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11화 (111/200)

# 111

111. 깽판 (6)

“헌터 캠은?”

“여기.”

민혁이 재킷 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 인벤토리를 주로 이용하는 두 사람에게는 그 모습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민혁 씨 인벤토리 없다고 했었죠?”

“하핫, 벌어서 큰 거로 구매하려고요.”

아바는 목적 때문에 민혁을 이용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잠깐 사이 결심한 그녀는 자신의 소매를 걷어 왼팔을 보였다.

민혁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건들기만 해도 똑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팔. 투명하면서도 뽀얀 피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기에는 멋스럽게 그려진 물결과 붉은 달이 어우러진 타투가 있었다.

“요즘 이런 형태의 공간도 나와요. 헌팅 끝나면 하나 구해 줄게요.”

“아- 니에요! 제가 사면 됩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토마토가 되어 버린 얼굴을 홱홱 휘젓는 민혁을 보던 도현은 아바의 타투를 눈여겨봤다.

“오, 괜찮네.”

화색이 돈 아바가 한술 더 떴다.

“그렇죠? 좀 비싸고 공간도 그렇게 넓지 않지만, 휴대하긴 정말 최고죠.”

“비싸고 좁다고?”

“50억쯤요? 크기는 1평 크기의 정육각형이 다예요. 제한도 있어요. 무생물만 가능하고, 무게는 300킬로그램까지만 돼요.”

“뭐야, 그게. 그걸 어디에 써?”

인벤토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제한이란 걸 겪어 본 적 없던 도현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허술한 게 50억이나 한다니.’

적어도 자신의 인벤토리는 저 공간이란 것보다 10배는 컸다.

그것도 부족했던 그는 드래곤의 경지라는 10서클 마법을 습득한 뒤 맨 처음 한 일이 인벤토리 늘리기였다.

짐 덩이를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한으로 확장한 인벤토리는 세면도구부터 인어 워프에 보였던 집까지 정말 다양하게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집에 돌아온 뒤, 워프에서 수집한 몬스터 사체도 어마어마했다.

어제 축제의 중심이 되었던 고래, 오르오타의 사체 또한 도현의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아바가 어깨를 으쓱였다.

“기술자 마음이죠. 이보다 큰 건 백팩만 있어요.”

“쯧. 세상이 변해 봤자네.”

5년이 흘렀지만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제브라드와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구에 비해 문명의 발전이 느리다지만, 자신의 생명을 찬란하게 태우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구는 너무 발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특성을 가진 이들이 없는 걸까.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무엇이든 미적지근했다.

‘뭐, 어쨌든.’

민혁에게 아공간 주머니를 주려고 했다가 매번 까먹었던 도현은 주머니란 틀에서 벗어나 보기로 했다.

“민혁아, 팔 좀 내밀어 봐.”

“이렇게?”

도현이 헌터 웨어 위, 왼쪽 팔뚝을 잡고 말했다.

“좋아하는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려.”

‘좋아하는 거?’

순간 그 말이 스위치라도 된 듯 아바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 다시 붉어지던 민혁은 팔뚝에 닿는 시원함에 자신이 생각한 걸 잊어버렸다.

“재킷 벗고 확인해 봐.”

“어? 어.”

주섬주섬 왼팔을 빼는 민혁을 뒤로하고 아바에게 다가갔다.

“타투 내밀어 봐.”

군말 없이 내민 팔에 도현은 검지를 올렸다. 민혁처럼 시원한 느낌이 든다 싶더니 도현이 손을 뗐다.

“확인해 봐.”

눈을 끔뻑이던 아바는 공간을 열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몇 번이나 공간을 확인한 아바는 눈을 반짝이다 못해 신이 나 어깨가 들썩거렸다.

“크기가 무한대……? 무게도 없고, 넣어 둔 물건들이 다 따로 정리되어 있어요! 와,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당연한 거야. 아무렇게나 던져 놔도 손 넣을 때 생각만 하면 손에 잡혀. 그리고 넣는 건 뭐든 가능해.”

당장 확인해 본 아바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러다 뒤돌아서 움츠리고 있는 민혁을 불렀다.

“민혁 씨, 민혁는 어때요? 공간 생겼어요?”

“예, 예, 옙! 하, 하하! 정, 말, 좋, 네요!”

소스라치게 놀란 민혁이 서둘러 옷을 추슬렀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과 계속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게 의아했지만, 도현이 불러 물어볼 순 없었다.

“둘이서 할 일은.”

도현이 숲을 가리켰다.

독특한 청록빛 숲. 들어올 때부터 나뭇잎에 몸을 숨기고 슬쩍슬쩍 훔쳐보는 청록빛 머리카락의 2등신 정령들. 그리고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나무를 씹어 먹는 하얀 애벌레들.

