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14.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비밀 (1)
끼이익-
소파에 드러눕다 못해 녹아들려던 도현은 익숙한 마찰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방문자를 보고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황금색의 머리카락.
귓바퀴가 뾰족한 길쭉한 귀.
웬만한 연예인들도 씹어 먹을 비주얼의 이종족.
엘프.
조심스럽게 들어온 2명의 엘프는 거실을 살피다 소파에 앉은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인간?”
“인간이야?”
쫑긋한 귀가 까딱까딱, 놀란 감정을 대변했다.
복사, 붙여 넣기를 한 것처럼 똑 닮은 엘프 남녀.
숏 컷 쪽보다 매직 펌이라도 한 듯 쭉 뻗은 긴 장발 쪽이 미세하게 선이 굵고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이란성 쌍둥이일까?
쌍둥이 엘프?
엘프의 수명은 1천 년. 긴 세월을 살지만, 자식은 많이 낳아도 하나가 다였다.
그렇기에 어린 엘프는 드래곤의 헤츨링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
도현은 잠깐 고민해 봤지만 금방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은 종족도 아니고.
얻을 정보가 없었다면 방문자 처음으로 찬밥 신세였을지도 모른다.
숲의 가호가 아니라 재물의 가호를 받는 게 아닐까 싶은 엘프들은 웬만해서는 해를 입는 일이 없으니까.
‘그만큼 치고 빠지는 걸 잘하는 영특한 놈들이란 소리지만.’
도현은 불쾌한 기억에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어쨌든 적절한 상황에 와 줘서 좋긴 한데…….’
마침 농장 사업 계획을 마무리하고 온 터라 민혁과 아바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토토와 모르달, 오제아는 한동안 농장에 머물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혼자 집에 있게 된 상황이랄까.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거기에,
“인간? 여긴 어디지? 묘하게 공기가 다른데?”
긴 머리 엘프가 경계의 빛을 띠었다.
제 딴엔 무게 잡고 있지만 말하는 폼이 영 어설프다.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한데?
숲의 종족. 몸에 걸치는 옷은 가죽나무라 부르는 질긴 섬유를 열매로 염색해 입는데, 두 엘프가 입은 건 익숙한 귀족 자제의 고급 옷이었다.
거기에 체구가 무척 작았다.
어린아이의 느낌.
‘설마 성인식도 안 끝낸 엘프?’
도현의 얼굴에 박혔던 짜증스러움이 순식간에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성인식을 아직 못한 엘프라는 건 150살이 안 된다는 것.
그렇단 말은, 머리만 좋은 4살짜리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아, 그러면 정보는……?’
숲에서 각별한 보호를 받는 놈들이니 세상 굴러가는 걸 알 턱이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짜증이 치밀었다.
이거 3시간 동안 꼼짝없이 육아해야 할지도……?
“하아…….”
도현은 제브라드에서 헤츨링을 돌봤을 때가 떠올랐다.
신세 지는 겸 별일 아니라고, 밥만 제때 챙겨 주면 된다더니 호기심은 하늘을 뚫고 치솟을 정도로 높았고, 움직였다 하면 모든 게 사고에, 조금만 소홀해져도 빽빽 울어 대던 미친 헬모드.
‘그때 처음으로 모든 어머니를 존경하게 되었지.’
헤츨링을 맡기자마자 제브라드 대륙 반대편으로 텔레포트 하던 부모 드래곤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였다.
그래서 두 번째 유희에 질질 끌고 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시켜 버렸지만.
어쨌든 끝이 없었던 육아를 생각만 해도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려 절로 얼굴이 구겨지자, 두 엘프는 흠칫하더니 오히려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엘프가 그래봤자 헤츨링 한 끼 식사 준비보다 우습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와 버렸다.
긴 머리, 사내 쪽이 도현을 차갑게 쏘아봤다.
“무례하다! 고작 인간 주제에, 작위라도 있는 놈인가? 행색을 보아선 노예 같다만?”
“세자나스, 실례야!”
오만하게 깔보는 눈과 굳힌 얼굴, 어디서 샘솟는지 모를 자신감이 가득 찬 모습까지. 더할 나위 없는 귀족 자제의 면모였다.
도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엘프 하면 역시 싸가지 없기로 소문난 종족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지 않나.
오히려 숏컷 엘프가 신선했다.
당황해서 동족을 말리다니.
도현은 또 웃어 버렸다.
“누가 보면 저가 작위라도 있는 줄 알겠네. 엘프 꼬마 1, 2, 성인식 전에 인간 세상에 나와도 되냐?”
