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 리갈루스 (2)
자수정이 유리처럼 부서지며, 베이징에 나타난 2세대 워프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파자자자작!
호수에 뜬 워프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동시에 마나를 뿜어내더니,
쩌저저정!
눈앞의 워프를 시작으로 동서남북의 워프가 함께 깨졌다.
그리고.
우우우웅-
거대한 마나 폭풍과 함께 워프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졌다.
끼에에에!
크오오오!
박쥐 날개를 단 가고일이 긴 울음을 토하며 날아올랐다. 크기만 해도 5미터. 그 뒤를 이어 검은 말, 나이트메어와 그 등에 오른 데스나이트까지.
제 머리를 옆구리에 낀 듀라한과 검은 뼈를 딱딱거리며 스켈레톤이 해일처럼 밀려 나왔다.
언데드. 전부 흑마법과 관련된 몬스터들이었다.
이것들이 나온다면…….
생각이 들자마자 터진 워프에서 느긋한 걸음으로 나오는 몬스터가 보였다. 지팡이를 짚은 채 늘어진 망토를 쓴 리치.
300마리에 육박하는 리치가 호위하듯 대형을 갖춰 나오자, 리치 중의 왕 아크리치가 거만하게 걸어 나와 도현을 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도현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여기만 터지면 몰라도, 베이징에 나타난 워프 전부가 터졌으니 중국 전체가 몬스터의 땅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고 엄청나게 짙어진 마나가 느껴졌다.
이 모두 워프로 인한 일. 사가가 우려했던 문제가 이것이었다.
‘마나 농도가 짙어지면 신이 현신할 빌미를 주는 거다!’
‘그래야 재밌지.’
‘이 미친놈!’
도현이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갑자기 짙어져서 문제이긴 한데.
제브라드, 그 이상의 농도다.
이 정도의 마나라면 일반인은 물론이고 제아무리 각성자라 해도 6, 7급은 몸이 터져 나가 버릴 거다.
중2병처럼 큭큭큭, 웃어 젖히는 리갈루스의 몸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장막처럼 일렁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겉모습이 점점 나이를 먹는다. 가늘던 팔다리가 팽창하며 돌덩이 같은 근육이 붙고 체격도 점점 커졌다.
3미터의 장신. 여태 본 갑옷들과 같은 크기였다.
그 몸을 황금색 갑옷이 감싸며, 선명하게 붉은 망토가 등에서 펄럭였다.
검이 다시 나타나 리갈루스의 손에 쥐어졌다.
깔끔하게 복구된 검은 두 배로 커져 핏빛을 토해 냈다. 마치 좀 전의 상처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는 듯했다.
리갈루스가 왼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겠지.」
투구 안에서 붉게 타오르는 한 쌍의 황금색 눈동자가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주먹을 쥐었다.
온몸을 찌르는 저릿한 기운. 척추를 타고 흐르는 서늘함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거기에.
자신의 삶을 180도 바꿔 버린 게임, 난공불락 에피소드의 ‘왕’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현은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아, 이거 얼마 만이야?”
이런 맞춤형 ‘적’은.
“누가 벌인 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마음에 드네.”
무척 흡족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도현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에 손에 잡힌 시겔로가 흥분으로 몸을 퍼덕였다.
그래, 그래. 네놈과 만났던 그때도 그랬지.
이거 진심으로 해야겠는데?
정말 미친 듯이 즐거웠다.
「이 격을 느끼고도 웃다니, 실성했나?」
리갈루스가 거만하게 도현을 비웃었다.
그럴 만했다. 느껴지는 격은 골고타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만큼 강했으니까.
“익숙하니까.”
「미친놈이군.」
“어. 자주 들어. 그러니까.”
도현이 허공을 박차며 리갈루스를 향해 시겔로를 휘둘렀다.
짜자자작!
맞부딪친 검과 시겔로 사이에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싸우자고?”
「고작 그년의 대리자 주제에!」
리갈루스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밀어 버렸다.
도현은 그 힘을 흘리며 앞으로 풀쩍 뜀과 동시에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한 바퀴 굴렀다.
시야가 뒤집힌다. 그 아래 살짝 앞으로 숙인 리갈루스의 목덜미, 이음새를 향해 시겔로를 박았다.
까가가강!
대기가 찢기며 호수의 흙탕물이 분수 쇼처럼 튀어 올랐다 다시 가라앉는다.
습한 흙냄새가 자욱하게 퍼지는 그곳엔 시겔로를 막은 넓은 검면이 보였다. 붉은 검이 웅웅 울어 댔다. 동시에 마찰로 불꽃을 튕기는 검면이 움푹 꺼지며 시겔로의 칼끝이 늪에 빠진 듯 빨려 들어갔다.