통통하다 못해 뚱뚱해 보이는 이 애벌레의 몸길이는 1미터를 넘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비주얼이지만, 그나마 하얘서 조금은 거부감이 희석되는 느낌이랄까.

저렇게 먹고, 잠을 잘 때면 엉덩이에서 실을 뿜어 몸을 감싼다.

실제로 나무 사이로 언뜻 하얀 고치들이 보이긴 했다.

보기만 해도 진저리 쳐지는 아바는 몸을 작게 떨다 흠칫했다.

‘설마…….’

도현이 확인 사살 하듯 말했다.

“저걸 농장에 옮길 거야.”

“…전부요?”

“어. 대충 아무 데나 던져 둬. 알아서 클 테니까.”

꿈틀대는 걸 혐오하는 아바는 질린 얼굴로 양 팔뚝을 쓸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처음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 아바의 마음을 절대 알 리 없는 도현은 멍하니 서 있는 두 사람을 재촉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

“혀, 현아!”

땅을 박차고 가려던 도현이 민혁을 봤다.

“왜?”

“어디 가는데?”

“워프핵 찾으러. 왜?”

“어… 아, 아냐. 하하, 둘이 하기엔 너무 넓어서……?”

붉다 못해 토토와 형제라 해도 믿을 얼굴이었다.

저 정도면 누가 봐도 눈치챌 것 같은데.

아바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녀가 정말 둔해서, 그래서 모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도현은 픽 웃었다.

“굳이 붙어서 할 필요는 없지. 서로 반대쪽 끝에서 시작해.”

사라진 도현이 솔로몬의 지혜를 내려준 덕에 민혁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본 아바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자 숲에서 메아리가 울렸다.

“빨리 움직여. 30분 준다!”

동시에 두 사람은 각각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정확히 30분 만에 작업을 끝낸 세 사람은 워프 입구이자 출구 앞에 모였다.

진노란색의 작은 수정을 던졌다 받았다 하는 도현이 땅에 대자로 뻗어 헥헥거리는 민혁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 빨리 다음 워프 가야지. 토토랑 모르달에게 질 셈이야?”

어느 쪽이 먼저 끝낼지 저녁 내기를 한 상태였다.

물론 농장에 흐르는 시간이 느린 데다, 어디든 던져 놓기만 하면 돼서 두 펫이 이길 확률이 높았지만.

“혀, 현아… 나 좀 살려 줘…….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뭐, 얼마나 했다고 그래? 평생 찌끄레기 줍겠다던 신입 팀원 포부는 어디 갔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워프가 얼마나 넓은데! 정말 박박 긁었다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워프 세계를 이 잡듯 뒤엎었으니 진이 빠질 만도 했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아바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 그대로 워프를 박박 긁었으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 워프에 가득했던 나무나 애벌레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허허벌판인 땅이 전부.

이마저도 도현이 쥔 워프핵을 들고 나가면 끝이다.

워프는 사라지지 않지만, 아무것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도현이 혀를 찼다.

“사내새끼가 그렇게 허약해서는.”

‘허약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강한 거라고오오오!’

민혁은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바보다 자신이 약하다는 게 자존심 상했기 때문.

물론 아바가 더 강하지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논리 없는 자존심 세우기야 당연하다.

민혁이 일어날 생각을 않자 도현은 민혁의 한쪽 다리를 잡고 워프를 풀쩍 넘었다.

한 박자 늦게 아바가 워프에서 나왔다.

워프 앞은 사람들과 리포터, 기자로 가득했다.

1년 365일 쉼 없이 돌아가던 워프 공장이 처음으로 멈췄다.

일해야 돈을 받는 노동자들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안개에 뒤덮인 워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인터뷰에 열을 올리는 기자와 리포터들로 시끌벅적했다.

모습과 기척을 완전히 지운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도현이 손을 튕기자 세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워프를 막았던 안개가 천천히 개었다.

***

“안 해! 아니, 못해! 더는 죽을 것 같아! 차라리 나를 주겨어어어…….”

120번째 워프에 입장하기 무섭게 민혁은 땅에 드러누워 파업을 주장했다.

10개째 워프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30개째 워프를 겨우 끝내고 결국 배 속에 든 게 뭔지 확인했다.

53개째 워프까지 끝내자 좀비가 무엇인지, 새로운 종족의 특성을 깨우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음을 알자 도현은 회복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받은 게 많아 ‘그래, 빨리 끝내자. 은혜 갚아야지!’ 했던 마음은 워프 70개를 넘어가자 쓰레기통에 처넣었고, 80개가 넘어가자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세상이 뒤집혀 군대는 가지 않았지만, 차라리 군대가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

95개가 넘어가자 제발 그만하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120개. 결국 민혁은 드러누웠다.

‘이건 빡센 게 아니라 사람 죽이는 일이라고!’

처음에는 1시간 걸리던 일이 속도가 붙어 점점 줄더니 100개쯤엔 3분 컷.

