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41화 (140/200)

# 141

141. 워프 브레이크 (1)

도현이 농장에 간 그 시각,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는 워프 브레이크로 재앙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2주기 워프 브레이크에 영국의 국제 헌터 협회의 불은 몇 주째 꺼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울려 대는 지원 요청 콜에 수신 라인을 이메일과 메시지로 제한해 버린 국제 헌터 협회는 자국의 워프 브레이크 사태로 고열과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각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을 계급으로 나눈 명칭, 헌터를 만들어 낸 국제 헌터 협회.

2대 총협회장을 맡은 헤레이스 얼터는 잔뜩 피로가 내려앉은 얼굴로 눈앞의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300인치의 초대형 스크린.

그곳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중동, 아프리카, 오세아니아가 떠 있었다.

지도에 맞닿은 얇고 긴 선이 스크린 안에 뜬 작은 화면과 이어져 있었다.

대충 훑기만 해도 수십 개가 될 화면들에는 제각각 다른 영상이 돌고 있었는데,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워프 브레이크가 터진 후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 중이었다.

그중 오세아니아에 연결된 작은 화면 3개가 삑 소리를 내며 꺼지면서 오세아니아 지도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맨 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은 헤레이스 얼터는 발아래 세 줄로 도열한 자리에 앉은 직원들을 주시했다.

큼지막한 모니터 위로 빠르게 글이 올라갔다.

한 직원이 머리에 쓴 헤드셋을 거칠게 벗으며 말했다.

“뉴질랜드의 웰링턴, 워프 브레이크 진압 포기. 방어 체제로 변경 및 시민 대피에 집중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 올버니, 제럴턴, 다윈, 엘리스 스프링스 다섯 곳 모두 동일합니다!”

“중동 북서 지역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네 곳 방금 워프 브레이크 진압 포기했습니다!”

“아프리카 남아공 3등급 워프 브레이크 상황 종료! 워프 브레이크, 막아 냈습니다!”

“오오-!”

오랜만의 성공 소식에 심각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그것도 잠시, 방금 보고한 직원의 얼굴은 침울해졌다.

“사상자 500만 명… 지역 대부분이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국제 헌터 협회 및 각국에 인력 요청, 하지만 3일 이후 워프 브레이크 예정…….”

헤레이스 얼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몇 등급입니까?”

“이, 이 등급입니다…….”

다시 침음이 이어졌다.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분위기는 더욱더 가라앉아 버렸다.

오세아니아는 워프 브레이크 30건으로 전멸. 중동 지역은 고작 3건이지만 3등급 워프 브레이크로 빠르게 포기해 버렸다.

아프리카에서 선전 소식이 들렸지만… 2등급 워프 브레이크는 가망이 없다.

‘차라리 핵폭탄을 터트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최후의 수단으로 보고 있지만, 통할지는 미지수다.

미간을 꾹꾹 누르던 헤레이스 얼터는 자신 옆에 초조하게 서 있는 아론에게 말했다.

“지원 요청을 넣은 아시아 쪽은 어떻습니까?”

“중국은 거절했고, 한국은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일본은…….”

헤레이스 얼터는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대체 왜요?”

“이, 일본은 오늘 아침 9시 35분경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3등급 워프 브레이크가 일어났습니다. 중국은 제로급 몬스터로 인한 회복으로…….”

“베이징만 피해가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 외 지역은 한국의 우도현 헌터로 인해 워프도 사라졌고요. 국제 헌터 협회장 권한으로 강력하게 요구하세요! 그리고 한국은 왜 답이 없는 겁니까?”

“한국은 어제부로 정부 대신 헌터 협회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에 요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헤레이스 얼터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눈치를 보던 아론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2주 전 블랙홀 랜드라는 새로운 차원에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집중된 상태입니다.”

“블랙홀 랜드… 차원?”

아론은 아래 직원에게 스크린에 화면을 띄울 것을 지시했다.

중세 시대와 현대가 묘하게 어우러진 세상이 펼쳐졌다. 먹거리, 축제에 이어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경에서 숲으로 바뀌더니 토끼나 사슴, 멧돼지 등의 동물들이 나온다.

한국인 한 명이 토끼를 검으로 내리치더니 놀란 눈으로 칼을 떨어트리고는 뭐라 중얼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한국어를 아는지, 직원 몇몇이 탄성을 내지르며 경악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표정은 얼떨떨함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론이 작게 말했다.

“각성했다고 외치는 겁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블랙홀 랜드에는 마나 농도가 짙다고 합니다.”

“마나 농도가 짙다?”

“최소 10배, 일반인을 각성시킬 정도라면 최소 30배는 되지 않을까 하는 게 워프 연구팀의 예측입니다.”

“말이……?”

갑자기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황폐한 땅이 나타났다. 쿵쿵, 지면이 울리며 흉측한 20미터의 대형 몬스터가 집채만 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저, 저건 투 헤드 오우거……? 하지만 오우거라 하기엔 피부색이 검은데…….”

『거인의 일격!』

눈에 익은 사내가 외치며 밝게 빛을 발하는 주먹이 몬스터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 한 방에 몬스터의 몸 절반이 수박 터지듯 사라져 버리며 몬스터가 쓰러졌다.

아론이 설명했다.

“4등급 보스 몬스터 투 헤드 오우거로 추측 중입니다만, 피부색과 크기에서 최소 한 단계 이상 높은 몬스터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저 헌터는 한국 우도현 헌터 팀의 김민혁 헌터로 3급 블루입니다.”