시겔로가 저항하듯 스파크를 뿜었다. 펑, 하는 작은 폭발을 반동 삼아 도현은 리갈루스와 거리를 벌렸다.
검면에 폭발로 생긴 파문이 점점 자취를 감췄다.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검이 아닌데?”
「눈치챘나?」
리갈루스는 검을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대로 바닥에 추락할 것 같던 검은 생물처럼 꾸물거리더니 그의 손에 흡수되었다.
「이터, 모든 걸 먹어 치우지.」
도현이 빈정거렸다.
“검도 모르는 놈이 검을 들고 있다 싶었더니.”
「…그렇게 떠들어 대는 것도 지금뿐이다!」
리갈루스가 검지를 들어 도현을 찍었다. 도현은 재빨리 움직였다. 간발의 차로 허공이 와작 소리를 내며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도현이 허공을 달리자 리갈루스의 검지가 선을 긋듯 따라붙었다.
콰자자자작!
허공이 줄을 이어 거칠게 찢겨 나갔다.
리갈루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쥐새끼처럼 빠른 건 인정해 주지. 그런데 주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나 보군.」
허공도, 건물도, 잔해로 가득한 호수도. 막 워프에서 나와 진군하는 몬스터들까지, 도현이 지나간 곳은 전부 금색의 구멍이 뻥뻥 뚫렸다.
치지직! 파바바박!
도현의 손에 쥐어진 시겔로가 신경질적으로 스파크를 뿌려 댔다. 군침이 도는 진수성찬을 두고 왜 이러냐는 투정이었다.
먹을 것밖에 모르는 미친 새끼.
미친놈과는 환상의 조합이지만, 솔직히 시겔로의 먹이는 늘 신경 써야 했다.
아니고서는 자신이 그 먹이가 될 테니까.
언제나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는 검. 아슬아슬한 경계가 쾌감을 살짝 더해 줬다.
목숨을 건 묘미.
‘조금만 기다려.’
스파크가 뚝 멈췄다. 바르르 떠는 모습이 설렘처럼 느껴져 혀를 찼다.
「걸려들었군.」
주변은 이미 황금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공격이 멈췄다.
리갈루스가 손을 펼치자 검은 가죽으로 뒤덮인 손바닥이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도현의 몸이 푹 꺼지더니 그의 옆에 나타났다.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네.”
도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으며 시겔로를 리갈루스의 옆구리를 향해 찔렀다.
카가각!
종잇장처럼 갑옷이 찢겼다. 하지만 몸엔 전혀 닿지 못했다.
“쯧, 보기보다 튼튼한데.”
시겔로를 고쳐 잡아 한 번 더 깊이 찌르려고 했을 때, 화끈거리는 불의 기운이 온몸을 옥죄어 왔다.
「내가 왜 가만히 있었는 줄 아는가?」
오만한 목소리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리갈루스의 손이 도현의 눈에 들어왔다.
화르르륵!
황금색으로 뒤덮인 주변이 공명하듯 함께 요동치며 붉게 물들었다.
짜작!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함께 도현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에 균열이 생겼다.
도현은 무심한 얼굴로 발아래를 바라봤다.
붉게 물든 세상이 꿀렁거리듯 꿈틀거렸다.
무슨 누구 입속도 아니고.
리갈루스가 말을 이었다.
「이터, 먹어 치운 공간조차 모두 제 몸으로 만들어 버리지.」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도현의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몇십 배로 강해졌다.
퍼서석, 깨진 보호막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꿀렁, 꿀렁!
흥분한 듯 움직이는 붉은 덩어리. 버티고 있음에도 몸이 점점 아래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리갈루스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마주했다.
투구 안의 불타는 황금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휘어졌다.
「대리자라 하지만 인간은 인간. 잘 가라.」
붉게 타오르는 주먹이 도현의 얼굴을 강타했다.
퍼억!
얼굴이 홱 돌아가며 아래로 푹 꺼졌다. 꿀렁거리는 주변이 기다렸다는 듯 도현을 삼켰다.
파자자자작!
시겔로가 스파크를 뿜어냈다. 충격에 파르르 떨던 이터가 도로 도현을 뱉어 버렸다.
“하… 하하.”
도현은 입가의 피를 훔치며 웃었다.
“그래, 그래. 너무 오랜만이라 정신줄을 좀 놓았어.”
손에 쥐어진 시겔로가 짜증스럽게 스파크를 뿜어 댔다.
도현은 시겔로의 손잡이 끝, 고리에 검지를 걸었다. 반동을 주지 않았음에도 흥분한 시겔로가 홀로 돌기 시작했다.
짜자자작!
스파크가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채찍처럼 뻗어 가는 스파크에 이터의 입속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닿지 않기 위해 피하는 모습이랄까. 그래 봤자 결국 닿을 텐데.
짜아아악!
