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 깽판 (3)
TV의 먹방 예능이 조잘조잘 떠들어 댔지만, 거실의 적막함을 달래 주지 못했다.
식탁에 앉은 도현은 농장에서 덩어리로 잘라 인벤토리에 보관했던 고래 지느러미 한 부분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압빠, 토토 왓써!”
“도련님, 소인 모르달, 왔슴다욧!”
“오오!”
“진짜 거실로 왔네?”
거실의 텅 빈 공간. 그 허공이 갈라지며 두 펫과 두 사람, 민혁과 아바가 나타났다.
어제 오후에 본 뒤로 거의 하루 만이지만 두 사람은 무척 생소한 얼굴이었다.
마침 도현이 있는 식탁으로 가는 토토와 모르달을 따라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았다.
“현아, 왜 혼자 이러고 있어? 농장에 올 줄 알았더니.”
“그러게요. 엄청 재밌었는데. 같이 집도 짓고, 바다도 가 봤어요! 물이 엄청 맑더라구요? 처음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바의 말에 두 펫과 민혁이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모르달이 맞장구를 쳤다.
“아바 아씨 말씀이 맞슴다요! 푸르면서도 반짝이는 초록빛 바다! 캬, 에메랄드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슴다요!”
“토토, 바다 정말 조앗써! 반짝반짝 예뻐! 싱기한 뱀도 밧써! 날개 뱀도!”
모두가 화기애애했다.
도현은 그저 기계처럼 고래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한참 신이 나 조잘거리던 넷은 그런 도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식 앞에서는 늘 경건하며 감탄해 마지않던 그가 좀비처럼 앉아 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현아, 왜 그래?”
“별일 아냐.”
“별일 아닌데 먹을 걸 좋아하는 네가 종이 씹듯 먹어?”
네 쌍의 눈이 도현을 마치 심문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도현은 다시 고기 한 점을 입에 우물거리며 평소처럼 말했다.
“3등급 워프 다 정리했다.”
“네?”
“어?”
“뭐라굼쑈!”
“끼잇?”
놀란 모습들은 좀 웃기네.
픽 웃은 도현이 다시 고기를 한 점 씹었다. 조금 전까지는 민혁의 말대로 종이를 씹는 것 같더니 지금은 고기 맛이 났다.
먼저 정신 차린 건 아바였다.
“한 달 동안 방치했다가 마지막 날에 없애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랬지.”
“…….”
그런데 왜?
모두가 말은 없었지만 얼굴엔 쓰여 있었다.
도현은 입에 씹고 있던 고기가 넘어가기 전에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이번에는 세 점을 멸치젓갈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음! 멸치젓갈의 특유의 향과 짠맛에 고소함과 쫀득함이 2배다.
맛있네.
한참 맛을 음미하다 가시지 않는 시선에 무슨 말을 하다 말았는지 생각난 도현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스트레스 풀 겸.”
“스트레스……?”
“빡 치는 일이 있었거든.”
“……?”
민혁이 그 말을 이해해 보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인상을 좁혔지만, 자신이 아는 한에서는 그런 간 큰 놈은 없었다.
웬일로 도현이 뒷말을 붙였다.
“뒤통수 맞았는데, 뒤통수 친 놈이 잠적했지.”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련님의 뒤통수를 말이까욧! 어디 정신 나간 몬스터라도 있었슴까욧! 당장 소인이 가서 버릇을 고쳐 놓겠슴다욧!”
그 몬스터가 네 신인데……?
진실을 모르고 씩씩대는 모르달을 골려 버릴까 고민하던 도현은 픽 웃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토토가 어깨에 올라와 밤톨 같은 양손으로 볼을 잡고 호, 호, 입김을 불었다.
“압빠, 갠차나? 아야 안 해?”
왜 볼에 입김을 부나 싶었더니.
그런 토토가 귀여워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밤새,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강한 워프만 찾아다녔다.
전국에 퍼진 3등급 워프를 찾기 위해 기감을 펼쳐 찾아냈던 그때, 국내에 나타난 워프 전부를 읽어 들였으니까.
식재료니, 워프핵이니 그런 걸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 대는 이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간 자신도 이다음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들이닥치는 몬스터 한 놈, 한 놈을 샌드백처럼 쳐 댔음에도 10분 만에 모든 몬스터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른 주홍빛 워프핵을 부쉈고, 워프는 도현이 나옴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몬스터를 정리하면 파괴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새로운 정보도 건졌다.
하지만 아직도 가시지 않는 분노 때문에 그가 처리해야 하는 3등급 워프까지 손을 댔고,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분에 근처 바다 건너까지 무작위로 워프를 파괴하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이미 아침.
