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49화 (148/200)

# 149

149. --- 조건 (3)

도현이 친히 바닷속의 워프 브레이크까지 깨 버리고 그 주변 몬스터까지 정리한 뒤 돌아왔을 때는 도심은 이미 소강상태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Hunter Zero?”

물개 워프가 있었던 자리. 지친 기색의 사내가 뒷정리를 지켜보다 나타난 도현을 향해 물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에 하얀 피부, 서양인치고 마른 체격.

좀 전에 온갖 도구로 몬스터에게 불을 지르던 헌터 중 하나였다.

“Are You Hunter DoHyun Woo?”

멀뚱히 보고만 있자 다시 물어 왔다.

이럴 땐 주펑이 있으면 좋은데.

괜히 아쉬웠지만, 한국과 친국 전담으로 잠도 줄일 정도라고 하니 부르기도 뭐했다.

수긍하며 통역 마법을 쓴 도현은 목적지의 위치를 물었다.

“우도현이다. 국제 헌터 협회가 어디지?”

눈을 크게 뜬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헌터 제로? 정말 헌터 제로인가? 하하, 헌터 제로가 이 먼 아일랜드를 구해 주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군!”

“아일랜드……? 영국이 아니고?”

“그래, 여긴 아일랜드 더블린이야. 영국은 옆 나라지.”

여기가 아니라, 옆이라니.

아일랜드를 구한 영웅이라 떠들어 대는 말은 도현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우니 다행이지, 혹여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상황은 없을 거다.

사내는 도현을 보고 작게 웃었다.

“표정을 보니 잘못 왔군. 하지만 덕분에 아일랜드가 살았어.”

“그렇게 고마워할 일은 아니고. 그런데 국제 헌터 협회 방향이 어디지?”

“벌써 가려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되묻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외국에서는 동양인을 싫어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은데, 오래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니 오히려 이쪽이 적응 안 된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어울려 주지 그래? 3일 내내 뛰어다녔더니 제정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헌터 제로와의 점심을 포기할 순 없지!”

점심이라.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회의실에서 시리아에 매부를 두고 아일랜드에 온 것까지 10분쯤.

터진 워프까지 정리했지만, 실상은 30분도 채 안 걸렸다.

다 합쳐 봤자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만약 한국에서 정식으로 답변하고 준비한 뒤 출발했다면 적어도 3일 이상 걸릴 여정일 텐데.

게다가 국제 헌터 협회에 답변해야 할 매부는 혼자 시리아에서 몬스터를 잡고 있다.

어쩌면 국제 헌터 협회에서는 자신이 가는 것조차 아직 모를지도?

그리고 막상 가 봤자 하는 일이라고는 워프 브레이크 처리나 인명 구조가 다겠지.

뭐… 서두를 필요는 없겠네.

생각을 끝낸 도현이 사내에게 물었다.

“아일랜드는 뭐가 맛있지?”

“맛있는 거야 많지! 고르기만 하라고! 다들 들었지? 헌터 제로와 점심이다!”

신난 사내가 뒤돌아 여기로 집중된 시선들을 향해 외쳤고, 파김치가 된 헌터들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비명 같은 함성을 질러 댔다.

그 속에서 사내는 씩 웃으며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할이야. 만나서 정말 반가워, 헌터 제로.”

“우도현. 그런데 날 왜 제로라 부르지?”

떨떠름하게 묻자 타할이 오히려 눈을 끔뻑였다.

“정말 모르는 거야? 중국 제로급 몬스터를 없앴잖아? 그 영상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고.”

이게 시작이었다.

주변에 늘어져 있던 헌터들이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 질문 폭탄이 터졌다.

‘치우천왕’이라는 몬스터가 어떻게 중국에 있었는지, 정황으로 보면 꽤 오래전부터 중국에 있었을 거라며 몬스터가 아니라 외계인이란 말도 나왔다.

그래서 등급이 아닌 급으로 부르는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이어졌다.

물론 도현은 그게 유머라고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거기에 지지 않겠다는 듯 타할은 더 많이 떠들어 댔다.

“국제 헌터 협회가 옆 나라라서 도움을 많이 받지. 혜택이라면 혜택이지만, 아일랜드는 헌터 수가 가장 적다고. 그리고 헌터에 관한 소식도 우리가 제일 빨라.”

소식이란 건 별것 아니었다.

워프 브레이크 사태가 끝나면 등급과 급수로 나눈 걸 급으로 통합한다는 둥, 한국에만 나타난 2세대 워프 조사도 있을 거란다.

이런 수다에 가까운 정보를 들으며 겨우 문을 연 햄버거 가게를 찾았고, 주문을 마치자마자 수다를 빙자한 질문이 이어졌다.

