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비밀 (2)
“우도현.”
도현은 케이준 치킨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 반응은 가볍지 않았다.
“꺄아악!”
“아, 악마!”
“딱히… 엘프까지 그렇게 부를 이유는 없는데?”
엘프 꼬마 1의 눈엔 분노가, 꼬마 2의 눈엔 두려움이 서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제브라드에서 깽판은 쳤지만, 엘프를 건드렸던 일은 딱히 없었다.
딱 한 놈. 능글능글하게 잇속만 챙겨도 귀찮아서 뒀더니 결국 뒤통수를 쳤던 그 엘프만 좀 손봤을 뿐.
‘그러니까 그놈 이름이… 이자나스였나?’
마침 꼬마 1이 외쳤다.
“이유가 없어? 그런다고 죄가 사라지는 줄 아느냐! 아버지를, 우리 푸른 떡잎 일족이 힘겹게 모은 모든 재산을 털어 갔던 악마!”
“어? 아버지……?”
“그렇다! 이자나스 아론트가 내 아버지다!”
이렇게 자식까지 만나는 걸 보면 악연은 악연인가 보다.
도현은 너무 엘프다운 반응에 기가 차 헛웃음이 났다.
“야, 꼬마 1, 말하려면 똑바로 해. 내가 다 털어 간 게 아니라 내 걸 들고 튄 놈이 이자나스라고.”
“푸른 떡잎 일족의 수장이시자 엘프의 자랑이신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
허, 일족 이름처럼 떡잎이 참 푸르네.
쫑긋거리는 귀가 붉게 물들어 파르르 떨리는 게 꽤 화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뒤의 꼬마 2는 처진 귀만큼 움츠러들어 꼬마 1이 말할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게 꼭 볶이는 콩 같다만.
도현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네 뒤는 아닌 것 같은데.”
세자나스의 몸이 녹슨 태엽처럼 뒤로 돌아갔다.
그녀는 기가 죽은 듯 쭈그려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 같달까.
귀에 이어 얼굴까지 확 달아오른 세자나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마리나스! 무슨 짓이야! 똑바로 하지 못해!”
흠칫한 마리나스가 얼굴을 들었지만, 그렁그렁한 눈물은 전혀 말이 먹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치만, 그치만… 세자나스도 알잖아. 우리가 잘못…….”
“아니야! 엘프는 잘못 없다고! 설마 엘프가 엘프의 규율을 부정하는 거야?”
도현은 보다 못해 감상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고해성사는 사양이야.”
도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어어, 하는 사이 둘의 몸이 순식간에 날아 식탁 의자에 착석되었다.
도현이 세자나스에게 물었다.
“엘프의 규율이 뭐지?”
“내가 말할 것 같아! 긍지 높은 푸른 떡잎 일족……!”
“그래, 너 될성부른 떡잎인 거 알겠고, 규율 좀 말해 보라고.”
세자나스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당장에라도 도현을 찌르기 위해 치켜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제약에 걸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이……! 악마! 당장 풀지 못해!”
도현은 방긋 웃으며 포크로 케이준 치킨을 찍어 들어 보였다.
“말 안 하면 고기 먹여 버린다?”
세자나스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파랗게 질려 고개를 홱홱 저었다.
먹으면 죽는 것도 아니면서.
절대 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 이상한 엘프 놈들.
이놈들은 조리한 것도 안 먹는다.
그래서 정령과 활을 다루지만 불의 정령을 다루는 엘프는 없다.
말 그대로 날것. 자연이 나누어 준 것만 먹는데, 그게 대부분 잎이나 꽃봉오리, 열매 정도다.
가끔 부족한 염분 때문에 암염을 먹기도 한다지만, 그게 이자나스 입에서 나온 말이다 보니 진실이라 해도 썩 믿음이 안 갔다.
그건 그렇고.
도현이 세자나스를 한 번 더 협박하려는데,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마리나스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마리나스는 도현의 손에 들린 포크에 시선이 고정된 채 개미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맛있나요……?”
세자나스의 낯빛이 하얗게 탈색되든 말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지. 이래 봬도 고급 재료니까. 먹어 볼래?”
