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 대륙 스케일 (2)
도현은 재우를 데리고 텔레포트했다.
한적하다 못해 허허벌판인 시골.
밤이 깊어 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미약한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곳이었다.
한참을 주저하던 재우는 결심하고서 내질렀다.
“형,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처음부터 봤던 재우는 도현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현의 목적은 알게 됐지만, 그것과 그놈들을 지원해 주는 건 다르지 않나.
“뭘?”
“그냥… 아 씨! 왜 그놈들 뒤치다꺼리를 해 주냐구요. 안 해도 형 혼자 충분히…….”
도현이 걸음을 멈췄다.
순간 재우는 불호령이 떨어질까 지레 겁먹었다.
“귀찮아.”
“…예?”
“난 백수가 꿈이라고. 요리도 조금 하면서.”
‘요… 리하는 백수?’
벙쪘다.
국내를 뒤집고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그 주인공의 꿈이 백수. 그것도 요리하는 백수일 줄은…….
“그, 그럼 왜 중국에…….”
도현이 인상을 구겼다.
“말했잖아. 내 백수 라이프를 방해하는 놈들이 있다고.”
재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치우천왕이라는 자가…….”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
그러곤 재우를 빤히 봤다.
“어, 어디로 텔레포트할까요……?”
“아니, 훈련부터.”
눈앞에 작은 동산 크기의 익숙한 달 조각이 보였다.
초록색, 4등급 워프.
“저… 텔레포터인데요?”
“알아.”
“워, 워프는 왜…….”
“언제까지 옮기고만 다닐 건데?”
재우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흘렸다.
***
중국 최고위 지도자들이 관저를 두었던 중난하이. 그중 중해의 자광각.
현재 중국의 주석인 시단핑이 다급하게 이곳을 찾았다.
“치우천왕 폐하! 치우천왕 폐하!”
왕좌에 앉아 턱을 괸 채 허공을 보던 한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스물 중반쯤 됐을까.
생생한 붉은색의 짧은 머리카락에 황금색의 눈이 매력적인 사내, 리갈루스였다.
왕좌에서 입구까지 쭉 뻗은 붉은 카펫을 밟고 다급하게 뛰어온 시단핑은 얼굴이 핼쑥했다.
“소국의… 소국의 헌터, 우도현이 워프를 다 없애고 있습니다!”
“예상했을 텐데, 무엇이 문제지?”
“하, 하지만 하루 만에 20개 시 583개의 워프가 사라졌단 말입니다!”
시뻘게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치자, 왕좌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후거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뽑아 시단핑을 향해 휘둘렀다.
“멈춰.”
리갈루스의 한마디에 검이 바로 검집에 꽂혔다.
“허어어억!”
눈앞을 스쳐 간 검에 깜짝 놀란 시단핑은 벌러덩 뒤로 자빠져 푸들푸들 떨었다.
스친 콧등에서 피가 주룩 배어 나왔다.
“후거… 어떻게 자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나!”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리갈루스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어떻나.”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시단핑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왔던 저 사내. 그리고 대국 최고의 헌터를 만들기 위해 감행한 일.
그 결과 단숨에 미국 턱 끝까지 쫓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대국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처음에 대외적인 이유로 힘을 거부했던 것이 자신을 살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저자의 꼭두각시가 될지도 모른다.
‘용의 등에 올라타면서 그건 이미 감수했던 위험이다.’
남은 것은 용에게 먹힐지 용을 부릴지, 그 두 가지뿐.
소국의 대통령을 통해 가능성을 봤다.
전 협회장을 놓치면서 2세대 워프가 중국에도 생겨나면 대업은 곧 시작될 거다.
숨을 들이켜 뱉은 시단핑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닙니다. 겨우 미국 턱 끝입니다.”
“그렇군.”
다행히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시단핑은 왔던 목적을 상기하며 침을 삼켰다.
“치우천왕 폐하… 워프는…….”
리갈루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부가 친히 나서 주셨으니, 곧 새로운 워프가 나타날 것이다.”
시단핑은 주먹을 꽉 쥐었다.
2주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새로 태어날 워프는 등급이 높긴 했지만 주기가 없는 워프다.
