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 신 제브라드를 찾아서 (3)
사가가 자신의 레어에서 이오르를 만나 이동한 장소는 이오르의 식당 건물 4층이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그저 지붕이 있는 다락방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이오르의 레어인 이곳.
다른 생명체와 부대껴 사는 이오르답다고 할까.
확장시킨 공간만 해도 5층이 넘어가는데, 꾸민 건 지구에서나 볼 법한 인테리어였다.
사가가 로드였던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레어의 모습과 너무 달라 지구에 있는 착각마저 일 정도.
필시 방문자 중에 누군가 도운 거겠…….
“엣취-!”
사가는 코를 훔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주 앉은 이오르가 벌레 씹은 듯한 얼굴을 더 찡그리며 빈정댔다.
“요즘은 신도 감기에 걸려?”
“실없는 소리. 도현이 나를 찾고 있는 게지.”
“그놈이 왜?”
“그럴 일이 있다.”
심란한 사가와 달리 이오르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놈의 일, 일, 일! 말 안 해 줄 거면 왜 왔는데? 로드라면서 책임도, 의무도 제대로 끝내지 않고! 그렇게 해서라도 우도현 그 새끼를 돌봐 줘야 했어? 차원까지 넘어서?”
이오르의 몸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힘이 둘 사이에 있던 테이블을 가루로 만들었다. 허공에 흩날리는 그 가루 사이로 쩍쩍 갈라진 레어의 벽과 바닥이 보였다.
“너도 가 봤으니 알지 않느냐? 지구가 어떤지.”
당황한 사가는 긴 소파에 눕혀 둔 모르달에게 보호막을 두르며 씩씩대는 이오르를 타일렀다.
오히려 그 말에 이오르는 화가 뻗쳤다.
“그 새끼 차원이 어떻든, 그 새끼가 죽든! 당신 아들은 나라고! 나 이노라드 오르제아트!”
쩌저적! 퍼엉!
이오르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힘에 버티지 못한 레어의 공간이 깨지기 시작했다. 깨진 틈새가 진공청소기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부서진 집기가 엉망진창으로 허공에 날아다니며 더 난장판을 만들었다.
사가가 제브라드를 떠난 지 160년.
드래곤에게 있어서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아들 녀석은 왜 더 어려진 느낌일까.
사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이노야, 정말 미안하구나.”
부모인 사가 자신만 부르던 애칭이 그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오르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사가가 더없이 자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들인 너에게까지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서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말이다. 내가 말한다 한들 너에게는 들리지 않는단다. 난 신이고 넌 이 세상의 생명체이니까.”
“…그게 왜?”
“격이라는 거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말을 계속 입에 담으면 이 세상도 상처를 입지.”
이오르는 이를 뿌득 갈더니 사정없이 뿜어내던 힘을 멈췄다. 기다렸다는 듯이 공간이 복구되며 순식간에 부서지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오르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도 알아.”
“뭘 말이냐?”
“제브라드의 신도 사라졌고, 이 세계도 붕괴하고 있는 거.”
사가의 눈이 커졌다. 반대로 이오르는 사가가 놀라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 되도 않게 빈정거렸다.
“신교가 사라졌는데 의심 못하면 병신이지.”
제브라드 차원 붕괴.
이오르가 깨달은 건 최근이었다.
방문자로 지구의 한국에 다녀온 그는 제브라드의 시간이 채 2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걸 페드릭에게 듣고 이상함을 눈치챘다.
곧바로 먼저 방문자로 다녀온 이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시간 차이가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고심 끝에 이오르는 친분 있는 드래곤 말마타와 라라루타와 함께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신이 없는 세계는 붕괴된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에놀드에게 알렸고, 오늘 아침에서야 잠깐 들른다는 소식이 왔다.
‘겸사겸사 모두 모여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었지.’
전혀 생각 못한 사가의 방문에 잊고 있었던 저녁을 상기하던 이오르는 사가의 핀잔에 상념에서 깼다.
“그 말투는 참……. 신교가 사라졌다 해서 세계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이오르는 미간을 좁히며 투덜댔다.