진담과 농담을 섞어 포크를 건네자 그녀는 홀린 듯 받아 들었다.
“이 멍청이! 넌 엘프라고!”
옆에서 뭐라 부르짖든 말든 마리나스는 아무렇지 않게 입에 넣어 씹었다.
바사사삭!
“아……!”
얼굴은 이미 케이준 치킨에 넋이 나갔다. 입만 열심히 오물거렸다.
잠깐 사이에 꿀꺽 삼킨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마, 맛있어요!”
처졌던 귀가 쫑긋해지더니 파르르, 정령의 날갯짓처럼 흥겹게 떨어 댔다.
이 상황에 전혀 녹아들지 못한 세자나스의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세차게 흔들렸다.
“에, 엘프가… 고기를……. 미쳤어!”
도현은 일부러 보란 듯이 그릇을 마리나스 가까이 밀었다.
그녀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도현표 케이준 치킨 샐러드에 타이탄 레인보우 샐러드를 들이부어 섞기 시작했다.
그러곤 자신 앞에 놓인 깊고 넓은 숟가락과 포크를 양손에 익숙하게 쥐고 순식간에 클리어했다.
뒤를 이어 하리오카 잎과 이번에 처음 본 하리오카 새순, 마치 두릅처럼 생겼는데 살짝 마법을 가해 데치듯 내놓은 것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거기에 대충 뜯어 왔더니 열매처럼 섞여 버린 작은 스네일까지 흡입하고, 하리오카 열매 한 통도 먹어치우고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토했다.
식탁의 모든 접시를 싹싹 비우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세자나스는 세상이 멸망한 얼굴로 멍하니 배를 두드리는 마리나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도현에게 말했다.
“정말, 정말 맛있어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식사는 처음이에요!”
해맑게, 한 점의 거짓 없이 말하는 눈동자는 토토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예뻤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걸렸다.
“이걸로 만족한다니. 더 맛있는 게 있는데.”
“네에? 뭐예요? 뭐예요? 먹고 싶어요!”
아, 이 맛에 아빠들이 딸바보가 된다는 건가?
도현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인벤토리에서 두리안, 아니 후룰루타의 열매를 꺼냈다.
그을린 나무 냄새에 두 엘프가 당황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반으로 갈라 수박처럼 잘게 쪼개 빈 그릇에 담았다.
거실을 가득 채우다 못해 코가 절어 버릴 것 같은 다디단 향.
도현은 그 단맛에 절로 고개가 저어졌지만, 마리나스는 권하기도 전에 한 조각을 손에 쥐고 베어 먹었다.
“와- 아!”
투명하고 뽀얀 뺨이 붉게 물든 채 활짝 웃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났다.
저런 딸이라면…….
‘아니, 아직 창창한데 무슨 딸이야.’
아쉬움과 살짝 기분 나쁜 묘한 감정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노인처럼 웃었다.
친우였던 페론드의 자식들도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았었는데.
어렸을 적, 아빠가 여동생 있으면 좋지 않겠냐며 꼬드겼을 때도 혼자가 좋다고 무시했었는데.
조금 미안해졌다.
‘뭐… 지금도 늦지는…….’
“앗!”
마리나스의 웃음에 긴장이 풀린 건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의 탄성에 고개를 들어 보니 세자나스가 후룰루타 열매를 양손에 쥐고 정신없이 흡입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행동을 멈췄다.
“다… 다 먹어 버렸어…….”
막 두 번째 조각을 손에 든 마리나스가 울상을 지었다.
“아나헤타 님을 엘프 여왕으로 추대하는 저희 아버지, 이자나스파와 반대하는 리바트파로 나뉘어 거세게 부딪치는 중입니다.”
세자나스는 까망베르 치즈를 얹은 하리오카 열매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우물거리며 말했다.
하리오카 열매만 20개째. 희한하게도 단 걸 좋아하는 세자나스는 후룰루타 열매를 시작으로 순순히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벌써 치렀어야 할 성인식도 넘긴 채 숲에서 나와 아도노스 제국에서 생활하게 됐다고?”