“2세대 워프에 고립됐던 자국 헌터들을 구했었지? 워프 파괴도 했고. 3급이라던데 역시 헌터 제로야. 2세대 워프는 어땠어? 1세대와는 차원이 다르다던데? 아, 차원이라니까 생각난다. 유토피아 블랙홀 랜드! 왜 한국인만 여행할 수 있는……?”

“하아.”

정신이 사나워진 도현은 결국 타할의 목소리를 사일런스라는 마법으로 나오지 않게 만들었고, 다른 헌터들은 배를 잡고 넘어갔다.

끓어올랐던 흥분이 가시며 점심만큼은 조용하고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아일랜드 헌터들과의 만남은 짧았다. 누적된 피로로 먹다가 대부분이 졸기 시작해서인데,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그 직후 도현은 아일랜드에 퍼진 워프들을 달 조각째 파괴해 버렸다.

워프핵을 수거하기엔 이미 중국 워프로 낮은 등급의 워프핵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귀찮음도 한몫했지만.

이제 본 목적지였던 옆 나라, 영국으로 넘어가던 도현은 두 나라 사이에 낀 바다에서 멈췄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햇빛에 반짝였다. 투명하다 못해 바닷속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이 바다는 아일랜드해였다.

바닷속에는 다양한 크기의 워프가 자갈돌처럼 수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위로 몬스터들이 바다를 배회하며 서로 잡아먹거나 해양 생물들을 쫓아 먼 바다로 나가는 게 보였다.

워프가 터진다는 걸 알지 못했을 때야 관광 코스로도 좋았겠지만, 지금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까지 정리하기엔 지상의 워프만으로도 벅차겠지.

도현은 그런 워프 중에 바다 중앙, 맨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다른 곳보다 수심이 두 배로 깊은 곳이었는데, 그 끝에 붉은색의 달 조각이 보였다.

영국으로 넘어가던 도현을 멈추게 만든 2주기의 1등급 워프였다.

“저걸 몰라서 둔 건 아닐 테고.”

바다의 평균 수심이 300미터가 좀 넘으니 저기는 600미터쯤.

4급 헌터라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방치한 이유는 포기했다고 봐야겠지.

이미 주변에는 워프 브레이크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활개를 쳐 댔고, 그 주변으로는 터질 워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손대더라도 잡음은 없겠네.”

도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무려 1등급 워프였으니까.

그렇게 넓다는 중국에서도 1등급 워프는 도철을 제외하고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나라에 하나만 준다는 듯이.

그렇게 치면 대한민국에는 왜 없는지 모르겠지만.

도현은 1급 워프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른 워프를 처리할지 말지 고민했다.

이미 지상의 워프는 다 치운 상황에서 바다라고 두기에도 뭐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바다이기도 했고. 특히 중간의 섬은 몬스터의 땅이 되겠지.

여기만 대충 밀어 줘도 먼 바다에서 들어오는 것들은 처리하기 쉬울 거다.

도현은 손을 들었다가 입맛을 쩝 다셨다.

“하나하나 닫는 것도 귀찮네.”

생각을 끝낸 그는 시겔로를 꺼냈다.

시겔로가 귀찮은 듯 작은 스파크를 팡팡, 터트려 댔다.

“나도 너 자주 보기 싫거든.”

리갈루스를 잡은 뒤 웬만해서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금방 뒤집은 건 이오르였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렸던 요리 수업을 그놈이 망쳐 버렸으니까.

손에 쥐기 무섭게 화란 화를 다 쏟아 내는 시겔로와 이오르까지 끼워 푸닥거리했던 기억이 잠시 떠오르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시겔로도 기분 나쁨을 온몸으로 표현 중이시고.

손잡이를 타고 흐르는 전류가 신경을 긁었다.

먹는 거에 꽂힌 미친 새끼이니, 거기에 맺힌 뒤끝은 그에 상응하는 먹을 걸 주기 전까지 오래오래 우려먹을 게 분명했다.

도현은 바다를 향해 시겔로를 뻗었다. 1등급 워프가 있는 자리다.

“저거 보여?”

터지던 스파크와 손안에 흐르던 전류가 뚝 멈췄다.

“저기 가려니까 주변에 잔챙이들이 많아서. 한 방에 끝내고 가자.”

다시 전류가 흘렀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투였다.

제대로 삐쳤다.

리갈루스를 못 먹게 한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은.

아귀 미친 검을 달래야 한다니.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파지지직!

“뭐? 리갈루스가 네 먹이였다고? 봉인을 풀었으면……. 하, 이 미친 새끼가 이젠 약까지 파네. 팔다리 잘라 먹은 거로 값은 충분할 텐데, 어디서 개소리야?”

움찔, 잠깐 멈춘 스파크가 두 배, 세 배로 커져 터지기 시작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차라리 몸을 움직이고 말지.

필요할 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사가나, 이 미친 새끼나 다 필요 없다.

