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 대륙 스케일 (1)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 시웬시오가 도현 앞으로 갔다.
“한국 헌터 우도현?”
한복과 비슷했지만 소매가 더 크고, 바지가 아닌 치마였다. 거기에 흘러내릴 것 같은 도포까지.
마치 중국 옛 영화의 귀공자 옷 같달까.
멋들어지게 흘려 쓴 한자와 꽃 그림이 그려진 전통 부채를 살랑이는 시웬시오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휘었다.
“공안 헌터 살인자가 왜 여기 있을까……?”
분명 웃는 얼굴에 화사한 목소리인데도 살갗을 찌르는 살기가 느껴졌다.
바로 곁에 있던 재우는 돋는 소름에 입을 꾹 닫았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지……?’
화려한 붉은색의 창파오 복장을 한 쑨타오가 시웬시오 옆에 서서 도현을 아래위로 훑었다.
맞은편에 앉은 리찌리인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토했다.
“너희들도 저 꼴 나기 싫으면 조용히 앉아. 딱 한 번만 말하지만, 나나 주티엔용도 못 막아.”
그 말에 두 사람은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도 직업의식을 잊지 않은 주펑이 도현에게 작게 통역해 주었다.
도현은 주티엔용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밥 다시 가져와.”
주방에서 나왔던 샤오지예와 쇼쇼는 조용히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쑨타오가 기가 차 탄성을 질렀다.
“하!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밥 타령이야?”
키가 무척 작은 할머니, 쇼쇼가 쟁반과 행주를 들고 나왔다. 엉망이 된 식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쟁반만 해도 몸보다 커,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도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엎어지고 나뒹굴던 음식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쏟아진 국물까지 전부 주방으로 날아갔다.
놀란 샤오지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식탁에 모인 이들 사이는 숨도 멈춘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 적막하기만 했다.
말뚝처럼 박혀 있던 쑨타오를 시웬시오가 끌고 리찌리인 옆에 앉았다.
곧바로 식탁 위에 다시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원치 않는 일이라 해도 대장이 정한 일이다. 따를 줄도 알아야지. 괜히 망아지처럼 날뛰다 앓아눕지나 말거라.”
샤오지예가 마지막 음식을 가지고 나오며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조금 전 방으로 옮긴 왕호우더를 떠올린 둘은 입을 일자로 닫았다.
샤오지예가 가지고 나온 건 찜통이었다.
하나만 해도 20인분은 될 국 냄비 크기. 입이 많아서인지 두 통이나 되었다.
그는 익숙하게 찜통을 식탁 위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는 주먹만 한 만두가 수증기에 젖어 탐스럽게 반들거렸다.
도현은 절로 군침이 넘어갔다.
샤오지예는 도현과 재우, 주펑을 차례차례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들거라.”
말이 끝나자마자 도현은 만두를 덥석 쥐어 한 입 베었다.
뜨거운 김과 육즙이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뿜어졌다.
도현은 만두를 우물우물 씹더니 샤오지예를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보기만 해도 널찍한 10인 테이블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음식이 나왔다.
주펑 옆에 앉은 샤오지예와 반대편에 앉은 쇼쇼는 도현이 이 음식, 저 음식을 덜 때마다 이름을 하나씩 알려 주었다.
먼저 나오자마자 먹었던 뜨끈한 만두, 쟈오쯔는 한국에서도 흔히 먹는 그 만두의 맛이었다.
한국의 자극적인 음식과는 조금 다른 자극적인 맛.
향신료에 의존한 느낌이 크지만, 이건 이것대로 꽤 중독성 있었다.
‘괜찮은데?’
특히 궁바오지딩과 디싼씨엔이 그랬다. 궁바오지딩은 깍둑썰기한 닭고기에 당근, 땅콩, 피망을 넣어 함께 볶은 요리였다.
소스가 닭강정에 들어가는 소스 맛과 비슷했는데, 튀김옷을 입히지 않아 부드러워 좋았다.
