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 리갈루스 (3)
「흐… 흐흐.」
탁하고 음습한 웃음이 주변 일대를 울렸다.
까맣게 타 버린 살점이 눌어붙은 갑옷 조각과 함께 후두둑 떨어졌다.
「흐하하하하!」
리갈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반쪽밖에 남지 않은 투구가 와작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새카맣게 물든 눈이 도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신의 대리자지! 흐으, 흐으… 제대로 놀아 보자!」
그그그극!
발아래, 이젠 도시라 볼 수 없는 그곳에 유유히 떠 있는 워프가 네 방향의 워프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꾸역꾸역 퍼져 나가는 몬스터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오오오오!
마치 자신들의 왕을 경배하듯 울리는 음울한 저음이 불쾌한 마나를 퍼트리며 베이징을 잠식해 갔다.
「나의 이명, 암흑 군주. 이 모습을 보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검고 검은 마나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리갈루스에게 모여들었다.
숯덩이가 된 살과 조각난 갑옷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 몸을 감쌌다.
다시 나타난 모습은, 검은 갑옷에 왕관을 쓴 검은 해골이었다.
칠흑처럼 검은 그 뼈가 찐득하고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거기에 해골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찬란한 빛을 내는 황금 왕관. 빽빽하게 박힌 보석 하나하나가 예전 제브라드의 치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우우우.
그 앞에 해골이 켜켜이 쌓인 지팡이가 나타났다.
현신……?
도현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강하다.
제브라드에 견주어도 될 만큼.
별것 없을 줄 알았던 신 놈 중에 이렇게 강한 놈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사가가 그렇게 학을 뗀 걸까.
‘그래도 이게 재밌잖아?’
이런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200년 만인가? 아니, 300년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내가 죽겠어.’
수억 개의 칼날이 온몸을 헤집는 이 기분. 오싹하리만치 두려움과 공포도 함께 밀려왔지만 그래서 좋았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시겔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자작! 차자작!
자신의 마음에 동조한 듯 시겔로도 흥분에 찬 스파크를 뿜어 댔다.
들뜬 도현이 시겔로를 앞세워 달려들려 할 때였다.
리갈루스가 손에 쥔 지팡이로 허공을 쿵 찍었다.
검은 안개가 중난하이에서부터 퍼져 나간다.
「이 땅을 죽음으로 물들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5개의 워프가 녹아내렸다. 그 잔재가 땅속으로 스며들자 악취를 풍기며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현재 베이징은 단절된 세상이 되었다.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아직 살아 있는 사람만 해도 대략 2천만 명…….
‘혹시나 해서 말은 해 뒀는데.’
이런 상황에선 뭘 하든 답이 없다.
도현은 무시했던 사가의 말이 질책처럼 떠올랐다.
‘여긴 네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네 집이다. 즉, 지킬 것도, 잃을 것도 많지.’
‘그들은 신이 되고 오랜 세월 이 짓거리만 해 왔다.’
그래, 여긴 제브라드가 아니지.
깽판 칠 때와는 정반대 입장이 되었다. 그때 무척 곤란해하던 제브라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그 얼굴 앞에서 썩소를 날렸지…….’
하, 이게 신벌?
도현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진짜 개 같네.”
그 찰나의 시간에도 퍼져 나가는 죽음의 기운이 도심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구울, 언데드, 스켈레톤, 데스웜, 둠 스파이더……. 많은 몬스터들이 썩은 땅에서 나타나며 도시의 사람들과 헌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리갈루스가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웃었다.
「이제야 공포를 느끼는가, 보잘것없는 인간 대리자여.」
그때였다.
“아빠!”
허공에서 토토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어서,
“처남님! 모, 몸이! 괜찮으십니까?”
“싸, 싸가지!”
“우 헌터님!”
매부, 찌롱이, 김경희 헌터에 이어 프로페셔널 팀, 비휴단이 차례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낭창낭창한 흰 가래떡이 말없이 나왔다.
“모르달……?”
생각지도 않은 출현에 도현은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모르달은 도현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리갈루스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망할 해골바가지가 감히 어디서 도련님을 위협함까욧? 신성력 맛 좀 보겠슴까욧!”
리갈루스의 붉은 안광이 살짝 흔들렸다.
「너, 넌… 제브라드의……?」
동시에 도현의 신성력이 백만, 천만 단위로 빠져나갔다.
짧은 앞발이 뻗어지자 시린 은빛 기운이 묵직하게 실리며 몸 전체를 감쌌다.
귀에 ‘모르달이 신의 기적을 행사합니다.’라는 말이 울렸지만, 도현의 눈은 모르달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몸을 덮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시겔로 위로 신성력이 서렸다.
