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40화 (139/200)

# 140

140. 환수족 (2)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과 달리 강혁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솔직히 그때 결혼한 걸 후회했어.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했지만, 20년이나 지나니까 지치더라. 윤희 찾는다고 좀 불효자 짓도 했고.”

등 떠밀려 나간 선 자리.

조부모에게 막대한 유산을 받은 여인이 왜 자신을 집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은 죄가 있어 참석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직업을 듣고 나면 싹 굳어 나가 버릴 게 빤했으니까.

하지만 그곳엔 언젠가 자신이 구해 주었던 피해자 중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7년 전쯤 범죄자 때문에 석녀가 되었던 여인.

남자라면 치를 떨고 집 밖으로도 나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강혁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는 걸.

형식상 인사만 주고받자마자 그녀가 결혼하자고 말했다.

강혁은 자신의 치부까지 다 들춰 가며 거절했지만, 그녀는 완고했다.

모든 걸 끌어안겠다는 그 한마디에 강혁은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에 15살이나 적은 그녀를 신부로 맞이했다. 모두가 인생 폈다고 축복해 줬지. 어색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음은 윤희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타들어 갔지. 그리고 1년 만에 도식이를 만난 거다.”

상처가 있다는 걸 잊을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한 아내. 그런 그녀에게 몹쓸 짓을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을 양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윤희는 지키지 못했지만, 도식이만큼은 지키고 싶었으니까.

아내는 말없이 허락해 주었다.

강혁은 윤희에게 프러포즈한 이후로 오랜만에 정말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행복한 날만 펼쳐질 거라 믿었다. 강혁은 일도 제쳐 두고 도식이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단란한 가족을 꿈꾸며 말했던 그는 그때야 현실을 깨달았다.

‘아저씨가 뭔데요?’

‘하, 첫사랑? 심장? 그러면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말았어야지? XX, 어디서 꼴값이야?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윤희와 꼭 닮은 눈엔 차가운 경멸을 담고서, 상처투성이의 목소리는 비수가 되어 강혁의 가슴을 찔렀다.

…늦어도 너무 늦어 버렸다.

“이해했다. 힘들게 살았으니까. 죽지 못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었다. 이젠 눈앞에 있으니까……. 그렇게 한 해, 또 한 해… 다시 한 해가 흘렀을 때 세상이 변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에 떠 있어야 할 달이 사라지고 워프가 나타났다. 그 변화로 각성자가 생겨났고, 각성자들은 워프를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강혁과 그의 아내는 막대한 유산 덕에 그 난리 속에서 빨리 안정을 취할 수 있었지만, 강혁은 오로지 도식이의 생사가 중요했다. 세상이 변하며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채 반년도 흐르지 않아 각성자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의 이름에 도식이 있다는 걸 확인한 강혁은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 될 것을 결심했다.

차도식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안정되어 가던 중에 네가 나타난 거야.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강한 네가 그 아이의 그늘이 되면 이제 걱정할 건 없을 거라 믿었다.”

어차피 삼촌의 바람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다.

삼촌 말대로 매부는 헌터 협회장 자리에 앉았고, 염원하던 헌터 1급이 되었다. 사람이란 선상에서는 누구도 위협할 건 없다는 것.

뭐, 소림의 우슈보 스님이 나쁜 마음을 먹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고.

‘그건 그렇고.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많은 부류의 사람을 봐 왔지만, 이런 유의 사람은 처음이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의 자식이라지만, 그런 이유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자신도 휘말리긴 했지만, 정작 피해를 봤다고 하기엔 모호했다.

딱히 피해 본 것도 아니고.

어쨌든 묵은 감정을 풀 당사자는 자신이 아니니까.

사랑이라…….

아직 도현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하나는 안다.

혈육이라면 모든 이유가 필요 없어진다. 그게 지독하게 뒤틀린 애정이라면 더더욱.

“삼촌 아들인 거죠?”