말 그대로 토가 나오다 못해 계속해 대는 헛구역질이 더 시간을 잡아먹을 정도였다.

끝없는 작업에 몸도, 정신도 정상이 아니다. 피폐해지다 못해 파괴될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유라도 제대로 알면 의욕이라도 날 텐데.’

도현이 빡친 이유는 알고 있다.

우리 팀만 3등급 워프 12개를 배정했고, 그걸 한 달에 걸쳐 파괴하란 건데 전부 몬스터 워프란다.

생산 워프에 비해 몬스터 워프가 강하다.

‘아니, 생산 워프가 비정상적으로 약한 거지만…….’

아바 씨가 가르쳐 줘서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런 워프가 한 주 간격으로 두 개씩 2주기의 날을 맞이한다는데, 그렇게 되면 1등급 워프가 되는 셈.

3급 헌터 다섯을 한 팀으로 꾸려야 겨우 2일 안에 끝낼 헌팅을, 인력 부족으로 3급 헌터 둘에 셋을 아래 등급으로 꾸리게 되면 2배 이상 걸린단다.

일반적인 3급 헌터였다면 2주에 한 번은 1등급 워프를 만나야 하는데…….

반발하지 않는 헌터가 미친 거지.

오직 도현의 능력을 믿고 떠맡긴 거다.

도현 역시 대수롭지 않으니까 말하지 않았던 거고.

‘그래도 최소한 한마디는 했어야지.’

그 이유로 전화한 줄 알았더니…….

‘적반하장이었지.’

멍청한 머리지만 4년째 일용직에서 일했더니 이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홧김에, 은혜 갚은 까치가 되기 위해 나서긴 했지만 도현의 본심을 듣진 못했다.

그래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강짜를 부리는 건데,

좀 늦은 감이 있는 듯했다.

‘왜 말이 없는 거야?’

너무 조용했다. 그저 들리는 소리는 몬스터의 울음소리. 습한 공기와 축축한 땅이 등에 콕콕 박혔다.

돌바닥. 그렇다는 건 동굴이란 소린데…….

들어오자마자 눈을 감고 드러누웠더니 상황도 모른 채였다.

민혁은 찡그렸던 눈 한쪽을 슬며시 떠 상황을 살피려 했다.

강해졌다는 게 가장 크게 와 닿은 건 어둠에서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도 놀랐지만, 지금은 정말 대낮같이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뭐, 색이야 흑백이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도현은 피식 웃기만 했다.

‘화 안 내네?’

도현의 입에서 영혼 없는 다독임이 나왔다.

“이번 워프는 5등급이잖아. 3등급보다 작아.”

작다는 말에 솔깃했다.

“…정말?”

“어. 10퍼센트쯤.”

“그냥 나를 죽여라!”

옆에서 푸후훗, 웃는 아바도 정상은 아니었다.

눈 아래 살짝 진 그늘. 여기저기 삐친 머리.

…그게 전부였지만, 민혁은 그 모습도 아름다워 보였다.

이게 아니지.

끄응, 신음하며 민혁은 상체를 일으켜 땅바닥에 앉았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뭐가?”

“왜 정성스럽게 협회장에게 엿 먹이냐고.”

“헌팅을 못하니 돈을 못 벌잖아.”

단지 그 이유라고……?

말문이 막힌 민혁은 입을 뻥끗거리다 허탈하게 말했다.

“어차피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는 워프가 남아 있잖아.”

“그건 그때 가서 보고.”

“그럼… 이 짓을 국내 모든 워프를 털 때까지 하겠다는 거네……?”

도현이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파괴를 해라! 뭣 하러 병신 짓 하는 건데?”

“그럼 재미없잖아.”

“그럼 네 재미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 잃은 사람은 상관없다, 이거야?”

민혁이 제일 화가 난 부분이었다.

첫 워프에서 나오자마자 봤던 노동자들. 그들의 얼굴이 못이 되어 민혁의 가슴에 박혔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저들의 삶이 자신의 삶이었는데 말이다.

정말 좋아하는 절친이 누구냐 묻는다면 당장에라도 대답할 친우지만, 이 행동은 너무 이기적이다.

‘친구라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아는 우도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불안한 점은 도현이 무척 오랫동안 고생하며 성격이 변해 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도현은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것도 생각해 둔 게 있어.”

“어?”

“그러니까 조금만 힘내자. 5등급까지만 돌 거니까.”

민혁이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것 같았던 몸에 왠지 힘이 샘솟았다.

“그래! 빨리하자!”

미소 지은 도현이 말을 꺼내려는데, 아바가 주저하다 물었다.

“그런데… 5등급 워프… 몇 개나 남았어요?”

“100개쯤……?”

그리고 마지막 워프에 들어섰을 때, 세 사람은 은빛 털을 가진 고양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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