디싼씨엔은 독특하게도 가지를 튀긴 음식이었는데, 피망과 감자도 함께 튀겨 달콤한 간장 소스에 버무려 가지의 새로운 맛을 보여 주었다.
디싼씨엔과 비슷한 소스로 졸인 삶은 삼겹살, 홍샤오로우도 괜찮았다. 간장 소스가 충분히 베인 두툼한 고기가 부드럽게 씹히며 은근히 손이 가는 음식이었다.
그 외에도 가늘게 채 썬 돼지고기에 파와 고추를 넣어 달콤하게 볶은 쌍라러우스와 한국의 탕수육과 똑같은 새콤달콤한 맛의 탕추리지가 있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한 번쯤 해 먹고 싶었다.
이렇게 먹다 보니 속이 더부룩했다.
맛은 있는데 너무 기름지다.
밑반찬으로 새콤달콤한 간장 오이 무침이나 볶은 양파가 있었지만, 이 음식들로 해소되기에는 한국인 입맛이 너무 담백했다.
도현은 결국 인벤토리에서 캔 맥주를 꺼내 땄다.
“형… 저, 저도…….”
화색이 도는 것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얼굴이었다.
무척 간절한 눈빛에 딴 캔 맥주를 건네고 다시 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놀란 샤오지예가 손을 허공에 밀어 넣었다 당겼다 하며 감탄했다.
“공간? 공간을 가진 헌터인가? 허허! 자네, 놀라운 헌터군!”
도현은 미소 지으며 캔 맥주를 꺼내 인원수대로 돌렸다.
결론은 도현과 재우를 제외하면 썩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주펑이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도수 높은 술을 마십니다. 이런 맥주 캔은 콜라나 사이다 같은 음료수죠.”
아, 아, 그래서.
신 놈만 아니었으면 관심조차 없었을 나라다.
그래도 음식이 입에 맞아서 그런지, 꽤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집에 가면 만들어 먹어 봐야겠어.’
그러고 보니 중국은 못 먹는 것 빼고 다 먹는 나라랬지?
그렇다면 몬스터 요리도 있을까?
갑자기 호기심이 불쑥 솟았다.
땅덩어리도 넓으니 워프도 더 많다. 도현은 농장을 떠올리곤 빙긋 웃었다.
‘온 김에 싹 털어 가지, 뭐.’
그러면서 재우의 텔레포트도 정교하게 가다듬으면 될 거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을 때, 입맛에 꼭 맞는 탕추리지를 젓가락으로 집던 재우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져 몸을 흠칫 떨었다.
도현 일행이 앉은 맞은편, 시웬시오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투덜대며 리찌리인에게 하소연했다.
“주말에 이런 일은 처음이야. 공안과 공안 헌터가 시민이고 여행객이고, 소지품에 짐 수색이 끝나야 보내 주더라고. 가게는 더했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모두 다 뒤지는데, 막아서거나 거부하니까 죽여 버리더라.”
주펑이 사레들린 듯 기침을 해 댔다. 재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굴렸다.
하소연 상대는 리찌리인이었으나, 그가 도현을 노골적으로 보며 말했기 때문이다.
쑨타오도 도현을 대놓고 쳐다보며 홍샤오로우 한 점을 우물거렸다.
“그 때문에 공안 헌터들에게 감시까지 받았지. 잘못했으면 일도 망치고 위약금은 위약금대로, 의심은 의심대로 사서 공안 헌터에게 끌려갔을 거야.”
두 사람은 입을 닫았음에도 도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압박감에 주펑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재우는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도현을 봤다.
샤오지예가 크흠! 헛기침하자 쑨타오의 시선이 누그러졌다.
시웬시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우도현? 영상 보고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이 훨씬 낫네. 너 내 가게에서 일 안 할래?”
묵묵히 들어 주던 리찌리인이 콜록콜록! 기침하더니 시뻘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미쳤어?”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공식 헌터 급수는 3급 블랙. 하지만 한국 헌터 전 협회장의 독단으로 1급 자격증을 줬다는 소문은 이미 세계 곳곳에 퍼졌다.
