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 --- 조건 (1)
사가가 이오르와 재회했을 때, 차도식은 도현을 향해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도현 신님, 세계를 구해 주십시오!”
진지하다 못해 사생결단을 낼 것 같은 분위기.
그 옆에 서 있던 하지현도 애써 당황을 감추며, 죄인 같은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농장에서 헌터 협회의 협회장실로 곧장 넘어왔다. 평소였다면 주변으로 나와 1층에서 협회장실로 올라간다는데, 최근 정부와의 트러블에 이어 전 대통령의 비리에 헌터 협회가 정신없이 바빴다.
그렇게 직행한 곳은 간부 회의실.
들어서자마자 벽 한쪽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수십 개의 작은 창들이 제각기 다른 영상들을 송출하고 있었다.
각국의 워프 브레이크 사태 영상.
영상 중에는 흑백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었는데, 워프 브레이크를 막아 내지 못하고 몬스터들에게 땅을 빼앗긴 나라들이었다.
반대로 컬러 영상은 워프 브레이크를 막아 낸 나라들인데, 탈진한 헌터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지고 수습팀이 그 주변을 부산스럽게 오갔다.
문제는 그들의 표정이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어둡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게, 주거지고 도심이고 할 거 없이 전투로 초토화가 되었고, 그 흔적인 파편 사이에는 사람의 것도 함께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왜 국제 헌터 협회에서 지원 요청이 빗발치는지 알 만했다.
그리고 대답을 못한 이유도.
머리가 장식이 아니고서야 자살하러 갈 사람은 없을 테니까.
특히 몬스터들의 땅이 된 나라들은 어떻게 할 건지, 대책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직 한국과 중국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데다, 지원 요청까지 무시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타고 화가 치솟을까.
그럼에도 두 나라를 욕하는 이야기는 없고, 중국의 재난과 한국의 헌터 정부 수립 뉴스만 더 크게 떠들어 댔다.
눈치를 보고 있단 말이었다.
특히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도현의 워프 털기 사건은 지금에 와서 선행으로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죽는 것보단 차라리 생계 걱정을 하는 게 나을 테니까.
대한민국의 비상 체제 사건 이후 각국에서도 워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내의 상황을 경험 삼아 잘 대처했지만, 직접 막아 냈던 헌터들도, 시민들도 직감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워프가 존재하는 한 무수히 반복될 상황이라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동원할 수 있는 헌터의 한계와 연달아 터지는 워프 브레이크는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이어졌다.
결국 상처뿐인 승리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전멸해 버린 나라들이 더 많았다.
차도식의 부탁도 그런 이유였다.
어쨌든 의도는 좋은데, 괴상한 호칭에 인상을 구긴 강혁이 투덜거렸다.
“누구한테는 아저씨니 협회장님이라더니, 도현 신- 니임?”
차도식은 강혁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늘 도현 님께 도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은혜에 보답하려면 하루빨리 강해져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소림의 도철 워프에서 구르다 1급이 되었을 때, 감정이 북받쳐 울면서 웃었다.
“1급이 되고서 제일 기뻤던 건 드디어 밥값을 할 수 있어섭니다.”
그때의 감격이 다시 차오른 건지 차도식의 목소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한국 헌터 협회장으로 오르며 헌터 정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맡은 첫 공식 업무인 워프 브레이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삶의 터전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1급 헌터가 됐다 한들 전 세계를 구할 수는 없다.
그게 현실이었다.
무기력함에 이어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든 세계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최고의 카드가 있었다.
자신이 숭배하는 현존하는 신.
우도현.
차도식은 몸을 바로 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며 무릎을 쿵, 하고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엎드렸다.
기겁하는 하지현과 신음하는 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도식은 강하지만 오만하지 않게, 자신의 신에게 갈구하는 신도의 모습으로 말했다.
“앞으로 어떠한 일로도 도현 신님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세계를 구해 주십시오!”
“하아…….”
도현은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지구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당황한 두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다. 마치 빨리 해결하라고 채근하듯이.
“매부.”
“예, 도현 신님.”
“처남입니다.”
“예, 도현 신… 처남님.”
“우선 자리에 앉아요.”
반협박으로 호칭을 고친 도현은 차도식이 자리에 앉는 동안 허공을 몇 번 터치했다.
셋은 도현의 행동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현은 혀를 차며 말했다.
“사가를 불러 처리하려 했더니 부를 수가 없네요.”
“사가라면 그… 농장과 블랙홀 랜드에 돌아다니는 고양이?”
하지현이 눈을 끔뻑이며 묻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와 워프……?
연관성을 전혀 찾지 못하는 그녀를 제외하고 강혁과 차도식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강혁은 세상이 뒤집힌 날의 기억을, 차도식은 강혁을 업고 도현의 집에 찾아갔던 날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차도식이 물었다.
“설마, 모든 워프를 없앨 수 있는 겁니까?”
“만들었으니 없앨 수도 있지 않겠어요? 뭐, 부재중이라 기다리기도 그렇고.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겠네요.”
