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 신의 대리자 (1)
세자나스는 눈을 부스스 떴다.
익숙한 숲이었다. 자신이 양팔을 벌려도 절반을 안을 수 있을지 모르는 두꺼운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
그런 숲 사이로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과 작은 생물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셀다 숲의 끝과 끝을 몇 번이고 횡단할 수 있을 것 같은…….
“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셀다 숲에 있지 않았다.
하이엘프 아나헤타 님이 한 인간과 푸른 떡잎 일족의 터에 왔었고, 엘프 일족들 사이로 소문이 퍼지며 본격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과 누나는…….
“누나!”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세자나스는 몸이 휘청거렸다.
뭔가 예전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눈높이도 달라졌고, 앞으로 흘러내린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시야를 덮으려 했다.
“검… 은색?”
어색함에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다 손을 내려다봤다.
앙증맞게 꼬물거리던 그 작은 손이 아니었다.
늘 자신의 손을 꽉 잡아 주던 아버지의 손.
“아…….”
목소리도 달라졌다. 누나와 미세하게 차이 나던 목소리는 이제 더 낮아지고 남자답게 굵어졌다.
“성인식?”
그제야 모든 게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거대한 뱀. 누나가 물 덩어리에 갇혀 정신을 잃었고, 자신도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그게 성인식이라고?’
정확히 성인식이 무엇인지 알진 못하지만, 성인식을 거치면 100년 동안 멈춘 성장이 한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성인식이 끝나면 머리카락 색이 바뀌던가……?’
그건 아니다. 엘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금색 머리카락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오직 머리카락 색이 다른 건 하이엘프의 빛나는 백발밖에…….
“앗, 긴 머리 엘푸, 이더낫써?”
숲에서 툭 튀어나온 붉은 털의 원숭이의 맑은 초록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토… 토토?”
“세자나스 님, 일어났슴까요?”
마침 걸어온 모르달은 작은 팔로 생소한 열매들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마리나스 님은 도련님과 산책하고 계심다요. 곧 오실 때가……. 아, 저기 오심다요! 도련님, 마리나스 님! 세자나스 님 깨어나셨슴다요!”
사락사락,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의 주인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와락 자신을 껴안았다. 턱을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에 성인식의 설렘이 마음을 헝클었다.
“세자나스!”
그 어떤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보다 더 고운 목소리. 언젠가 성인식을 치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했던 누나의 목소리.
“누나.”
부름에 응답하듯 고개를 올려다봤다.
숲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는 녹음의 눈동자는 사라지고 신비로운 은빛의 영롱한 눈동자가 마주하며 웃었다.
짧은 머리는 그대로였지만 누나는 더 아름다워졌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누나의 손이 뻗어져 와 이마 위를 모은 네 손가락 끝으로 톡 쳤다.
“왜 세나만 큰 거야?”
못마땅함에 볼을 부풀렸다.
세자나스는 복잡했던 건 다 잊고 웃어 버렸다.
누나는 누나다.
“일어났네. 더 늦으면 그대로 보내야 하나 싶었는데.”
누나 뒤로 검은 머리의 사내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도현 님?”
“소감은?”
그 말을 듣자 세자나스는 어색하면서도 기쁜 미소가 입에 그러졌다.
무슨 말이 좋을까. 감사의 인사를 먼저 해야 할까?
생각이 많아 자신도 모르게 뜸을 들이다 입을 떼는데, 도현이 먼저 말했다.
“머리카락 색에 한바탕 난리 나겠네. 괜히 그놈한테 낚였어.”
세자나스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마리나스가 작게 웃었다.
“아흐라나. 그, 바다에 나타났던 드래곤 말이야.”
‘어? 잠깐. 그게 드래곤……!’
놀란 세자나스의 팔목을 도현이 잡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풍경이 바뀌었다.
처음 들어왔던 낯선 공간.
생김새는 다르지만, 자신과 누나인 마리나스가 함께 들어왔던 문이 보였다.
도현이 말했다.
“아슬아슬했네. 이만 가 봐.”
그가 손을 놓자 툭, 가볍게 미는 힘에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동시에 그 문이 열렸다.
끼이익―
천천히 열리는 문밖으로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옅은 레몬색의 짧은 머리, 하이든과 빛나는 백발의 아나헤타가 놀라 이곳을 보고 있었다.
“도현 님!”
하이든이 복잡한 얼굴로 도현을 봤다.
도현은 입술을 떼다 말고 미소 지었다.
하이든 옆의 하이엘프, 아나헤타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도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발을 완전히 떼지 않은 두 엘프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문밖으로 발이 떨어지자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멍한 시선의 마리나스와 달리 세자나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두 엘프를 보며 말했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건 없어.”
세자나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팔목에는 생소한 문양이 있었다.
낯익은 원숭이가 해맑게 웃는 모습이다.
허공에 허우적대는 손끝 앞, 닫히는 문 사이로 도현이 씩 웃고 있었다.
“그건 선물. 힘내라.”
달칵.
세자나스(엘프/진(眞)엘프)
150/남
푸른 떡잎 일족 수장→엘프 왕국 엘다움의 여왕의 검, 우도현의 세례를 받은 자, 진실을 꿰뚫는 자, 에놀드 아드노타의 라이트 오브 던(Light of Dawn)의 부관
능력치 (상세 보기 +)
특이 사항
1. 우도현의 세례로 성인식을 마쳐 진(眞)엘프로 진화합니다.
2. 엘프 왕국 엘다움의 여왕, 마리나스의 검으로 모든 엘프의 우상이 됩니다.