모르달이 말했다.
“도련님, 뒤는 소인과 아씨, 도령님들께 맡기심쑈!”
작은 몸에서 은빛 파동이 파문처럼 퍼져 나간다. 모르달이 베이징을 가로질렀다.
크아아아아!
몬스터들이 삽시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걸 시작으로 검게 썩어 들어가던 대지가 순식간에 깨끗해진다.
토토가 허공에서 폴짝 뛰며 주먹을 들어 붕붕 휘둘렀다.
“아빠! 할 쑤 있써! 힘내!”
곧바로 커진 토토가 하얗게 불타오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지면으로 뛰어들었다.
뒤를 이어 헌터들이 연달아 도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지면에 착지했다.
차도식이 은빛으로 코팅된 심장을 꺼내 들며 말했다.
“베이징은 저희들이 지키겠습니다. 처남님, 걱정 마십쇼!”
모두가 각각 팀을 짜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남은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아직 썩어 가는 땅을 향해 달렸다. 동시에 정화의 땅이 그 뒤를 바짝 쫓는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감싸며 퍼져 나가는 은빛 물결에 씻은 듯이 나았다. 놀라운 기적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무너진 땅과 건물에 깔린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 이거 원 쪽팔려서.”
도현이 피식 웃으며 리갈루스를 바라보았다. 붉은 안광이 찌그러져 있었다.
「대체 이, 이게… 네놈, 정체가 무엇이지? 왜 네놈에게 제브라드의 노예가 있는 것이냐!」
도현이 픽 웃었다. 하지만 그 끝이 씁쓸해 보였다.
“내가 걔… 대리자거든.”
「…린 아니사 그년이 아니라고? 아,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도현은 횡설수설하는 리갈루스를 무시하며 손에 쥔 시겔로를 역으로 고쳐 쥐었다.
“나불거리지 말고 다시 시작해 볼까.”
은빛에 물든 시겔로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마음껏 날뛰어라, 시겔로.”
짜- 아아악!
은빛의 빛다발이 기다렸다는 듯 주변을 삼켰다. 리갈루스는 흠칫 놀라며 해골이 가득한 지팡이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제브라드의 대리자라 해도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다!」
오오오오오!
지팡이의 해골들이 일제히 턱을 벌리며 귀곡성을 질렀다. 음울한 목소리를 타고 끈적일 것 같은 마나가 지팡이에서 뿜어지며 도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기운은 허공에 그린 은빛 스파크에 닿기 무섭게 빨려 들어가 버렸다.
꺼- 억!
시겔로에게서 트림이 들렸다.
이터라는 놈을 삼키더니 능력이 강해진 것 같았다.
가 볼까.
도현은 허공을 박찼다.
시겔로의 스파크가 날개처럼 홰를 치며 도현의 뒤를 따랐다.
리갈루스가 지팡이를 휘저었다.
「데스 필드, 나와라. 충실한 나의 종이여!」
그 주변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베이징을 삼키던 그 능력과 다르게 일정 주변을 오롯이 자신의 공간으로 만드는 능력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크기는 1킬로미터 남짓할 만큼 작았지만, 그 속에서 나타난 건 어딜 가든 왕이라 불릴 만한 것들이었다.
아크리치, 발록, 뱀파이어퀸, 데스나이트. 이들 수만 해도 수천에 달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데스 필드를 뒤덮는 거대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내가 암흑 군주 리갈루스다!」
그의 외침에 동조하듯 몬스터들이 일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드래곤이 날개를 쫘악 펼쳤다.
크오오오오!
모든 생물에게 극한의 공포를 심는 드래곤 피어가 도현에게 쏘아졌다.
도현이 역으로 쥔 시겔로에 왼손을 보태며 드래곤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시겔로가 한층 더 환한 빛을 뿜어냈다.
서걱!
하얗게 서린 빛이 퍼져 나가며 세로로 쪼개진 드래곤이 입자로 흩날렸다.
기다렸다는 듯 몬스터들이 도현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다시 오른손으로만 쥔 시겔로를 가로로 그었다.
검고 검은 공격들이 증발했다. 예상했다는 듯 전보다 더 많은 공격이 시야를 넘어 몸을 덮쳤다.
도현은 지친 얼굴로 웃었다.
“아아, 너무 흥분했더니, 이거 곤란한데…….”
그러면서도 시겔로를 휘두르는 건 멈추지 않았다.
궤적 한 번에 뭉텅이로 마법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남은 게 더 많았다. 점점 느려지는 몸에 결국 공격을 허용해 버렸다.