“네에. 그래도 아나헤타 님과 하이든 님께서 계신 곳이라서 잘 대해 주세요.”
막 후룰루타 열매 하나를 먹어 치운 마리나스가 즐겁게 대답했다.
아나헤타.
하이든이 구출했던 이종족들 중 제일 강했던 엘프. 그것도 하이엘프다.
‘하이엘프라…….’
엘프의 왕족이라 할 수 있는 하이엘프.
도현이 제브라드에 떨어지기 전인 1천 년 전쯤 엘프 왕국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이자나스가 했었다.
그 후로 가장 강한 엘프가 수장을 맡는데, 무력이 아닌 재물의 힘이 가장 강한 사람이 추대된다는 말도 했었다.
그렇게 각기 일족으로 찢어진 엘프들은 수장, 일족의 대표를 정하며 정착한 지 1,800년.
하이든으로 인해 하이엘프가 드러났고 엘프들이 부딪쳤다는 건데.
“하필 그 하이엘프가 왕의 자리를 거절했다는 거지?”
“맞습니다.”
세자나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심드렁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왜 너희들끼리 난리야?”
세자나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엘프의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좀 누그러졌다 싶더니 또 저런다.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도현은 입맛을 쩝 다셨다.
딱히 궁금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입을 다물면 괜히 더 듣고 싶어지잖아.
‘음, 단 거. 단 게 뭐가 있더라?’
문득 헌터 협회 뷔페에서 아바가 먹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떠올랐다.
‘집 근처에 베이커리 가게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건…….”
세자나스는 치워진 식탁을 다시 가득 채운 케이크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현은 친절히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을 접시에 올려 두 엘프 앞에 놓았다.
마리나스는 몰라도 거부할 줄 알았던 세자나스가 기다렸다는 듯 자동으로 포크를 쥐고 퍼먹었다.
이어서 도현은 익숙하게 드워프에게 선보였던 이중 진공 유리잔을 꺼내 얼음을 채우고, 사이다를 부은 뒤 레몬을 반으로 갈라 쭉 짜 넣었다.
빨대를 꽂고 새로운 레몬을 슬라이스 해서 컵 주둥이에 장식해 둘에게 건넸더니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하이엘프는 핏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엘프죠.”
“엘프의 수명은 1천 년이지만, 하이엘프는 2천 년을 살아요. 하이엘프가 수명을 다할 때쯤 새로운 하이엘프가 태어나요.”
둘은 동족에게 말해 주듯 엘프의 비밀을 속속들이 말했다.
‘내가 제브라드에 있던 시간이 500년. 돌아오고 150년쯤. 엘프 왕국이 사라진 건 1천 년 전. 아나헤타 나이는 얼추 1,700살 이상인가?’
삶의 막바지니 왕위를 거절할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새 하이엘프를 추대하면 되잖아?”
머리도 좋은 것들이 별것 아닌 일로 싸우는 걸 보니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다 싶었다.
시무룩한 마리나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새로운 왕이 언제 태어날지 몰라요.”
“길어 봤자 300년이잖아? 여태 왕 없이도 잘 살았고.”
“아빠 말씀은, 제국이 우호적일 때 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그저 한 나라가 아닌 제국이니까. 그 제국의 검이라 할 수 있는 하이든이 반려니까.
‘이참에 기반을 다지고 새로 태어날 하이엘프로 제2의 엘프 왕국을 꿈꾸는 거군.’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지난 역사를 보면 300년을 넘기기 힘들었으니, 놓치기엔 정말 아까운 기회이긴 했다.
“골치 아프네.”
엘프들의 일이라고 하지만, 신혼여행이 끝나기 무섭게 치이고 있을 하이든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이 어린 두 엘프도.
갑갑해서 저택을 돌아다니다 나타난 문을 호기심에 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잠깐 숨통이라도 틔워 줄까.
“가자, 스트레스 풀러.”
머리를 갸우뚱하며 마리나스가 물었다.
“스트레스요?”
도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어. 나쁘지 않을 거야.”
얼떨떨해하는 두 엘프에게 양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