“내가 아직도 헤츨링으로 보여? 드래곤들이랑 낸 결론이라고. 뭐, 방문자 때문에 더 확신하긴 했지만.”
사가는 의외의 대답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동족을 잊지는 않았구나.”
“아니거든? 이 세계가 걸린 일이라 물어본 거거든?”
버럭 하는 이오르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칭찬엔 늘 약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 사가는 허허, 하고 다시 웃었다.
만 년이란 시간을 살아가는 드래곤들은 독선적이고 오만했다. 마주치기만 하면 자연재해를 일으켰고, 결국 교류가 사라진 드래곤들은 개인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드래곤들이 유일하게 고분고분 따르는 존재가 로드였다.
지금은 그 자리가 비워져 시끄러울 만한데, 세상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 이유는 이오르 때문이었다.
호기심 많은 드래곤.
세상에 위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끝내 쟁취하는 모습은 드래곤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드래곤 특유의 독선과 오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은 별종 드래곤이었다.
그의 등쌀에 학을 떼던 드래곤들은 어느새 그가 뜸해지자 찾아다녔고, 자연스럽게 식당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로드가 정해지진 않았지만 이미 은연중에 모두가 이오르를 로드로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이만해도 대견한데, 이 세상을 위해 고민까지 함께 나눈다니.
‘내가 아닌 이 녀석이 신이 돼야 했어.’
그랬다면 신 제브라드가, 이 세계가 힘들지 않았을 텐데.
도현도, 지구도 말이다.
그저 이 세계의 번창을 위했던 신의 욕심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악의 상황인 차원 붕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이 교체될 때마다 존재하는 유예 기간.
다음 대의 신이 자리 잡을 때까지 세상이 기다려 주는 것인데, 그동안 다음 대의 신에게 동조하며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
그러니 시간 축의 문제는 다음 대의 신인 도현의 세상과 가까워지는 현상 중 하나였던 것.
모르달을 따라 신의 처소에서 만났던 신의 기억이 남겨 준 지식이었다.
전대의 신이 사라지고 대리자만이 남은 유례없는 상황에서도 통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말이다.
사가는 직접 확인하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에 신 제브라드가 맡긴 마지막 부탁도 들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오랜만에 속 시원히 숨을 뱉던 사가는 자신의 볼을 감싸는 이오르의 양손에 의아해하다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크게 놀랐다.
“왜, 왜 그러냐?”
“아버지, 무슨 생각에 빠졌기에 대답이 없어?”
“으응? 뭐라고 했는데?”
“밥 먹을 거냐고.”
“웬 밥이냐……?”
“이야기도 할 겸 모두 모여서 저녁 먹기로 했어.”
사가는 그제야 자식이 해 준 요리를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음을 깨달았다.
살짝 기대감을 갖고 물었다.
“그… 생선 요리 있냐?”
“음, 도현이 보내 준 재료 중에 있을걸?”
“재료?”
“몬스터 식재료라던가? 엄청 큰 물고기도 있던데.”
사가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 사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거 혹시 키리…….”
와장창!
“푸른 도마뱀! 이 몸이 오셨……!”
창문을 깨고 들어온 에놀드는 힘차게 인사를 하다 두 남녀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분위기 깨서 미안하다. 좀 이따 올게.”
“이 미친놈아! 가긴 어딜 가? 그런 거 아니거든?”
얼굴이 벌게진 이오르가 퍼덕거렸다. 오히려 얼굴을 구긴 건 에놀드였다.
“뭐야, 그 초짜 같은 행동은? 너 혹시…….”
“혹시 뭐? 너, 너처럼 동정 마법사인 줄 아냐?”
“어이, 말이 좀 심하다? 그리고 난 마법사가 아니라 주먹을 쓴다고?”
“그렇다고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잖아!”
에놀드를 위아래로 훑던 사가가 물었다.
“저놈은 뭐냐? 특이한 녀석인데?”
“인생 2회 차인 배덕자, 동정 에놀드.”
이오르가 에놀드를 도발하며 소개했다. 자신처럼 화를 내길 바랐지만, 에놀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오히려 사가가 이오르를 나무랐다.