아쉬움 가득한 탄성이 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매부, 지원 요청 인원은 어떻게 되죠?”
“딱히 언급은 없었습니다. 많을수록 좋겠죠. 지금까지 워프 브레이크만 해도 적게는 10개, 많게는 50개까지 터졌으니까요.”
“50개요?”
“예, 그것도 지금까지의 확인된 것만입니다. 곧 일어날 워프 브레이크 건만 해도 최소 500개가 넘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워프 브레이크를 막지 못한 나라의 경우, 주변 워프까지 다 터졌단다. 그게 1년 채 안 된 것이든, 1주기를 넘긴 것이든 전부.
현상을 파악한 결과, 워프 브레이크 주변에서 퍼져 나가는 형식으로 워프가 터지면서 짙어진 마나 농도가 영향을 준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 워프만 1만 개 이상.
2주기 워프만 터진다는 전제가 사라지면서 세상은 혼란과 불안이 급속도로 퍼지는 상황이었다.
도현은 한숨부터 나왔다. 털었던 중국 워프만 해도 2천 개가 넘는 걸 보고 사가의 욕을 엄청나게 했었는데, 이건 정말 사가를 불러 수습해야 할 정도다.
“워프가 왜 이렇게 많죠?”
차도식은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한 도현을 보고 쓰게 웃었다.
“우리나라는 초기에 워프 파괴에 중점을 두었기에 많지 않았습니다. 헌터들의 질도 좀 높은 편이었고요. 특이 케이스인 거죠.”
국내 헌터들도 약하다 싶었는데, 외국은 더하다니……. 환장하겠다.
그렇다고 3급 이상의 헌터가 없는 건 아니다. 그 수가 너무 적은 게 문제다.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소수의 한계는 명확했으니까.
그렇다 보니 워프 브레이크를 막아 내더라도 주변 국가나 시에서 막아 내지 못하면 그 몫까지 감당해야 했다.
나라 대부분 이런 식으로 휩쓸린 거고.
“그리고 헌팅뿐만이 아니라 생존자 구출 목적도 있습니다.”
이미 몬스터에게 땅을 빼앗긴 경우 그렇단다.
요점은 헌팅과 생존자 구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겠지. 단지 그게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방이 된다 하더라도.
차도식이 힘겹게 입을 뗐다.
“그래서… 지원 요청을 거부할 생각이었습니다.”
“왜요?”
“비행 몬스터 때문입니다.”
직행이든, 경유든 넘어가는 길이 막혔다는 말이다.
“바다는요?”
“워프 브레이크로 뒤집힌 상태입니다.”
“바닷속에도 워프가 있었어요?”
“육지보다 바다에 더 많습니다. 처리하기에는 인원도 부족하고 깊은 곳에 있어 확인도 쉽지 않고요. 특이하게도 우리나라 바다만 깨끗합니다.”
사가의 배려였을까?
딱히 배려라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도현은 집에 돌아온 뒤 최근 중국을 제외하고 해외로 나가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많은 워프가 다 터져 버린다면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인류 대부분은 사라질 거다.
그리고 3년쯤 되면 지구를 지배하는 건 몬스터가 아닐까.
“그래서 그런 거군요.”
도현은 차도식의 부탁을 이해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지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지이이잉-
조용해진 회의실에 진동이 울렸다.
차도식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귀에 댄 스피커에서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휴대폰을 든 오른손 손등에 봉(峰)이란 한자가 진하게 떠올랐다.
중국에서 비휴단과의 통역을 맡았던 주펑의 능력이었다.
7급 각성자였지만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던 그는 호기심 겸 통역으로 도철 워프에 들어갔다가 헌터들과 함께 업그레이드됐다.
그 능력 중 하나가 저 인장이다.
인장이 찍힌 사람들은 주펑 없이도 어떤 언어든 모국어로 들을 수 있었다.
몬스터도, 문서도. 심지어 모니터나 액정에 손을 갖다 대도 이해가 됐으니, 모두가 경악하는 건 당연했다.
그 덕에 도철을 이용해 베이징에서 수월하게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통화는 짧았다. 하지만 휴대폰을 내려놓는 차도식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말했다.
“러시아 전체가 몬스터로 뒤덮였답니다. 그리고… 북한도 끝났답니다…….”
중국은 워프가 사라진 뒤 뒷수습과 앞으로의 삶을 걱정해야 했다.
주석인 시단핑은 행방불명 상태였는데, 중난하이 중해의 자광각에서 발견된 옷가지를 확인하고 잠정적 죽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중국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중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자체가 와해될 위기를 맞았으나, 그 중심을 틀어쥔 건 소림의 우슈보 스님이었다.
1급 헌터. 그 힘은 생각보다 무척 대단했다.
그 아래 비휴단이 바쁘게 움직이며 중국을 하나로 모으고 있었는데, 주변국에서 일어난 워프 브레이크가 문제가 된 거다.
차도식이 말을 이었다.
