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20화 (120/200)

# 120

120. 가출 (1)

“곧 잠잠해질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민혁은 반사적으로 열린 입을 닫았다.

‘아무리 돕고 싶다 해도 결국 혼자 처리하고 말겠지…….’

이쯤 되니 회의감이 밀려왔다.

힘이나 능력이 도현에게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밖에 안 될 테니까.

우울함에 땅을 파려던 민혁은 도현의 말에 화색이 돌았다.

“궁금한 거 물어봐. 대답해 줄게.”

“전부?”

“그래, 전부.”

“저도 듣고 싶어요.”

허공에서 불쑥 아바가 튀어나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집에 오라고 한 건 어제가 처음인데 제집처럼 들락거리니 하숙이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어차피 방문자도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들이닥치지 않나.

도현은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둘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뭐가 궁금한데?”

민혁은 아바를 보며 미소 짓다 먼저 운을 뗐다.

“행방불명됐을 때, 제브라드가 뭔지도, 그리고… 혼잣말하던 신들도.”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네. 아바도 들어야 하니까 처음부터 설명할게.”

도현은 오랜만에 자신의 과거를 입에 담는 거지만, 한 번 이야기한 전적이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술술 나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제외했음에도 두 사람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린 건 오후 3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 찌뿌드드해진 몸을 편 민혁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하… 500년이라니. 듣긴 했어도 영 상상이 안 되네.”

아바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영화나 소설, 옛 신화에서나 다룰 만한 이야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니.

그렇다고 못 믿겠다는 건 아니다. 현실에도 각성이란 게 존재하고 워프와 헌터, 검과 마법을 쓰고 있으니까.

이 모든 게 지구를 넘보는 신들의 농간이라…….

아바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미국에서 겪었던 미심쩍은 상황을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도 어느 신의 손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현이 수긍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비슷한 상황일 거야.”

민혁이 놀라 물었다.

“설마 지금 정부가 난리 치는 것도 신들의 농간이야?”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에? 어떻게?”

도현은 몇 시간째 품속에 가만히 있는 토토를 고쳐 안아 들고 일어났다.

“일단 밥이나 먹자. 토토, 배고프지? 뭐 먹을까?”

“모루달… 후이이잉… 압빠, 모루달 어디 갓써……?”

“밥 먹고 찾아보자. 토토 좋아하는 치킨 먹을까?”

“치, 치킨! 쪼아! 모루달도 치킨 조아해!”

도현은 남은 리리카코 고기로 치킨을 만들 생각이었다.

토토와 도현의 대화를 들은 아바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토토 말대로 모르달이 안 보이네요. 농장에 갔어요?”

민혁의 귀도 쫑긋해졌다.

‘찾자는 말이 아무래도……?’

도현이 심드렁하게 정답을 확인해 주었다.

“가출했어.”

***

모르달은 달리고 또 달렸다.

‘신이 없으니까.’

농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귀에 꽂힌 그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복슬복슬한 고양이. 털도 눈동자도 제브라드 님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나쁜 말을 뱉슴까요!”

모르달은 까득 이를 갈며 새카만 하늘을 봤다.

제브라드 세계와는 달리 미약한 빛을 내는 별들과 드문드문 떠다니는 구름이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무척 평온해 보였다.

같은 하늘이지만 다른 하늘.

제브라드의 하늘의 쌍둥이 달님이 보고 싶었다.

‘모르달, 왜 모르달의 이름이 모르달인지 아나요?’

‘예? 의미가 있는 검니까요?’

‘그럼요. 모르샤, 아르달, 쌍둥이 달의 이름이에요. 순수와 믿음이라는 고대어죠.’

‘그럼 소인의 이름은 순수한 믿음이란 말씀이심까요?’

제브라드가 싱긋 웃었다.

‘아뇨. 모르달의 의미는 포용이에요.’

‘예? 그럼 달 이야기는…….’