둘은 정곡을 찔린 듯 크게 움찔거렸다.
숏 컷, 꼬마 2는 하얗게 질린 모습이 톡 건들기만 해도 기절하기 직전이다.
긴 머리, 이름을 들었지만 귀찮으니 꼬마 1.
꼬마 1이 당황한 걸 숨기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래봤자 붉어진 얼굴은 안 가려지는데.
그게 더 웃겼지만, 이제 좀 제 나이에 맞는 모습이었다.
“너, 넌 누구지? 엘프에 대해 아는 인간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 서, 설마 반대파 세력? 저택에 몰래 숨어들어 문을 설치해 둔 것이냐!”
고작 150살도 안 된 놈이 뭘 다 알아? 그리고 문은 너네 세상 신이 만든 거라고.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새로운 정보였다.
‘반대파라… 엘프끼리 전쟁이라도 났나?’
돈 많고 계산만 확실하면 당일부터 죽마고우란 말을 잘도 떠벌리는 놈들이지만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엘프라면 설사 마왕을 소환했다 하더라도 잘못 없다며 우겨 댈 정도로 똘똘 뭉친 놈들이 저들끼리 전쟁이라고?
도현은 시선을 꼬마 2에게 옮겼다.
감정 변화가 바로 드러나니 뭐라도 쉽게 불 것 같아서다.
“꼬마 2, 엘프끼리 전쟁이라도 하냐?”
“다, 당신은 누구……. 아니, 무, 무엄하다! 너, 너는 누구냐!”
…은근 귀여운데?
토토와 다른 매력이 있다.
엘프치곤 너무 맹해서 그런가?
아니, 이게 아니지.
화가 났을 때는 단 게 좋다던가?
‘그럼, 뭐든 먹는 게 남는 거지.’
순진한 아이를 꾀는 나쁜 어른 같지만, 일단 맛있는 거라도 먹고 시작해 볼까.
농장이 처음 생긴 후 심었던 하리오카 나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엘프들이 참 좋아하겠다고.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지만, 풀떼기밖에 안 먹는 놈들이 입맛도 까다롭다.
‘그래도 농장 먹거리는 거부 못할 거다.’
“밥 먹을래?”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 모였다.
그런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현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
“먹어 봐.”
이내 도현은 농장에서 풀떼기들을 들고 왔다.
새로운 워프핵을 농장 땅 전체에 뿌려서 그런지 새로운 식물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아직 확인도 못했으니 제쳐 두고, 아는 한에서 손 닿는 대로 뜯어 오니 이것도 무시 못할 양이었다.
“이게 뭔가요?”
꼬마 2의 물음이었다.
꼬마 1은 식탁 의자에 앉아서도 팔짱을 낀 채 노골적으로 도현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꼬마 2는 불안해하면서도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꼬마 2가 가리킨 잎은 타이탄 레인보우의 잔잎사귀와 꽃봉오리,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알알이 담긴 알록달록한 열매였다.
오목한 접시에 잎사귀를 깔고, 그 위에 잔잎사귀를 놓고 꽃봉오리와 열매를 함께 올렸을 뿐인데도 타이탄 레인보우 자체의 색이 화려하니 시선을 끄는 건 당연했다.
“보다시피 타이탄 레인보우……. 아, 이러면 못 알아들으려나. 크고 알록달록한 꽃의 잎, 꽃, 열매야. 꽃봉오리는 말려서 차로 마셔 봤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꽤 맛있었지.”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 우렁차게 들렸다.
쫑긋한 귀가 느릿하게 까딱이는 걸 보니 당장에라도 먹고 싶지만 꼬마 1의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4등급 워프의 몬스터 꽃이라지만, 농장에 있어서인지 부쩍 잘 자랐다. 그만큼 품은 마나 농도도 짙으니 풍미도 깊고 맛도 좋다.
그렇지 않아도 마나에 예민한 엘프가 그걸 모를 리 없지.
결국 유혹에 져 버린 꼬마 2가 손을 뻗기 무섭게 꼬마 1의 손이 날아와 꼬마 2의 손등을 쳐 냈다.
“아얏! 세자나스, 왜 그러는 거야!”
“멍청이! 독이 들었을지 누가 알아? 더군다나 인간이라고! 누난 인간을 믿어?”
듣는 인간 기분 나쁜데.
역시 꼬마 1은 전형적인 엘프다. 확실히 기가 죽은 꼬마 2가 특이했다.
움츠러든 꼬마 2는 귀까지 처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봐선 한두 번 있던 일 같진 않은데.
‘그보다 누나라?’
꼬마 1이 첫째가 아닐까 했더니.