“당연하지.”

음,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런 도현의 마음을 안다는 듯 강혁이 덧붙였다.

“윤희의 아들이라면 내 아들인 거야.”

강혁은 차윤희에게 프러포즈한 날을 떠올렸다.

하나밖에 몰라서, 윤희가 일하고 있는 와중에도 달려가 프러포즈했던 자신.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저녁에 더 멋지게 해도 되었을 텐데.

1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었기에 그랬던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함께한 밤도. 강혁에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근데.”

감상에 젖어 있던 강혁의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왜 모습이 그대로예요?”

“나도 몰라.”

“사가가 정신 차리면 돌아온다 했었는데?”

도현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사가를 소환했다.

갑자기 허공에 생겨난 은빛 털 뭉치가 풀썩하고 숲에 떨어졌다.

“이놈아! 이렇게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도현은 사가의 말을 무시하고 눈동자를 굴려 삼촌을 봤다가 다시 사가를 향했다.

“왜 이런 건데?”

“그래서 가 보라 하지 않았느냐?”

“장난해?”

요즘 들어 왜 자꾸 뒤처리반이 된 것 같지?

움찔한 사가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두 기운이 합쳐져 그런 것 같다.”

“두 기운? 키웠던 개?”

“그래.”

“무슨 말이야, 그게?”

대답은 강혁에게서 나왔다.

“음, 정신 분열이라고 할까……?”

정신 분열?

그러고 보니 협회에서 성격이 좀 홱홱 변하는 것 같긴 했지.

특히 강한 헌터나, 대련이라면.

“어… 설마?”

사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링크 상태였던 게지.”

“해결책.”

도현은 사가를 빤히 바라봤다. 사가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곤 숲 밖으로 내뺐다.

명백한 도망이었다.

“사가.”

“괜찮아. 이대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다시 소환 온오프로 괴롭혀 버릴까 했던 도현은 강혁이 만류하자 떨떠름해졌다.

“그 모습으로 어디 나가지도 못할 건데요?”

“굳이 나갈 필요 있겠어? 여기서 지내는 것도 생각보다 좋더라. 가끔 도식이가 와서 보고 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젊어졌잖냐.”

그러면서 아저씨처럼 웃는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이젠 외면이에요?”

“…….”

“삼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무책임하네요.”

강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렸을 때, 형사였던 삼촌이 정말 멋졌어요. 활활 타오르던 그 모습이 태양 같았거든요.”

“…….”

“그런데 지금 보니, 태양이 아니라 촛불이었네요.”

무심한 시선에 접힌 귀가 파르르 떨렸다.

“들은 말인데, 타인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더라고요. 개소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삼촌을 보니 알 것도 같네요.”

제브라드에서 했던 용병 생활.

별의별 정신병자들의 집합소인 그곳에서 지겹도록 듣고 본 것 중 빠질 수 없는 게 사랑 이야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건 용병에 환상을 가진 순수한 여자를 꾀어 망치는 놈들이었다.

평민들 사이에서 혼전 순결을 지키는 풍습이 있는 탓에, 그걸 깨는 내기는 정말 최악 그 자체였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이미 많은 용병들을 상대했던 여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

그렇게 버림받은 여자 중 열에 아홉은 용병에게 매달렸다.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버림받은 충격 때문에…….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노리개가 되어 몇 명에서 몇십 명에게 범해진 뒤 죽임을 당하거나, 자결하거나.

아주 간혹 정신을 추스르고 살아가거나 몇 년 뒤 복수의 칼날을 갈고서 목숨을 거둬 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헛되게 죽는다.

물론, 한 번 심하게 빡쳐 뒤엎은 뒤로 자신이 용병단을 찾을 때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 중 하나가 됐지만.

어쨌든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사랑은 갈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누는 거지.”

“나누는 거…….”

강혁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라락-

숲의 나무들이 잔잔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한 마나가 삼촌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점점 강해지면서 숲이 공명하듯 가지를 잘게 떨어 댔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건가?