‘그냥 모르달의 털이 하야니까, 저 쌍둥이 달을 보고 있으면 모르달이 생각나요.’

‘제브라드 님, 과음하신 거 아님까요?’

누가 들었다면 시답지 않은 대화겠지만, 모르달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술을 무척 좋아했던 자신의 주인, 제브라드. 그녀를 따라다니며 많은 신들을 만났다.

특히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제브라드의 하나뿐인 술친구라 할 정도로 자주 만났고, 그때마다 술판이 벌어졌다.

주(酒)신에 비해 술 빚는 실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안주만큼은 모르달이 전적으로 책임질 정도로 디오니소스가 탐내기도 했던 모르달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벌어진 술판이었다. 하지만 모르달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심부름과 요리, 뒤처리까지 모두 담당했던 그의 눈치이자 직감이었다.

물어볼 수는 없었다. 신들의 일이니까. 제브라드에게 귀여움을 받는다지만, 그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제브라드가 유난히 중간계를 많이 들여다본다 싶었을 때도. 그녀가 바빠 한참 술을 찾지 않을 때도. 아주 가끔 홀로 온 디오니소스가 제브라드의 소식을 전해 주더라도.

모르달은 괜찮았다. 그녀와 이어진 튼실한 기운은 아직 주인이 건재하다는 걸 알려 줬으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른 세계를 돌봐야 하거든. 모르달이 만들어 주는 안주를 못 먹게 된다니, 낙 하나가 사라져서 무척 아쉬워.’

‘아님다요, 디오니소스 님. 소인은 늘 이곳에 있으니 언제든 찾아 주심쑈!’

왠지 측은한 시선이 느껴진다 싶더니 디오니소스가 그에게 권유했다.

‘모르달, 나 따라가지 않을래?’

모르달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불쾌하지 않게 거절했다.

모르달에게 있어서 자신의 첫 주인이자 마지막 주인은 제브라드, 그녀뿐이니까.

그저 발에 치일 작은 영물을 거두어 주신 건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모르달은 꿋꿋이 제 일을 하며 기다렸다. 술을 빚고, 신선한 재료를 아공간 가득 채우고.

그의 집이자 그녀의 쉼터를 청소하고, 밤이 되면 떠오른 쌍둥이 달을 보며.

그렇게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제브라드가 다시 이곳을 찾은 건 1천 년이 지나서였다.

‘모르달, 해 줄 일이 있어요.’

모르달이 2,057살이었던 어느 날.

그렇게 도현을 만났다.

‘제브라드으으으!’

전 주인이 되었지만 그녀에게 적대감을 품은 현 주인, 도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화풀이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려니 했다.

이런 경험은 신들 사이에서도 익숙했으니까.

무엇보다 격이란 힘으로 벌레 터트리듯 자신을 짓이기던 신들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이 모든 게 튼튼한 몸과 지치지 않는 체력이라는 제브라드 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볼 토토 님이 생긴 것도 즐거웠다. 드넓은 농장을 누비며 몬스터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토토 님의 제작을 돕는 것도 보람찼다.

그리고 가끔이지만 제브라드 님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그의 큰 낙이었다.

그 큰 낙의 뒷감당으로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준다는 것.

그건 무척이나 생소하면서도 가슴이 간질거리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제브라드 님이 더 좋긴 했지만.

‘신성력 사용 허가 거부.’

무심한 목소리가 머리를 치는 동시에 가슴을 찔렀다.

2천 년 넘게 몸 일부였던 신성력이 그 한마디에 덧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뿐.

느껴 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해 잊었던 그 고통에 몸을 웅크렸다.

“가슴이… 너무, 너무 아픔다요.”

정처 없이 발 가는 대로 움직이던 모르달은 어느새 한강까지 달려와 출렁이는 한강 물을 보고 있었다.

유독 짧아진 밤은 물러가고 부지런해진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드문드문 풍덩거리는 소리가 수면에 들릴 때면 이름 모를 물고기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립다, 그때가.