시겔로가 존재감을 내뿜었다. 동시에 팽창한 이터의 입속이 풍선 터지듯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에 먹혀 버렸다.
「뭐, 뭣?」
당황한 리갈루스가 보였다. 도현은 팽그르르 도는 시겔로를 향해 말했다.
“허락한다. 먹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스파크가 요란한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감히, 어디……! 크어억!」
분노하던 리갈루스가 사라진 팔에 어깨를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 주변으로 요란한 스파크와 기괴한 괴성이 맞부딪치며 정신없이 주변을 뒤엎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눈알처럼 생긴 우둘투둘한 살덩어리. 혈관 같은 긴 꼬리를 이리저리 날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뒤를 시겔로가 바짝 쫓아 스파크를 뿜어 대면 살덩이는 유일하게 달린 입을 쩍쩍 벌리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 여파로 헌터를 공격하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푹푹 줄어들고 있었다.
의외였다. 바로 먹어 치우지 못하다니.
“처먹으라고 했더니,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너도 늙었냐?”
순간 멈칫한 시겔로에서 힘이 폭발했다. 함께 쏟아지는 스파크가 도심을 더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키득, 다시 웃음이 났다. 역시 이래야 재밌지.
「감히… 감히……!」
리갈루스의 거친 목소리에 따라 대기가 파들파들 떨어 댔다.
깔끔하게 잘린 어깨. 그 아래에는 텅 비어 피처럼 줄줄 흐르는 검은 안개가 뭉치기 시작했다.
푸확, 촤자자작!
새로운 팔이 돋아나더니 그 위로 다시 갑옷까지 복구됐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공격했던 옆구리도 말끔해졌다.
역시 신물인가?
리갈루스는 복구된 손을 꽉 움켜쥐며 도현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도혀어어언!」
꽝!
교차해 막은 팔이 잘게 떨렸다. 근육을 타고 뼈까지 울리는 아린 통증에 얼굴이 구겨질 법도 한데, 도현은 웃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 주셔야지.”
리갈루스의 대답은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다리였다. 도현의 몸이 꺼졌다. 리갈루스의 등 뒤에 나타난 도현은 곧바로 양손을 깍지 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꽈아앙!
리갈루스가 포탄처럼 지면에 박히며 대지가 빙산처럼 솟았다. 휩쓸린 몬스터들의 잔해가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를 지켜보던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리갈루스의 다리가 스쳐 가며 흉흉한 바람 소리를 냈다.
그대로 리갈루스를 차올리려 했던 도현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살덩이와 시겔로에 고개를 들었다.
이것들이!
찡그려지는 얼굴보다 눈앞까지 온 주먹에 입술을 비틀었다.
꽈앙! 푸화아악.
스파크가 허공과 대지를 갈랐다.
순식간에 호수 전체가 증발해 버리며, 먼지와 돌멩이가 뒤섞인 수증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후욱, 후욱.
도현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왼손으로 시겔로의 칼등을 받쳐 리갈루스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과 달리 소름 끼치는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와 도현을 압박했다.
힘이 약한 것도 아닌데, 팔이 달달 떨렸다.
「하하, 대리자라더니 제법이야. 그럼 이건 어떨까?」
콰과과과과!
시겔로에게 막힌 오른손에서 힘이 폭발하며 도현을 찍어 눌렀다.
손바닥이 화끈거린다 싶더니 미끄러진 시겔로가 튕겨 하늘을 날았다.
동시에 도현의 가슴에 리갈루스의 주먹이 꽂혔다.
“커억-!”
도현은 가슴이 부서지는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붉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시겔로가 눈에 비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울컥, 목을 타고 올라온 핏덩이가 입가를 타고 주룩 흘렀다.
얼굴 위로 두툼한 갑옷 다리가 떨어졌다.
도현의 몸이 푹 꺼졌다, 한 발자국 뒤에서 나타났다.
퉷.
고인 피를 뱉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문지른 도현은 내리깐 리갈루스의 서늘한 눈을 마주하며 아주 즐겁다는 듯 히죽 웃었다.
“흐- 오랜만에 죽여주네.”
「네 소원대로 죽여 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갈루스 몸 전체에서 검은 연기가 대량으로 뿜어져 도현을 향해 쏟아졌다.
도현의 눈이 커졌다.
본능적으로 시겔로를 소환하기 무섭게 양손으로 쥐고 리갈루스의 가슴을 칼끝으로 찍었다.
짜자자자자작! 콰아아앙!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시겔로의 스파크가 검은 연기가 부딪치자마자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거친 폭발만큼 몰아친 강풍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리갈루스와 도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은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시겔로를 쥔 도현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달리 광기가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8성의 군주라더니, 헛말은 아니네.”
시겔로가 박힌 리갈루스의 몸은 갑옷이 터진 채 새카맣게 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