농장에서 가장 마나가 밀집된 곳이니까 그 어떤 곳보다 빠른 성장을 노려 볼 수 있는 곳이긴 한데.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눈앞에 나타났다.

멍멍!

웬 개 짖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삼촌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영혼 형태의 은빛 개가 보였다.

저번에 한 번 봤던 그 개였다.

흐릿하던 개의 형상이 점점 선명해지며 크기를 불려 갔다. 동시에 삼촌의 몸도 점점 빛을 발했다.

모여드는 마나가 거칠고 빠르게 삼촌의 몸에 빨려 들어갔다.

이미 2미터를 넘긴 개의 영혼이 더 이상 개가 아닌 웨어울프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삼촌의 몸과 겹쳐지며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후아아악!

시야를 앗아 갈 정도의 강한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3미터로 자란 삼촌이었다.

“삼촌?”

산발처럼 뻗친 은빛 머리카락과 정수리의 쫑긋한 귀 한 쌍.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듯 콧등을 경계로 위는 늑대, 아래는 사람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상체는 사람, 하체는 짐승의 모습.

적절히 섞은 것 같달까.

“어……? 어떻게 된 거지?”

20대 후반처럼 보이는 젊어진 겉모습, 고무줄처럼 탄력적인 근육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유려한 조각처럼 꿈틀거렸다.

띠링!

[새로운 종족-환수족을 창조하셨습니다!]

[신의 대리자 1 특수 퀘스트를 달성합니다!]

[스킬:커넥팅-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커넥팅-콜]

방문자들을 지구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부여해 지구에 머물게 합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방문자는 본 세계로 귀환합니다.

한 번 불러들인 방문자는 7일(지구 시간 기준) 이후 부를 수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부를 수 있는 방문자 수:3

[신의 대리자 2]

신은 만물의 어버이다.

그 숭고한 뜻의 이해부터 시작해 보자.

생명의 가치:1회(0/1)

생명의 속삭임:1회(0/1)

보상:신의 축복

잊어버리고 있었던 퀘스트가 완료됐다.

이거 완전 이오르 지구 여행 티켓인데……?

어제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 도현의 떨떠름했던 얼굴이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거기에 다시 연계 퀘스트까지.

뭔 퀘스트가 이렇게 아스트랄하냐……?

언제 생각하고 살았나.

하, 그냥 잊자, 잊어.

“도현아, 뭐 하냐?”

자신의 몸을 살피던 강혁은 도현의 심기 불편이 자신의 탓인가 싶었다.

“아니에요. 그런데 삼촌, 많이 달라졌는데 괜찮겠어요?”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족이 되어 버린 걸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거?”

강혁의 몸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은빛 털이 짧아지면서 맨살이 드러났다.

완성된 모습은 어렸을 적 봤던 젊은 삼촌보다 더 앳된 삼촌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짧은 은발 정도.

도현은 살짝 감탄했다.

“친구라 해도 믿겠네.”

“와하하하, 젊어지니까 좋네! 그런데 이것도 가능하다?”

다시 강혁의 모습이 변했다. 쑥쑥 작아지더니 털이 수북하게 자랐다.

“봐라. 멍! 좀 멋지냐? 멍!”

은빛 중형견이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며 사람처럼 말했다.

“뭐… 쓸 만하네요…….”

반응이 영 시원찮아서 그런지 강혁은 빠르게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추리닝 한 벌을 꺼내 던졌다.

사내의 전라에는 취미가 없었으니까.

“인제 뭐 할 건데요?”

도현은 책상다리를 한 채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옷까지 입은 강혁은 몸을 체크하듯 제자리 뛰기와 스트레칭을 하다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글쎄다?”

“그럼 같이 갈래요?”

“어디?”

“궁상떠는 놈 구제하러?”

강혁의 눈썹이 엇갈리게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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