언젠가 다시 찾아올 제브라드 님을 기다리며 술을 빚고, 맛있는 안주를 위해 신선한 재료를 찾아 돌아다닐 때가.

지금처럼 바쁘게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지금처럼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없더라도.

그래도, 그래도…

제브라드 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제브라드 님…….”

보고 싶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어? 모르달? 모르달이다!”

모르달은 뒤에서 와락 자신을 껴안는 감촉에 움찔했다.

“누, 누구심까요?”

“앗, 지, 진짜 모르달? 우와! 진짜 모르달이야!”

여자 목소리였다.

가볍게 들린 몸이 홱 돌려져 시선이 부딪쳤다.

중학생쯤의 여자아이였다.

모르달이 눈을 깜빡이니 여자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끙끙대든 말든 까르륵, 웃으며 얼굴을 비벼 대기 바빴다.

버둥대려던 모르달은 몸에 힘을 뺐다. 무심결에 휘저은 다리에 여자아이가 다칠 수 있으니까.

거기다 여긴 물가. 아이가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숨을 옥죄던 팔은 생각보다 금방 풀렸다.

“미안. 내가 모르달을 너무 좋아해서……. 처음에 인형인 줄 알았는데 진짜 모르달이라니! 아참, 그럼 우도현 헌터도 같이 왔어? 토토도?”

도현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아이의 눈이 너무 순수해서였다.

모르달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혼자 왔슴다요. 그런데 아씨는 누구심까요?”

“나? 진아. 김진아야. 중2, 15살!”

모르달의 머리가 갸우뚱했다.

“진아 아씨는 여긴 왜 왔슴까요? 학교 안 감니까요?”

“꺄아아… 아씨래! 진짜 아씨라고 불러 주는구나? 아, 너무 좋아! 너무 귀여워! 꺄……. 아, 이게 아니지. 으흠! 여기 집 앞 공원인데? 아직 꼭두새벽이야. 음, 학교는 모르겠다아아!”

“예? 모르겠단 말씀은 뭠……? 으헉!”

꼭 껴안고 다시 얼굴을 비비자 모르달은 참지 못하고 김진아를 살짝 밀어냈다.

다시 잔소리하려던 모르달은 헤, 하고 웃는 모습에 움찔했다.

전혀 닮지 않았지만 제브라드가 자신에게 보였던 웃음과 닮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모르달, 모르달! 모르달은 여기 왜 왔어? 혹시 근처 살아?”

“…뭐, 그런 것 같슴다요.”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헤에…….”

“왜, 왜 그러심까요?”

“꿈인가 싶어서. 매일매일 모르달을 실제로 만나 봤으면 좋겠다고 소원 빌었거든. 모르달 인형도 나올 때마다 다 샀고!”

‘인형? 인형 말임까요?’

예전에 얼핏 흘러가는 투로 임혜정 마님이 굿즈를 판다는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굿즈란 게 무엇인지 모르는 모르달은 그저 알겠다고만 했는데…….

‘그게 이검까요……?’

수익금을 주겠다고 해서 받은 카드가 아공간에 있긴 했다.

어색하고 부담스럽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싫지 않은데…….

뚫어져라 샅샅이 훑는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살짝살짝 소름이 돋았다.

“근데 역시 실물을 따라갈 순 없네! 이 부드러운 털 감촉도! 향기도 좋아아아!”

‘아아, 이대로 납치하고 싶어!’라고 소리치며 꽉 끌어안자 모르달은 방황하는 마음과 달리 얌전히 있었다.

이 포근한 품이 무척 낯설면서도 이대로 있고 싶은 모순적인 감정 때문이다.

조약돌 같은 토토의 손이, 자신의 머리만 한 토토의 몸이 안겨 온 적은 있어도 이렇게 폭 안겨 본 건 처음인 탓이다.

위안 아닌 위안을 느끼던 모르달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감았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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