“녀석아, 사귄 친구면 정상적으로 소개해 줘도 되지 않느냐. 그 말투는 참…….”
“또, 또! 아버지는 여기 이 아들은 안 보여?”
“아버지?”
에놀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오르의 아버지라면 드래곤.
그것도 로드라고 했었다. 그리고 16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사가가 손가락을 튕겼다.
에놀드가 들어왔던 3층 높이의 유리창이 복구되었다.
매끄러운 마법에 작게 탄성하는 에놀드에게 사가가 말했다.
“사가라 불러라. 이 녀석 말대로 한때는 드래곤을 이끄는 로드였다.”
“안녕하십니까, 사가 님. 에놀드 아드노타라고 합니다. 뭔가… 제가 모셨던 분과 비슷하시군요.”
모셨던 분. 그 말에 사가는 처음에 느낀 특이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이 내린 축복의 흔적.
에놀드의 씁쓸한 웃음에 사가의 시선이 측은함으로 바뀌었을 때, 에놀드는 소파에 앉아 멍하게 눈을 끔뻑이는 모르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모르달?”
***
에놀드는 펑펑 울어 대는 모르달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브라드가… 모든 걸 거두어 갔다고요……?”
“누군지 모르겠슴다요……. 그런데… 그런데 떠올리기만 하면 너무 슬픔다요…….”
사가는 기억을 잃은 모르달과 그런 모르달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에놀드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신의 처소에서 생긴 일을 밝혀야 했다.
예상과 달랐던 건 모르달이 아닌 에놀드가 화를 내는 것이랄까.
‘제브라드 님의 부탁을 빨리 처리하고 지구에 돌아가야겠구나…….’
그렇게 마음을 정한 사가가 모르달을 챙겨 움직이려고 했을 때, 에놀드가 모르달을 확 잡아챘다.
“모르달, 세계수는 기억해?”
“세계수 말임까요……?”
“그래, 태초의 나무!”
그렁그렁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모르달은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엔 세상을 떠받치듯 거대하고 웅장한 나무가 보였다.
신난 자신이 손에 든 바구니를 흔들며 떠들어 댔다.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위를 쳐다보는데, 거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춘 자신은 몸을 옆으로 돌려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잠깐 사이에 두꺼운 나뭇가지 하나가 스르륵 땅에 내려왔다.
다시 자신은 뭐라 떠들며 시선을 나뭇가지 위로 옮겨 확인한 뒤 자신도 나뭇가지 위에 냉큼 올라갔다.
눈을 깜빡이던 모르달은 다시 울먹였다.
“기억이 있슴다요……. 같이 갔는데, 혼자임다요……. 너무 행복했는데, 같이 갔는데, 혼자임다요…….”
입술을 꽉 씹은 에놀드는 그대로 모르달을 옆구리에 꼈다.
이오르가 당황하며 물었다.
“야, 뭐 하냐?”
“다시 간다.”
“뭐? 너 온다고 다 불러서 저녁 먹기로 했단 말이야!”
“너희들끼리 먹어!”
그 한마디만 남기고 에놀드는 텔레포트 마법을 펼쳤다.
이오르는 어이없는 얼굴로 사가에게 따졌다.
“아버지, 왜 안 막았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아니, 그래도 저, 심부름꾼 갔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세계수가 그냥 나무야?”
사가가 눈을 찡그렸다.
“너도 갔었구나.”
“어… 뭐…….”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는 이오르에게 사가가 통보했다.
“준비해라. 넌 나와 어디 좀 가야 할 데가 있다.”
“어디?”
“룩소르.”
제브라드 대륙에서 동쪽 끝에 자리한 섬이었다.
항구도시 퓌아타에서 뱃길로 가도 두 달은 걸리는 곳.
이오르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거긴 왜?”
“제브라드 님의 마지막 부탁이다.”
“아 씨… 거긴 마법도 잘 안 먹히는 곳인데. 뱃길로 가기엔 너무 오래 걸리잖아?”
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네가 날아야지.”
“어……?”
“본체로 날아야지.”
“뭐, 뭐?”
“아들아, 3일 안에 끝내야 한다.”
“으아아악! 차라리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