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 7명의 신 (1)
도현은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이오르를 집어 던지고 패기 시작했다.
“이 미친 도마뱀 새끼! 하다 하다 이젠 셰프를 납치해? 그러곤 워프로 튀어?”
퍼억! 퍽퍽퍽, 콰악!
듣기만 해도 살 떨리는 소리. 주먹이 꽂힐 때마다 집이 들썩였지만, 작심하고 절대 방어를 걸어 둔 탓에 깨지거나 부서지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도현의 주먹질이 약한 건 아니었다. 묵직하게 뼈를 울리는 소리는 맞은 경험이 없는 이라도 살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맞는 당사자, 이오르는 처맞으면서도 할 말은 내뱉었다.
“요리… 퀙! 사가, 요… 쿠엑! 요리에 불, 어억! 타는 건! 아악! 당연하닥꺼어억!”
도현의 눈꼬리가 더 사나워졌다.
“요리사? 요리사아? 그럼 네 손으로 하지, 납치는 왜 하는데? 워프는 또 왜 들어간 건데? 거기로 튀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아?”
요리 학원에 가자는 이오르의 끝없는 칭얼거림 끝에 도현은 조금이라도 미친 짓을 하면 바로 나올 것을 약속하고 요리 학원에 갔었다. 그리고 가자마자 이 파란 도마뱀을 믿은 자신을 후회했다.
셰프가 얼굴을 비치자마자 냅다 잡고 튄 것이다.
그렇게 튄 곳이 근처 6등급 워프.
도현이 워프를 털 때조차 건들지 않았던 워프들 중 하나였다.
당연히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그곳에서 때 아닌 인질극이 이어졌다.
정말, 제대로 폭발한 도현은 시겔로까지 뽑아 들었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헌팅을 하러 왔던 헌터들은 고래 싸움의 새우가 되어 대피하기 바빴다.
그렇게 워프 하나가 또다시 사라졌다.
시겔로에 의해 배에 구멍이 뚫릴 뻔한 이오르는 잘못했다며 싹싹 빌었고, 남은 뒷수습은 역시나 도현의 몫이 되었다.
도현이 지석환 셰프에게 사과와 함께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한 번 도와주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시키자마자 이오르의 멱살을 잡고 집으로 텔레포트한 것이 좀 전의 상황.
주먹이 매섭게 꽂힐 때마다 괴롭게 비명을 질렀지만 이오르는 실실 웃고 있었다.
자신이 살 곳은 제브라드가 아닌 지구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웃음의 의미가 어떻든 웃는 것 자체에 더 빡친 도현이 이번엔 정말 이오르의 성격을 개조시켜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거실에서 사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냐- 옹.
뚝 멈춘 도현이 슬쩍 몸을 돌려 거실을 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토토와 모르달, 사가가 TV를 틀어 둔 채 이쪽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도현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주먹을 풀었다.
사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토토에게 썩 좋은 교육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끝나기를 기다렸던 토토가 도현의 어깨에 풀쩍 올라가 바닥에 곤죽이 된 이오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누구야?”
“…삼촌이야. 이오르 삼촌.”
“삼촌? 앗! 할머니한테 배웟써! 그럼 아빠 동생?”
고개를 갸웃갸웃하자 이오르가 피를 주룩 흘리며 벌떡 일어나 토토를 덥석 잡았다.
“우오오! 삼촌? 삼초오오온? 우도현이 아빠라고오오? 크하하핫, 넌 네 세계에 돌아와서도 육아냐? 카핫, 욱!”
생각 없이 한 번 더 입을 놀렸던 이오르는 도현의 발길질을 당하고서 토토를 와락 안아 볼을 비볐다.
“토토 시러! 그만해!”
“아구구, 거부하는 것도 왜 이리 귀엽냐? 토토, 다시 삼촌이라고 해 봐!”
“시러, 실타구웃!”
꼬리 끝에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순간 확 커지며 토토의 몸을 타고 이오르의 몸까지 옮겨 붙었다.
깜짝 놀란 이오르가 놓자 토토는 부리나케 도현의 어깨에 올라갔고, 홀라당 타 버려 눈을 끔뻑이는 이오르에게 혀를 내밀었다.
“삼촌 시러! 이모, 누나 조아!”
“캬캬캭, 통구이 드래곤이라니 너무 웃긴 거 아님까욧?”
방정맞게 웃어 대는 모르달의 목소리 속에 사가의 한숨이 희미하게 들렸다.
도현은 벽의 시간을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하아, 5시간밖에 안 흘렀… 5시간?”
크게 떠진 눈동자가 급하게 방문 위를 향했다.
시간이 나와야 할 그 자리에는 오류 메시지처럼 잔뜩 깨져 버린 숫자 조각만 띄엄띄엄 보였다.
“이게 무슨…….”
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모르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왜 그러심까요?”
도현은 모르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표기 시간이 깨져 버린 것도 그랬지만, 쌍둥이 엘프 이후로 첫 방문자라는 걸 이제야 알아챘기 때문이다.