3. 우도현교 최초로 명예 대신관이 됩니다.
4. 에놀드 아드노타의 친위대 라이트 오브 던(Light of Dawn)의 부관(2위) 직위를 맡습니다.
5. 에놀드 아드노타와 함께 우도현교의 교리 창시·설파에 앞장섭니다.
마리나스(엘프/진(眞)엘프)
150/여
엘프 슬레이어→엘프 왕국 엘다움의 여왕, 엘프를 아우르는 자, 에놀드 아드노타의 라이트 오브 던(Light of Dawn)의 밝은 빛(4위)
능력치 (상세 보기 +)
특이 사항
1. 우도현의 세례로 성인식을 마쳐 진(眞) 엘프로 진화합니다.
2. 엘프 왕국 엘다움의 여왕. 5천 년 역사의 어머니가 됩니다.
3. 우도현교의 명예 신도가 됩니다.
4. 에놀드 아드노타의 친위대 라이트오브던(Light of Dawn)의 직위 밝은 빛(4위)을 맡습니다.
5. 에놀드 아드노타와 함께 우도현교의 교리를 설파합니다.
***
도현은 문이 닫히자마자 소파에 시체처럼 뻗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2시를 좀 넘긴 상태.
“피곤하네.”
머리가 무거웠다.
워프를 털어 버린 것보다 농장 운영과 엘프 꼬마들의 성인식 때문이었다.
“괜히 그 녀석이 나타나서는.”
절로 혀가 차졌다.
성인식이 무엇인지 예상은 되었다.
4대 속성의 조화.
하지만 엘프 사이에서 ‘불’의 속성을 다루는 자는 없다.
재앙이기 때문이다.
세자나스는 마리나스가 그저 규율을 따르지 않아 추방당할 거라 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는 불의 정령을 다루는 엘프.
그렇기에 재앙으로 여겨져 추방당하는 것이다.
아직 어린 엘프에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도현도 엘프가 싫었기에 몰랐지만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그런 이유 겸, 스트레스도 좀 풀어 줄까 싶어 농장에 온 것이었다.
방법은 몰라도 자신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 농장의 고대 뱀 아흐라나였다.
우연찮게도 토토가 먼저 바다로 이끌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지배자의 피가 필요합니다.」
‘왜?’
「차원의 매개체, 지배자의 피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물어볼 게 많아지는데.’
「지배자께선 아직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한마디가 아닌 팔목을 그어야 했다.
피의 5분의 1을 쏟아야 했다.
그 이유는 더 기가 찼다.
「지배자께서 절반의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최초로 세례를 내렸습니다!]
[새로운 종족 진화를 이끌어 냅니다!]
[신의 대리자 1 특수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신의 대리자 1
신은 만물의 어버이다.
그 숭고한 뜻의 이해부터 시작해 보자.
종족 진화:1회(2/1)
종족 창조:1회(0/1)
보상:커넥팅-콜
거기까지 회상한 도현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젠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제브라드는 자신을 신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을.
“명함만 신이지, 깡패랑 다를 바가 없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솟았지만, 당사자도 없는 마당에 무의미한 짓이었다.
거기에 오늘은 이미 대거리를 하지 않았나.
신 육성.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페론트와 제국을 만들고 평화가 시작될 때쯤, 도현은 처음으로 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제브라드에 떨어졌던 이유가 신 후보로 선택되어서였다.
개인 의사와 상관없이 행해진 차원 이동과 그로 인한 개고생.
당연히 좋은 감정이 남을 리 없다.
도현은 답이 정해진 선택지 자체를 거부했다. 동시에 제브라드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갔다.
물론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군 모든 이야기가 천천히 함몰되어 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홀로 고정된 채 모든 걸 지켜봐야 하는 벌.
말이 벌이지, 신의 입장에서는 길들이기였다.
그걸 악으로, 깡으로 450년을 버텼던 도현은 자폭을 결심했었다. 그러다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깽판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중간계는 5년째 전쟁이 이어져 황폐해진 상황이었고, 도현이 정리 아닌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탄생한 우도현교였고, 중간계에는 없는 차원 이동의 단서를 찾기 위해 천계와 마계까지 다 털어 버리자 신은 어쩔 수 없이 도현을 불러들였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온 건데.
한마디 없이 일단 떠맡겨 버리는 모습은 같은데, 목에 뭔가 모를 이물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 찜찜함과 답답함에 이야기라도 들어 보고 싶었지만 이젠 당사자도 없다.
‘태초의 신전에 대한 정보도 아직 없고…….’
뭐 하나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아, 모르겠다. 잠이나 좀…….”
쿠션을 끌어안고 베개 삼아 머리를 대는데, 소파 중앙 테이블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할 말 없구만. 그 짓을 저지르고도 늘어져 잔다니.”
워프에서 나타났던 은빛 눈, 복슬복슬한 은빛 털 고양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고양이를 보곤 한숨과 함께 쿠션에 얼굴을 파묻다 물었다.
“워프에서 살려 줬으면 됐지, 왜 왔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가 한숨… 뭐, 신이니 상관없나? 자신만 아니면 저게 신인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힘을 잘 숨기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늦추고 늦췄던 걸 너 때문에 다 망쳤지 않느냐!”
늦췄다고?
“알아듣게 말해.”
고양이, 아니 고양이 탈을 쓴 신이 하악질을 하듯 날카롭게 외쳤다.
“너 때문에 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고! 망할 우도현, 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