도현은 서슴없이 그릇에 든 타이탄 레인보우의 잎과 꽃봉오리, 열매를 한 움큼 쥐어 먹었다.
꼬마 1, 2의 놀란 시선이 도현에게 모였다.
이 사이로 아삭거리는 식감이 느껴지기 무섭게 꽃봉오리와 열매의 새콤달콤한 맛이 한데 어우러졌다.
마치 빨갛게 익은 석류를 베어 먹은 느낌.
그러면서도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에 샐러드가 연상되었다.
큐브 형태의 치즈나 강판에 갈아 먹는 경성 치즈를 얹어 먹어도 맛있을 듯했다.
‘음, 거기에 튀긴 순살 치킨까지 넣으면 케이준 치킨 샐러드인가?’
드문드문 생각나지만 집에서 해 먹긴 귀찮은 메뉴. 그래도 인기가 있어서인지 웹에서도 자주 보이던 레시피의 주인공이다.
‘생각난 김에 해 봐야지.’
마침 쓸었던 워프핵 중 닭을 빼다 박은 몬스터도 있었으니 고기는 그걸로 대처해도 될 것 같았다.
멍하니 있는 두 엘프를 두고 벌떡 일어나자 꼬마 1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꼬마 2를 데리고 멀찍이 물러나서 어디서 꺼냈는지 활을 매긴 채 도현을 경계했다.
앙칼진 고양이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워프에서 만났던 은빛 고양이가 다시 보자 했었지.’
워프 털기를 멈춰 달라던 그놈을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했었다.
모든 공격을 피하더니 나중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신 하나를 놓친 건 아쉬운 일이지만,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달까.
아무튼 홧김에 워프를 쓸어버린 거지만, 먼저 건드린 건 협회와 국가다.
비대한 덩치로 찍어 누르면 굽실거릴 거라 생각하는 이 세상이 썩어 빠진 거지.
“쯧.”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와 입술을 비틀던 도현은 당장에라도 활시위를 놓으려는 꼬마 1을 보고 말했다.
“먹고 있어.”
뜬금없는 말에 놀랐는지 활시위를 놓을 뻔했지만, 뭐 헤츨링의 잠꼬대 뒷발차기보단 간지러운 수준이니 애교 정도로 봐줄까.
다시 1분도 안 돼 농장에서 돌아온 도현은 도축을 끝낸 리리카코의 넓적다리 살 한 덩어리를 엄지 두께,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끊었다.
닭은 염지가 중요하다 했으니 우유에 식초, 마늘가루, 소금, 후추를 섞어 썬 고깃덩이를 담갔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니 시간 가속은 필수.
그사이 두꺼운 궁중 팬에 기름을 반 정도 채우고 튀김옷을 준비했다.
부침가루, 달걀 물, 빵가루.
취향에 맞춰 빵가루는 습식으로.
순식간에 염지 된 고기를 꺼내 능숙하게 부침가루를 묻히고 달걀 물에 담가 충분히 적신 뒤 빵가루에 깊숙이 넣어 꾹꾹 눌렀다.
그렇게 해서 건진 고기를 막 데워진 기름에 넣자 드럼만큼 경쾌한 리듬을 타며 구워졌다.
그렇게 20번을 반복해 1차로 튀긴 닭튀김을 건져 키친타월을 깐 채에 잠시 식혀 두고 다시 치킨을 튀겼다.
3번쯤 튀겼을 때 기름을 새로 갈고 처음 튀겼던 닭튀김을 다시 튀기자 노릇노릇한 닭튀김이 완성되었다.
모든 작업을 끝내기 무섭게 토토표 세숫대야… 아니, 그릇을 꺼냈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타이탄 레인보우의 잎과 꽃봉오리, 열매를 흐르는 물에 씻어 그 그릇에 넣었다.
위생 장갑을 끼고 열매의 3분의 1만 양손으로 잘 으깨 소스처럼 뿌렸다.
“아, 치즈가 빠졌네.”
냉장고를 열어 슬라이스 치즈를 꺼내 대충 쭉쭉 찢어 넣고 섞었다.
그렇게 완성된 케이준 치킨 샐러드.
닭튀김만 아니면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아니지만 양이 많아서일까? 1시간은 걸렸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식탁 의자에 앉은 도현이 포크로 샐러드와 튀김을 찍어 우물거리자 거실 쪽에서 한숨이 들렸다. 엘프 꼬마 1이었다.
자신이 요리하는 내 활시위를 놓지 않은 건지 막 아래로 떨어진 팔은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꼬마 1은 활이 사라진 빈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