“몽골에서 지원 요청이 왔었답니다. 안전과 생계 때문에 헌터들이 대거 몰려갔고, 치고 올라가다가 러시아 경계를 넘어오는 엄청난 몬스터 수를 확인했답니다.”
“그럼 북한도 못 막은 거냐?”
여태 잠자코 있던 강혁이 물었다.
차도식은 강혁을 어색하게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예. 중국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따라 몬스터들이 함께 넘어간 거라고 합니다.”
상황은 심각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북한에 문제가 생겼으니, 국제 헌터 협회의 지원 요청은 정말 거부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도현은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지원 요청은 수락하세요.”
“예? 처남님… 지금 북한에서…….”
“혼자 갈 겁니다. 대신 여기 있는 세 분과 대한민국 모든 헌터들은 북한의 워프 브레이크 파괴에 집중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하지현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거부할지도 몰라. 블랙홀 랜드가 있으니까. 헌터들 중에 1년 이상 장기 여행권을 끊은 이들도 많아.”
생각도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결국, 남는 사람들은 가진 게 없는 자들뿐.
하지만 도현은 픽 웃었다.
“그럼 갑질 좀 하지, 뭐.”
갑질?
“천재지변으로 인한 여행 취소 같은 거? 물론 환불은 해 주고.”
차 부부는 크게 당황했다.
도현은 갑질의 예를 더 들었다.
“워프 브레이크가 끝날 때까지 농장에 못 들어가게 해도 되고, 블랙홀 랜드의 물가를 엄청 비싸게 올려 버리는 방법도 있지.”
“아, 아니… 싸가지…….”
“처남님, 그건 좀…….”
“갑질이라니. 크큽!”
강혁만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도현은 거만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거부는 없다는 말이지.”
“처남님, 그렇게 워프 브레이크를 넘긴다고 해도 나중에 반발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블랙홀 랜드에서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고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지구의 모든 워프는 사라질 테니까.”
“예? 워프가 사라진다고요?”
“네, 블랙홀 랜드 사업의 이유죠.”
차도식은 두근대는 가슴에 입술을 꾹 다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바랐던 워프가 없는 세상.
헌터가 필요 없어지더라도 꼭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꿈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헌터들의 길도 공존할 수 있다니.
블랙홀 랜드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였다!
들뜬 마음을 주체 못하는 차도식을 보던 도현은 짧게 탄성을 질렀다.
“매부, 농장에서 핵폭발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예. 시리아에서 일어났었습니다. 의심 국가였는데, 워프 브레이크로 확실해졌죠.”
“피해는요?”
차도식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방사능이나 2차적 오염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몬스터들이 핵폭발로 돌연변이가 되었죠.”
그러면서 스크린을 띄운 컴퓨터를 조작했다.
스크린의 작은 창들이 사라지고 영상 하나가 떴다.
버섯구름이 솟자마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꺼졌다.
화면이 더 확대되더니 시리아의 워프들을 비췄다.
무지개 색채를 띠는 워프들은 선명하고 진한 색 대신 쨍한 형광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중 워프 브레이크를 일으킨 워프에서는 여러 몬스터가 합쳐진 것 같은 외형으로 나와 주변 몬스터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강함을 느끼기보단 비위가 먼저 상했다.
영상을 재빨리 끈 차도식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통칭 ‘키메라’로 불립니다. 3등급 워프이지만, 몬스터의 등급은 2등급. 최대 1등급까지 예상 중입니다.”
도현은 시선을 돌려 강혁에게 물었다.
“삼촌, 상대할 수 있겠어요?”
“쉴 곳과 배만 채울 수 있으면야 가능하지. 그런데 왜 묻냐?”
“북한은 삼촌한테 맡길게요.”
세 사람은 눈을 끔뻑이다 소리를 질렀다.
“부, 북한! 핵!”
“해, 핵 터졌대? 터진 거 아니지?”
“아이고야, 조카야, 나 좀 살려 주라! 못한다, 못해!”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참, 매부는 저랑 갈 데가 있으니까, 알아서 막아 주세요.”
“저, 저요?”
멍청하게 되묻는 차도식 뒤로 강혁이 버럭 화를 냈다.
“야! 머리를 빼 가면 어떡하냐!”
“프로페셔널 팀 있잖아요. 잘 컸으니 쓸 만할 거예요. 그리고 다른 헌터들도 성장했을 거고요.”
“그래도 무려 핵이야! 핵이라고!”
강혁이 계속 질척이자 도현은 미간을 좁혔다.
이런 일로 오제아에게 부탁하기도 좀 그렇다. 이미 농장 업무로 갈려 나가고 있으니까.
문득 오제아 옆의 테이스가 떠오른 도현은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빌런들 좀 떠보든지요. 살 곳 준다고 하면 좋아하겠죠.”
“어……? 그거 괜찮은……. 아니, 아니, 그래도 머리는 안 된다!”
“아무튼, 알아서 하세요. 전 협회장님.”
도현은 재빨리 차도식의 어깨를 잡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