‘…2주나 흘렀지.’
페널티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사가가 그랬지. 제브라드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뒤로 온 방문자는 쌍둥이 엘프와 이오르뿐.
공교롭다. 정말 더럽게 공교롭다.
눈을 뒤룩뒤룩 굴리던 이오르가 슬쩍 물었다.
“뭐냐? 왜 그래?”
또다시 무시한 도현은 성큼성큼 걸어 방문을 열었다.
기대와 다르게 익숙한 방 안이 보였다.
“하, 이 새끼랑 살아야 한다니.”
도현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어, 어? 같이 살아……?”
반대로 이오르의 입이 해죽 벌어졌다.
경악이 세 동물에게서 터졌다.
“토토, 삼촌 시러! 저리 가!”
“도련님, 무슨 말씀이심까욧?”
“캬아아악!”
사색이 된 모르달과 하악질을 하는 사가.
도현이라고 반갑겠나.
오늘 친 마트 사고만 수습하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액수를 듣지도 않고 카드만 던져 주고 나왔으니까.
대통령 건도…….
헌터들 때문에 좋게 정리됐다지만, 그건 이제부터 까 봐야 아는 거고.
셰프에 워프…….
하, 갑자기 100년은 늙어 버린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아치니 화보단 피로가 몇백 배나 더 컸다.
그때 모르달이 도현 앞으로 튀어 왔다.
“도련님! 도련님! 이건 어떠심까요?”
“……?”
“진상 손님 거절 말임다요!”
퍽퍽하게 굳었던 도현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거다!
처음 봤을 때는 뭐 이딴 게 나오나 싶었더니, 이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진상 손님 거절?”
이오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리는데, 도현이 빠르게 읊었다.
“진상 손님 거절!”
띠링!
[방문자의 진상력을 파악합니다.]
[진상력 100퍼센트]
[이루 말할 수 없는 진상력이군요!]
[진상 손님을 되돌려 보내시겠습니까?]
그렇지!
도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보낸다!”
외치자마자 방문이 자동으로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끼이익-
“어……?”
활짝 열린 문 안쪽엔 방문자로 왔었던, 현재 제브라드의 중심축인 모두가 한 테이블에 모여 맥주잔을 높게 치켜들고 있었다.
그 뒤 벽엔 ‘퍼런 도마뱀 없는 연휴 기념!’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달려 있었다.
하얗게 질린 페드릭이 중얼거렸다.
“이, 이제 이틀인데……?”
멍청하게 서 있던 이오르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것들이?”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한 도현은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으르렁대는 이오르를 발로 까, 문 너머로 보내 버렸다.
“잘 가라, 진상 도마뱀!”
[이노라드 오르제아트]
(블루 드래곤/드래곤 로드)
5,423/남
유일한 드래곤, 제브라드 최고 요리사, 미식회 모임장→드래곤 로드, 드래곤계 선구자, 최강 드래곤, 드래곤 네스트(요식업) 창시자, 미식회 블루 드래곤 수장
능력치 (상세 보기 +)
특이 사항
1. 고생 끝에 철이 들면서 드래곤 로드로 추대됩니다.
2. 강한 힘과 두뇌, 연륜의 삼박자로 개인주의 드래곤의 삶을 180도 바꿔 버립니다.
3. 드래곤 네스트라는 브랜드를 선보이며 요식업계 대부로 불립니다.
4. 음식에 미친 집단 블루 드래곤을 창설, 수장으로 앉았으며, 그들의 인맥은 세계를 넘어 차원을 주무를 수 있을 만큼 강력함을 자랑합니다.
“하아, 드디어 보냈네.”
도현은 소파에 앉으며 지친 얼굴로 이오르의 설명을 대충 치워 버리고 커넥트 창을 켰다.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12월-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가 노아를 블루 드래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에게 맡겨 버립니다.]
…….
-아도노스 제국력 459년 2월-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가 그라드 휘고아타와 만남을 가집니다.]
[하이엘프 아나헤타가 진엘프 마리나스와 세자나스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진엘프 마리나스를 중심으로 엘프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
-아도노스 제국력 459년 11월-
[에놀드 아드노타가 블루 드래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와 함께 세계수 지역에 들어섭니다!]
…….
-아도노스 제국력 460년 9월-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지구에서 저지른 만행을 자랑스럽게 떠벌립니다.]
[모두가 경악합니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마트에서 강탈한 요리를 자랑합니다.]
[모두가 경악합니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마트에서 강탈한 식재료를 자랑합니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마트에서 강탈한 술을…….]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마트에서 강탈한 옷을…….]
…….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회심작이라며 마트에서 강탈한 마나 냉장고를 자랑합니다!]
[모두가 경악합니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자리를 비웠던 노아에게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자신의 멱살을 잡고 날뛰는 노아를 쥐어 팹니다!]
[이노라드 오르제아트가 노아의 굴복을 받아들입니다! (댓글 달기/후원하기)]
[모두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합니다.]
한참을 읽고 또 읽은 도현은 얼굴이 굳었다.