‘이날을 위해 헌터들을 키웠다!’
워프가 강해진 만큼 안에 잠들어 있는 흙 한 줌도 귀한 자원이 된다. 그리고 등급, 능력, 마나 등 전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진다.
그러한 2세대 워프 하나씩 헌팅한다면…….
‘굳이 급수에 연연할 필요 없이 장비만으로 워프에 들어갈 수 있다!’
이건 워프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쟁.
헌터의 급수만 내세워 간 보기나 하던 눈치 싸움을 집어 던지고 실질적인 힘을 과시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꿈에 그리던 대제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시단핑은 대제국의 왕이 되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치우천왕’도.
자신은 6급 각성자. 헌터계에서는 명함도 들이밀 수 없는 일반인으로 취급될 정도로 나약하다.
치우천왕이 그런 자신을 살려 두는 이유는 애완동물이랄까.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는 장난감 같은 생물.
그래서 자신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쉽게 내뱉었다.
‘이 몸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야. 매개체지.’
거기서 가능성을 찾았다.
한국 정부에서 실험한 정신 지배. 전 협회장은 무력으로 탈출했다지만, 그건 고태환의 약한 능력 때문이니까.
하지만 고태환이 10명, 아니 100명이라면?
‘네놈이 내 발아래 부복하게 될 것이다!’
시단핑은 그날이 빨리 오길 기대하며 속으로 숨긴 채, 감격한 얼굴로 천황폐하 만만세를 외치고 나갔다.
적막감이 다시 자광각을 채웠다.
리갈루스는 무엇도 없는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직 그만 들여다볼 수 있는 전경.
거기에는 한국에서 2세대 워프를 헌팅 중인 정준혁, 황룡 팀이 보였다.
리갈루스가 턱을 쓸었다.
“한국의 새 워프가 너무 압축됐어. 뭐, 이대로 반년 안에 터지겠지만……. 흐음, 린 아니사…….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팔걸이를 톡톡 치던 그는 부드러운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어차피 이곳에 방문할 테니 그때 보자고.”
입술을 핥는 리갈루스의 붉은 눈에 기묘한 열기가 감돌았다.
***
방장스님 런자룬은 창밖, 쑹산의 오유봉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매일 관광객과 활기로 넘쳐 나던 소림사는 현재 조용하기 그지없는 흔한 절이 되었다.
세상에 각성자가 나타나고 헌터라는 계급이 생긴 뒤, 너무나도 바뀌어 버렸다.
특히 중국을 대표하는 소림사였기에 그 기대는 비단 중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라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천재지변이 들끓어 사상자가 끊임없이 나왔을 때 주변 시의 복구와 안녕에 앞장선 건 소림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구했고, 많은 승려를 잃었다. 이것이 소림사의 첫 위기였다.
두 번째 위기는 각성자가 나타나면서였다. 재앙으로 3천 명이란 승려를 잃고, 천 명 남짓한 승려들 대부분이 각성자가 되었다.
중국은 소림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몇 날 며칠, 몇 달. 소림은 전 세계에 일어난 천재지변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드높은 위상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소림을 떠났다.
힘과 권력, 거기에 따른 부귀영화를 소림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림은 막지 않았다. 대신 남은 승려들은 창대했던 소림사를 꿈꾸며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사람들은 헌터가 되기를 바라지 승려가 되고 싶지는 않아 했다.
그렇게 소림사는 봉산(封山, 공식적인 모든 활동을 중단)했고,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고작 200명밖에 안 되는 스님들만 남았지만, 오히려 소림은 활기가 넘쳤다.
‘방장스님! 제가, 제가 백보신권을 깨우쳤습니다!’
‘금강부동심법입니다!’
‘백팔나한진을……!’
위기는 곧 기회였다.
맥이 끊어졌던 소림의 절기들이 각성한 스님들과 함께 소림을 찾았다.
서로서로 격려하며 진정한 소림으로 다시 태어난 거다.
런자룬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방장스님, 우슈보입니다.”
“들어오게.”
도복처럼 보이는 물색의 승려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박박 밀어 버린 반들반들한 머리, 순박하고 앳된 얼굴이지만 다부진 몸과 진지한 표정이 무척 성숙해 보였다.