“남은 신 놈들 그냥 잡고 말지. 내가 이 미친 새끼를 쓰나 봐라.”

거짓말처럼 스파크가 사라지더니 얌전히 우웅, 소리를 냈다.

“몇 남았냐고? 셋 남았지.”

답을 듣자마자 살짝 몸을 떨던 시겔로는 다소곳한 새색시처럼 칼날을 흔들어 댔다.

도현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시겔로는 알아서 힘을 끌어모았다.

혀를 찬 도현은 바다를 향해 가볍게 시겔로를 휘둘렀다.

쾅! 콰앙! 푸화아악!

워프 하나가 터질 때마다 물길이 몇십 미터씩 치솟았다. 출렁이는 물결이 죽은 몬스터에서 흐른 녹색 피에 물들어 갔다.

바다를 낀 육지에 사람들이 몰리는 게 보였다. 갈채와 휘파람 섞인 환호가 옅게 들려왔다.

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는 1등급 워프에 들어가는 것도 들키게 생겼다.

“꼭 요란하게 해야 돼?”

이번엔 시겔로가 무시했다. 이놈 입장에선 그나마 조용히 처리하는 게 맞았다. 다만 좁은 면적에 워프가 너무 많이 몰린 탓이었다.

시겔로를 몇 번 더 휘둘러 바닷속의 워프를 정리한 도현은 눈독 들였던 1등급 워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사람들이 계속 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바다의 워프 전부를 처리해 주었는데 1등급 워프 좀 들쑤신다고 뭐라 하면 안 되지.

“뭐가 있는지 가 볼까.”

도현은 몸을 움직이며 시겔로를 허공에 던졌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는데, 그게 일을 벌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짜자자작!

그대로 쏘아진 시겔로는 1등급 워프에 칼끝을 박고 사라졌다. 그 여파는…….

퍼엉!

1등급 워프 브레이크였다.

쿠구구구-

요란하게 출렁이던 바다가 이제는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닷속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크기는 옆의 섬 절반 정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공포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섬……?”

“검은 섬이라고?”

“몬스터 아니야?”

육지에서 봤다면 섬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허공에서 내려다본 도현은 그게 섬이 아닌 엄청난 크기의 고래라는 걸 깨달았다. 섬이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까.

인어 워프에서 봤던 길쭉한 그 고래들과 다르게 공에 흡사한 겉모습이었다.

거기에 저렇게 무식한 크기라니.

다행이라면 워프에서 나온 건 저것 하나밖에 없었다.

도현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가 웬일로 말을 잘 듣는다 싶었더니.”

고래가 가리고 있어 워프가 어떤 상태인지는 볼 수 없었지만, 감각에 잡힌 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너덜너덜해져 사라지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곧 사라지고 말 거다.

“워프핵은 물 건너갔네.”

이를 갈며 짜증을 내던 도현은 그 고래를 빤히 바라봤다.

몸의 절반을 수면 밖에 내놓은 채 얌전히 있는다 싶었더니, 바다에 떠다니는 몬스터 사체를 열심히 흡입하고 있었다.

몸집이 커서 그런지 그 많은 몬스터를 플랑크톤 마시듯 먹어 버렸다.

“일단은 저걸 치우든가 해야지.”

쓸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앙을 일으키게 두느니 농장 바다에 풀어 두는 게 낫겠지.

“아흐라나가 화 안 내려나?”

뭐… 알아서 잘하겠지.

대충 생각한 도현은 고래 머리를 밟고 섰다.

「저를 깨워 주신 분이군요!」

…뭐지? 이 발랄함은?

말도 할 줄은 몰랐던 도현은 더 당황했다.

「먹이까지 챙겨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안 그래도 막 수면기가 끝나서 너무 허기가 졌거든요~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요? 주변에 맛있는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빨리 가고 싶은데, 인사는 하고 가야죠!」

음, 빨리 농장에 넣어야겠다.

얘도 쥐어 패야 농장에 들어가려나?

그래도 도철과 달리 말은 통하니까 물어나 볼까?

“선택지를 줄게. 요리 재료가 될래, 다른 곳에 갈래?”

「다른 곳이요! 당신에게서 냄새가 나요. 이 세계보다 더 맛있는 냄새가. 어떻게 가면 되죠?」

뭐 이런 몬스터가 다 있는 건지.

1등급 몬스터면 다 이런가?

도철은 힘만 센 무식한 아이 같았는데, 이 고래는 적어도 머리가 있다.

서로 힘 안 빼고 정리할 수 있으면 차라리 그게 낫지.

도현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양쪽 나라나 섬에 계속 모이는 사람들 때문에 뒤로 미루며 고래를 농장의 바다로 보냈다.

그리고.

바다까지 직접 날아온 국제 헌터 협회의 협회장, 헤레이스 얼터의 환대와 함께 국제 헌터 협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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