“3급 헌터 혼자 3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잡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렇지 않아도 영상 때문에 급수 조정을…….”

삐잉! 삐잉!

기분 나쁜 고음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스크린이 붉게 깜빡였다.

직원 하나가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시, 시리아에서 핵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스크린에는 위성으로 찍은 검은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는 시리아의 모습이 비쳤다.

***

미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실.

와이어트 콜튼은 입에 문 담배 파이프를 떼며 연기를 내뱉었다.

그런 자연스러운 행동과 달리 진지한 시선은 맞은편 벽면에 설치된 100인치 TV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한국에서 기적의 동영상이라 불리는 워프 마켓 블랙홀사의 광고였다.

“블랙홀 랜드라…….”

명칭만 들어서는 그저 테마파크 사업 같았지만, 그 속내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현대 문물과 중세 시대의 문물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거기에 포탈을 넘으면 워프 속 세상이 펼쳐지는 것까지.

강력하고 다양한 몬스터들이 사는 세계였다. 그것도 필드로.

2세대 워프가 나타나고 헌팅에 엄두도 못 내던 한국 헌터들이 반신반의로 블랙홀 랜드에 들어갔고, 허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 워프보다 두 단계나 강한 몬스터는 헌팅이 힘든 만큼 비싸게 거래되었다. 게다가 드문드문 떨어지는 마나석까지.

주거지와 몬스터 필드가 나누어져 안전성까지 갖춘 블랙홀 랜드는 헌터라면 당연히 빠져들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벌써 정착을 시작한 헌터도 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소식인데, 경악할 내용은 따로 있었다.

각성자와 헌터들의 성장, 그리고 일반인이 각성자가 될 가능성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말 그대로 유토피아였다.

그래서 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상현실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하지만 실제 짧게 다녀온 사람들의 영상과 경험담이 올라오며 세상은 중국에서 일어난 이변에 이어 또다시 경악했다.

그렇지 않아도 워프 브레이크로 인한 불안 때문에 탈출구를 찾던 사람들이 한국이나, 워프가 사라진 중국으로 뜰 준비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각국은 쏟아지는 비자 신청과 워프 브레이크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타들어 가는 속을 헤아려 줄 사람은 없었다.

똑똑.

계속 반복 재생되는 TV 소리만 울리던 협회장실 출입문이 노크와 함께 열렸다.

“와이어트 콜튼 님.”

검은 슈트를 입은 노신사.

색 바랜 금빛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올란드 그레이스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살짝 굳어 있었다.

와이어트 콜튼은 입에 문 담배 파이프를 손에 쥐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시리아에서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평소처럼 나른한 웃음을 띠던 와이어트 콜튼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가 비틀리며 바람 빠진 웃음을 자아냈다.

“의심 국가가 실제 핵을 개발했을 줄이야……. 이유는 워프 브레이크겠군. 피해는?”

“50킬로톤으로 주변 국가에 영향이 있겠지만, 이미 몬스터의 땅이 되어 터키를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습니다.”

와이어트 콜튼은 손에 쥔 담배 파이프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이참에 핵이 몬스터에게 먹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우리 쪽 상황은 어떤가?”

“리암 루카스 님의 수고로 매우 순조롭습니다. 그곳을 제외한다면 3개월 정도의 여유는 확보 가능합니다.”

올란드 그레이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주 웃던 와이어트 콜튼은 2주 전 복귀한 아바를 떠올렸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휴레가크 님의 말씀과 달리 건강하게 돌아온 그녀는 협회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다.

4급 레드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무력에 정말 목이 잘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리암 루카스였다.

좁은 공간에서 두 헌터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와이어트 콜튼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리암 루카스와 아바의 싸움은 막상막하로 이어졌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그가 마안을 사용함으로써 상황은 생각보다 빨리 정리되었다.

그리고 리암 루카스는 최종 목표로 했던 1급 골드 글라스에 올랐다.

그때 그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짜릿한 쾌감이 등을 훑자, 와이어트 콜튼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좀 위험했지만… 그래도 리암이 완성되었으니 나쁘지 않았어. 시민 대피는 끝났을 테고,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

“그곳 근처에 대기 중입니다.”

자유의 여신상 옆에 나타난 노란색의 달 조각.

처음부터 높은 등급으로 엄두도 못 냈던 워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주기를 맞이했을 때, 미국의 자랑이자 유일한 1급 헌터 노아 이선이 헌팅을 선포했던 워프이기도 했다.

불안과 기대를 한껏 받았던 그가 행방불명되었던 워프이기도 했다.

이후로 밝혀진 건, 이 워프가 1등급이 아닌 1+등급이라는 것.

1등급 워프는 그저 붉은색만 띠지만 1+등급은 테두리가 금색으로 환한 빛을 낸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사실을 조용히 묻었다.

알려져 봤자 잃을 게 더 많은 정보였으니까.

그런데 이 워프가 워프 브레이크 대상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 헌터 협회는 뉴욕과 주변 도시를 버릴 생각까지 했다.

아바,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와이어트 콜튼은 창밖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일 일어날 1+등급 워프 브레이크를 홀로 막아 내며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워프 브레이크란 축포로 이 뉴욕엔 마나가 가득 차오르고, 신께서도 더 강한 세례를 내려 주실 거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던 그는 조용히 서 있는 올란드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조국의 영웅이네. 정중히 모시도록.”

“예, 마스터.”

희열로 가득 찬 와이어트 콜튼의 눈동자를 보며 올란드 그레이스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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