이 나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도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작은 소리가 메아리치듯 영국 전체로 퍼져 나가며 땅을 물들였던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헤레이스 얼터가 멍청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몸을 가득 채웠던 마나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영혼이 뜯겨 나가 버린 것같이 밀려온 상실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도현은 초점 없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제 이 땅에 각성자는 없어. 물론 헌터도 없지. 워프도 사라졌으니 몬스터의 밥이 되는 일은 없을 거야.”

헤레이스 얼터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이게 내가 내리는, 힘을 남용한 책임이다.”

헤레이스 얼터의 몸을 옥죄었던 검은 연기가 사라졌다. 지상으로 추락할 줄 알았던 몸은 땅을 밟은 듯 허공에 뜬 채였다.

그는 도현을 향해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신이시여,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상과 가까워질수록 혼란에 가득 찬 영국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이 안착한 곳은 국제 헌터 협회 건물이 있던 자리.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카메라와 기자들을 보며 헤레이스 얼터는 오열했다.

***

도현이 영국을 떠나 도착한 곳은 차도식을 두고 갔던 시리아였다.

처음 왔을 때 수없이 떠돌아다니던 몬스터는 사라지고 사체 덩어리가 공동묘지의 무덤처럼 즐비해 있었다.

그 중앙, 땅에 대검을 박고 앉아 있는 차도식이 보였다.

도현은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매부, 뭐 해요? 끝났으면 돌아가지.”

“아, 처남님 오셨습니까? 하하, 막 끝내고 숨 좀 돌리고 있었습니다.”

지친 기색으로 웃는 차도식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싸움으로 인해 바지만 남은 헌터 웨어는 넝마가 되었고, 뒤집어쓴 몬스터 체액이 붉은 노을에 검게 번들거렸다.

그 사이로 붉은 핏물이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지만, 차도식의 두 눈은 생기가 넘쳤다.

“대화가 통했나 보네요.”

“예,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가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절 잊지 않고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기가 넘치는 게 아니라 정신 줄을 놓은 거였나?

평소 살다시피 하는 곳을 까먹을 정도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거다.

“농장으로 가면 되잖아요?”

“아아! 농장!”

당연하다는 듯이 묻자, 길게 이어지는 탄성이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걸 대변했다.

도현은 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죠.”

끄응, 힘겹게 몸을 일으킨 차도식은 대검을 소환 해제하며 도현에게 물었다.

“국제 헌터 협회에 간 일은 잘 처리하신 겁니까?”

“그건 내일 이야기하죠. 우선은 쉬고요.”

“예, 처남님! 가시죠!”

“아, 먼저 돌아가세요. 일이 있어서 바로 집에 갈 거예요.”

“그러시군요. 참, 이 사체들은 어떡하죠? 이대로 두고 가기엔 아까운데.”

도현은 차도식의 인벤토리를 확장시켜 몬스터 사체를 쓸어 담고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고 편히 앉아 울렸던 알림을 확인했다.

[‘--- 조건 2’를 달성했습니다!]

[‘--- 조건’이 ‘격의 조건’으로 변경됩니다!]

[진정한 격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격의 조건]

[--- 조건 1]을 달성합니다.

대상의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상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조건 2]를 달성합니다.

대상의 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격이 낮은 이들이 당신에게 존경과 경외를 보냅니다.

격이 두 단계 이상 낮은 이들은 당신에게서 위압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위압감과 두려움을 느낀 적이 당신을 공격할 경우 공격력이 30퍼센트 감소합니다.

“신의 조건이 아니었잖아……?”

사가의 말을 다 믿었던 건 아니지만, 적당히 듣길 잘한 것 같다.

“그런데 사가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상태창을 켠 김에 펫창에서 다시 사가를 불러 봐도 묵묵부답이었다. 짜증스럽게 펫창을 터치하던 도현은 손이 엇나가며 모르달을 불렀지만, 사가처럼 불러지지 않았다.

“이것들이…….”

영국에서 힘을 좀 쓴 탓에 자려고 했더니 도움이 안 된다.

도현이 당장 농장 화산 지대의 토토 대장간에 가려고 농장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끼이익-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방문자가 들어왔다.

성숙한 듯하면서도 앳된 느낌이 남은 얼굴과 금색이 섞인 짙은 녹안.

차분한 물빛 색의 댄디컷 머리 위에 얹어진 수수한 황금 왕관이 반짝였다.

도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

유일한 친우이자 자신의 왕.

“페론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