파바바바바방! 콰아아앙!
도현은 웃는 얼굴로 몸에 떨어지는 공격을 받아 냈다. 그러면서 몬스터를 하나씩 없애며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다.
시겔로의 은빛 스파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더 크게 울부짖었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몬스터들 사이로 모든 힘을 지팡이에 쏟아붓는 리갈루스가 보였다.
데스 필드에 꽂힌 지팡이에선 검은 마나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리갈루스가 음산하게 웃었다.
「크흐흐, 네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찜찜함이 들자마자 데스 필드 위로 몬스터들이 다시 드러났다. 좀 전보다 두 배나 많은 수였다.
「네놈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이 몸의 충실한 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다. 제브라드 또한 이, 리갈루스의 것이다!」
도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꼭 죽을 놈이 숨어서 개소리해 댄다니까.”
발아래 데스 필드가 낮게 소리를 냈다. 검은 안개가 촉수처럼 뻗더니 시겔로의 스파크에 매달렸다.
찐득하게 달라붙어 힘을 뺏는 꼴에 짜증이 서렸다.
하나씩 처리해서는 물량으로 몰아붙이는 놈을 처리할 수 없었다.
방법은 더 큰 힘으로 압살해 버리는 것뿐.
“아, 이건 진짜 쓰기 싫었는데.”
도현은 거치적거리는 촉수와 몬스터들을 향해 시겔로를 한 번 휘둘러 공간을 만들었다.
귀를 따갑게 만들던 시겔로의 스파크가 팍,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은빛에서 검게 돌아온 시겔로를 들고 검지를 살짝 눌렀다.
투두둑.
데스 필드에 도현의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사이 몬스터들이 개떼처럼 도현을 공격했지만 어째서인지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리갈루스의 붉은 안광이 커졌다.
「이, 이건?」
외침과 동시에 리갈루스는 왼손을 들어 도현을 향해 마법을 뿌렸다.
퍼엉!
사라지는 몬스터들의 공격들과 다르게 그의 마법은 도현의 어깨를 갉아 먹고 사라졌다.
휘청이던 도현이 입을 뗐다.
“그것은 무(無)에서 시작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리갈루스가 수십 개의 검은 구체를 만들어 내 도현에게 날렸다.
두두두두- 퍼퍼퍼퍼엉!
어깨가, 옆구리가, 팔이, 허벅지가. 몸 전체가 터져 나가는 와중에도 도현은 무심하게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의미도, 존재도 없는 그곳에 처음으로 유(有)가 창조되었다.”
웅-
조용하던 시겔로가 얕게 공명했다.
심상치 않은 힘을 느낀 리갈루스는 손끝이 떨리자 주먹을 움켜쥐며 발악처럼 외쳤다.
「마, 막아라! 막지 못하면 모두 소멸시켜 버리겠다-!」
동시에 도현의 목소리가 변했다.
「모든 생명의 시작인 마나, 그것은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따라 검지에서 똑똑 떨어지던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 줄을 이어 데스 필드를 적셨다.
다시 도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무한함은 세계를 넘어 차원을 잉태하는 부모였다.」
우우웅-
붉은 피가 투명해지며 얼룩처럼 번져 갔다. 마법이 막히자 도현을 향해 달려오던 몬스터들은 투명하게 변하는 데스 필드를 확인하지 못하고 밟았다.
그리고 파도의 포말처럼 하얀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뚜욱!
데스 필드에 꽂힌 지팡이 끝이 부서지며 필드 위에 나뒹굴었다.
「……!」
그럼에도 리갈루스는 도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간. 하찮은 인간.
그 인간이 골고타를 불러냈을 때 격을 담은 언어를 쓴 것도 알았다.
「그래 봤자 다섯 글자밖에 안 되는 짧디짧은 1음절…….」
그랬기에 무시했다.
그 정도야 행성들에서 간혹 나올 수 있는 변수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중급 신조차 버거워하는 길디긴 언어. 거기에 벌써 2음절이다.
그 여파로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데스 필드가 빠른 속도로 좁아지고 있었다.
리갈루스가 턱뼈를 달달달 떨었다.
「인간!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당황으로 떨리는 리갈루스의 음성과 점차 좁아지는 데스 필드에 두려움을 느낀 몬스터들은 점점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도현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마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두근!
잠잠하던 시겔로가 맥동했다.
바르르 떠는 칼날의 색이 회색이 되었다. 두근두근, 맥동이 점점 빨라지며 칼날이 점점 사라졌을 때.
키이이이이-!
시겔로가 괴성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