“3년밖에 안 흘렀다고……?”
에놀드가 태초의 신전에 대한 정보를 모으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17일.
최소 4년 반은 흘러야 했을 시간이 고작 3년밖에 안 흘렀다.
‘아니, 459년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시간 차이는 맞아.’
쌍둥이 엘프가 다녀간 그때까지는 100배로 같았다.
이후 90배, 60배, 30배로 점점 느리게 흐르더니 이오르가 넘어간 시간에 들어서는 10배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게 문제였던 건가…….”
그래서 문 위에 나타나야 할 시간도 보이지 않았고, 근 3주가 됐음에도 방문자 스코어가 조용했던 것 같은데.
‘정말 제대로 떠맡기고 갔구나.’
사가의 영면이란 소리에도 의심을 지우지 않았던 도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 제브라드가 사라졌다는 걸.
사가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큰 문제라도 생긴 거냐?”
“시간 축이 지구와 맞물려 가고 있는 것 같아.”
“얼마나?”
“100배였던 게 10배로 줄었어.”
“…언제부터?”
“지구 시간으로 10일 전쯤.”
눈치만 보고 있던 모르달이 슬쩍 끼어들었다.
“문제가 있는 검까요?”
“시간 축이 뒤틀렸다는 것 자체가 이상이 있다는 신호이니까.”
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경이 변하는 것은 멈출 수 있지. 하지만 시간이 뒤틀린다면 그건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거다.”
모르달의 턱이 떨렸다.
“서, 설마…….”
“그래, 차원 붕괴가 시작된 거다.”
사가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적막해진 거실에 TV 소리만 울렸다. 며칠째 이슈로 보도되는 중국 소식이었다.
『이틀 전 제로급 몬스터 치우천왕과 국내 우도현 헌터가 전투를 치렀던 중난하이 중해입니다. 시민들과 중국 공안 헌터들이 손을 모아 복구 중이지만 제 모습을 찾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저 하늘에 그어진 검은 선 때문입니다. 제로급 치우천왕과 전투 중에 생긴 것으로,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는 우 헌터가 하늘을 갈랐다는…….』
도현은 아무 생각 없이 뉴스를 보다 카메라가 비춘 하늘에 그어진 검은 선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뭐야……? 왜 안 사라져?”
“그래 봤자 며칠 안에 사라질 게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니. 마침 말 나온 김에 묻고 싶구나. 시겔로 그놈은 대체 무엇이냐?”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건 먹으면 먹는 대로 힘을 갖는다는 것과 제브라드 님께서도 예를 갖춘다는 것뿐이야.”
“그게 다야.”
사가가 가늘게 뜬 눈으로 도현을 빤히 봤다.
“말이 되느냐? 영상만 봐도 평소 사용하던 시겔로의 모습이 아니었다. 필시 봉인을 푼 거겠지. 봉인이 풀린 시겔로가 하늘을 그었을 때 지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느냐?”
도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털어 버렸던 워프 전체가 소멸했다. 중국과 한국 전부.”
“왠지 깨끗하더라.”
“정말 말 안 할 게냐?”
도현은 어깨에 조용히 앉아 있던 토토를 안아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꺄르륵, 웃는 소리에 일자로 다물어졌던 입꼬리가 살짝 풀렸다.
“말 그대로 아귀야. 심지어 자신도 먹어 버리는 그런 미친 새끼.”
그 한마디에 사가와 모르달이 몸을 바르르 떨며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시겔로카타……!”
“시겔로카타 말임까욧?”
그리고 순진무구한 초록색 눈동자가 도현을 올려다봤다.
“시게로카타? 모야, 아빠?”
“아빠 요리할 때 쓰는 칼.”
“우음, 토토 그거 마음에 안 드러. 앗! 토토 불카누스 아찌한테 배웟써! 아빠 칼 만드러 주께!”
“그래, 그래.”
다시 토토를 쓰다듬던 도현은 사가에게 물어보려 했던 게 떠올랐다.
“사가, 신 놈들 말이야…….”
지이이잉-
울리는 진동에 말이 끊겼다.
모르달이 아공간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집에 돌아온 모르달을 위해 도현의 어머니, 임혜정이 맞춰 준 휴대폰이었다.
“여보심쑈. 예, 마님! 예? 도련님 말씀임까요? 여쭤보고 빨리 연락드리겠슴다요!”
전화를 끊은 모르달은 살짝 의아한 얼굴로 도현에게 물었다.
“도련님, 일본 헌터가 도련님을 뵈었으면 함다요.”
“일본? 왜?”
“리갈루스라고 하면 도련님께서 아신다 했슴다요.”
심드렁하던 도현의 눈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마찬가지로 사가가 몸을 일으켰다.
도현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음음, 고민에 잠긴 소리를 내던 모르달은 마침 TV 화면에 비친 여성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 저기 나옴다요.”
고등학생이나 됐을까 싶은 여성이 기모노 차림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그 아래 푸른 바탕에는 ‘일본 헌터 아야세 하루카 공식 방한’이라는 글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