“부목(負木, 땔감을 마련하는 소임을 맡은 스님) 스님이시구만. 무슨 일인가?”
“오늘 밤 천불전에 가려 합니다.”
런자룬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세상이 변했을 때 소림에도 워프가 나타났다.
대부분 스님들의 노력 끝에 없앨 수 있었지만, 마지막 하나는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노란색의 달 조각.
중국의 영웅이었던 소림이었기에 더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게 봉산으로 이어졌고, 이 워프로 인해 소림은 더욱더 단단한 결속력을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젠 붉게 변한 달 조각은 늘 스님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런자룬은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황월석(노란 달 조각)이었을 때, 스님 스물이 달마대사의 곁으로 가셨네. 자월석(주황 달 조각) 때도 열이 가셨지.”
“하지만 자격이 주어진다면 허락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런자룬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한들 혼자는 안 되네. 금홍월석(금붉은 달 조각) 이야. 부목 스님의 무공이 일취월장하였다 해도, 그건 허락할 수 없네.”
우슈보는 무릎을 짚고 있던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대체… 대체 언제쯤이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봉산하였다 해도, 눈과 귀를 닫고 계신 건 아니시지요?”
“또 아래 도시에 다녀온 겐가…….”
“터진답니다.”
“금홍월석이……?”
우슈보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색이 변하면 터진다고 하였습니다.”
“알고 있네. 곧 재앙이 시작되겠지.”
런자룬은 눈을 감고 불호를 되뇌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떠진 그의 눈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그렇다 한들 허락할 수 없네.”
“어째서입니까? 모두가, 모두가 죽는단 말입니다! 소림만이 아니라 쑹산 아래 사는 시주까지요!”
괴로움에 일그러진 우슈보의 얼굴과 달리 런자룬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난 말일세. 솔직히 방장에 자격이 없네. 소림을 외면한 스님도, 시주들도 모두 밉거든.”
“…예?”
그러곤 따뜻한 눈길로 우슈보를 봤다.
“부목 스님은 살아야 하네. 스님이야말로 소림 그 자체야.”
“무, 무슨…….”
우슈보는 충격으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늘 소림을 위해, 시주들을 위해 앞서 헌신했던 런자룬 스님.
승려이기보다 무술을 가르쳤던 사범에 가까운 분이셨지만, 한평생 소림을 위해 사셨던 분이었다.
소림이 위기를 맞고 흔들릴 때도 중심을 잡아 주셨던 분이… 사실은 더 큰 분노를 품고 있었다니…….
런자룬은 방황하는 우슈보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하산을 명하네.”
우슈보가 넋이 나간 얼굴을 들어 런자룬을 바라보았다.
인자한 웃음은 그대로지만, 왜 울고 계신 것 같을까…….
눈물을 툭 떨어트린 우슈보가 늦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건 아닙니다. 아니……!”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기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벽에 박혔지만, 그들이 보려 한 것은 벽 넘어 멀리 떨어진 천불전이었다.
***
10평 남짓한 공간에 12명의 남녀가 갑자기 나타났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엉덩이를 쿵 찧은 리찌리인이 소릴 질렀다.
“미, 미, 미쳤어요? 여, 여기 소, 소림… 웁!”
“쉬- 잇! 리리, 또 소리 지르면 그땐 손이 아니라 내 입술이 될 거야.”
리찌리인의 입을 막은 시웬시오가 능글맞게 웃었다.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슬며시 손을 뗐다.
심드렁하게 서 있던 도현이 말했다.
“실력 좀 볼까. 진법 펼쳐 봐.”
며칠 사이에 전문 통역원이 된 주펑이 빠르게 말을 전했다.
처음 저들이 사는 집 주변의 환영도 리찌리인의 진법이었다.
국내 헌터들이 급수에 목을 맨다면, 중국은 숙련도를 중요시했다.
그래서 그녀가 낮은 급수의 헌터라도 공안 헌터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투덜대며 리찌리인이 진법을 설치하는 동안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 하나 크기의 붉은 달 조각.
1세대 1등급 워프.
그것도 2주기에 들어선 시한폭탄.
모두 말은 없었지만 긴장한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