그 일로 두 사람이 현상 수배 중이란 게 이해가 안 되지만, 잠적했다는 사람이 갑자기 중국 톈진 빈장따오에서 나타나다니…….
그것도 밀입국으로 말이다.
범죄자 수배 협조로 출동한 공안 헌터를 아무렇지 않게 살해까지 했다.
그 일로 톈진은 현재 뜨겁게 끓고 있었다.
주절주절 설명하는 리찌리인을 한참 보던 시웬시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빙긋 웃었다.
“흐응! 리리가 왜 내숭을 부리나 싶었더니, 우도현에게 반했어?”
“무, 무슨……!”
맞은편에서 무슨 말을 떠들든 마지막 그릇까지 싹싹 비운 도현이 물수건으로 입을 닦은 다음, 샤오지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눈을 깜빡이던 샤오지예는 허허! 웃으며 일어났다. 덩달아 맞은편의 쇼쇼도 일어났다.
“기다리게. 차를 내오지.”
도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곤 묵묵히 먹기만 하는 주티엔용에게 말을 툭 던졌다.
“들어 보니 헌터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주티엔용이 도발하듯 되물었다.
도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머리를 치려고 뒤 작업 중일지도 모르지.”
순간 식당에 극심한 한기가 몰아쳤다.
주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 몰려왔던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져서다.
반대로 쌓인 불쾌감이 터진 재우가 소리치려 하자 도현이 어깨를 잡았다.
마침 샤오지예가 차를 가져왔다.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도현이 입을 뗐다.
“너희들이 뭘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내 주위에서 알짱대지 마.”
쑨타오가 배를 잡고 웃었다.
“고작 소국 3급 헌터 주제에. 대국이 우스워?”
도현이 피식 웃었다.
“헌터 5급 그린.”
쑨타오가 멈칫했다.
“헌터 5급 레드.”
시웬시오가 웃고 있던 입꼬리를 잘게 떨었다.
“헌터 4급 블루, 그리고 3급 그린.”
리찌리인은 딸꾹질을, 주티엔용은 살짝 인상을 썼다.
도현의 시선이 샤오지예와 쇼쇼로 향했다.
“헌터 4급 블루 두 분까지.”
다시 주티엔용을 봤다.
“고작 이 인원으로 뭘 한다는 거지? 너희들 말대로, 대국이 우스워?”
주티엔용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얗게 탈색된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식탁을 쾅 치며 일어난 주티엔용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럼 넌! 너라고 달라? 고작 한 달, 그 한 달 만에 이 나라에 헌터가 사라졌어! 잡혀간 헌터들은 공안 헌터가 됐다. 예전에 알던 놈들이 아니었어! 치우천왕 폐하의 명이라며 인민에게 칼을 들이밀었다고!”
살기 위해 죽여야 했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진 헌터를 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도현은 다시 차를 후루룩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무서워?”
넷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도현이 무덤덤하게 답을 냈다.
“무섭겠지. 안 무서운 게 이상하지.”
쑨타오가 이를 으득 씹었다.
“말장난…….”
도현이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으면 수습이라도 해.”
시웬시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러니까 네 뒤치다꺼리라도 하라, 그 말이야?”
“난 못해. 아니, 난 안 해!”
몸을 돌리며 쑨타오가 거부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리찌리인이 눈을 뜨며 말했다.
“좋아요. 하겠어요.”
“뭐? 리리, 너 미쳤어?”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담담한 눈빛에 쑨타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시웬시오가 그의 등을 팡 쳤다.
“하던 일이랑 뭐가 달라? 일의 연장선이라 보면 되지.”
도현이 주티엔용에게 물었다.
“넌?”
“대신 그 방식은 우리, 비휴 방식대로 할 거야.”
“마음대로. 그런데 그 전에.”
도현은 농장 주민 리스트에서 차도식과 하지현, 그리고 프로페셔널 팀의 서재현 팀장과 팀원 이정현을 불렀다.
갑자기 소환된 넷과 당황하는 다섯을 보며 도현이 사악하게 웃었다.
“딱 죽을 만큼만 굴러.”
샤오지예와 쇼쇼는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