몸을 움직였다는 피로감보다는 속이 허하고 쓰렸다.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제브라드였다면 이미 대륙의 한 부분이 초토화로 만들고도 드래곤 몇 마리를 쥐어 패는 것으로 정리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내 집을 부숴 봤자 결국 제 손으로 뒷정리를 해야 했으니까.
멍한 상태로 소파에 털썩 앉았던 도현은 습관처럼 TV를 켰고 먹방을 틀었다.
먼 바다 배 위에서 상어를 낚으려 힘겨루기를 하는 방송인의 모습을 보자 어제 제대로 시작도 못했던 고래 고기가 떠올랐다.
고래 부위 중에서도 별미라 부르는 지느러미 한 덩어리를 꺼내 빠르게 구워 썰지도 않고 뜯어먹듯 먹었지만 그 맛도 느껴지지 않고, 허기도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몬스터를 두드릴 때보단 나은 느낌에 식탁에 쌈과 소스를 꺼내 펼쳤다.
다시 한 점, 한 점 기계처럼 입에 넣어 우물거리던 그는 막 돌아온 두 펫과 두 사람의 복작복작함에 스트레스가 스르르 녹아 버리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딱히 정의하기 힘들었던 도현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방방 뛰던 모르달이 움찔하며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모르달을 보며 키득거렸다. 농장에서는 왕처럼 돌아다녀도 역시 도현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다.
도현이 둘을 보고 물었다.
“같이 먹을래?”
“아니. 3일 내도록 먹었더니 물리네.”
“저도 고래 고기는 그만 먹고 싶어요.”
양이 꽤 많긴 했다지만 그걸 3일 내도록 먹었을 줄이야.
도현이 자신과 두 펫이 먹어 대는 양이 일반적이라 착각한 데에서 생긴 문제였다.
고래 고기로 해 먹을 수 있는 모든 요리를 동원해 어쨌든 다 해치우고, 마지막 날 휘르카와 바다를 누비며 해산물로 물렸던 입맛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 며칠을 다시 떠올린 민혁이 진저리 치듯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일어났다.
“라면 없어? 얼큰한 라면 먹자! 입맛 돋울 땐 MSG 팍팍 들어간 라면이 최고야!”
“그럼 내가 할게. 라면은 뚝배기 라면이 최고지.”
도현이 식탁에 토토를 내려놓으며 일어나 상단 선반에서 뚝배기를 꺼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 불을 켜기 무섭게 물이 채워지며 김이 뿜어져 후드로 빨려 들어갔다.
하단 선반에서 라면을 꺼냈다. 얼큰한 걸 말했으니, 요즘 없어서 못 판다는 불닭탕면 시리즈를 끓여 볼 생각이었다.
라면 봉지를 슬쩍 본 건지 민혁과 아바가 오오, 작게 감탄했다.
도현은 봉지를 뜯어 후레이크와 분말 가루를 뚝배기에 넣으며 웃었다.
‘취향이 비슷하다더니, 먹는 것도 그런가 보네.’
농장에 가자마자 아바와 일이 있고 난 후로 민혁이 충격을 받은 건지 아바와 서먹해졌었다.
그게 술자리까지 이어지고, 취해서 혼잣말을 하다 곯아떨어졌지만.
민혁을 침대에 던져 놓고서 워프핵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시 집에 돌아와 제브라드를 뒤집는다고 신경을 못 썼지만, 농장에서는 대충 4일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지금 둘을 보자면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해진 것 같긴 하지만, 어색한 민혁은 티가 났다.
왜냐하면 민혁은 어색할수록 말수가 줄어드니까.
도현은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민혁이 아바의 목적을 알게 되어 받은 충격도 있지만 그보다 아바가 도현을 좋아하고 있어서, 그래서 밀어주기 위해 포기한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도현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팔팔 끓는 뚝배기에 면을 넣었다. 빠르게 퍼지는 면의 고소한 향이 코를 쿡쿡 찌르는 매운 향과 함께 퍼졌다.
두 사람이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로 코를 팽팽 풀어 대는 두 펫의 소리에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민혁과 아바 앞에 뚝배기를 내려놓고 수저와 앞 접시를 건네며 말했다.
“토토랑 모르달은 곰탕으로 새로 해 줄게.”
“아님다요! 먹어 보겠슴다욧!”
이상한 데서 의욕을 불태웠다.
그 의욕은 토토까지 전염되었다.
“토토, 토토도 머글 꺼얏!”
어차피 4개 끓인 거, 둘도 먹어 보라며 앞 접시를 놓아주고 남은 뚝배기를 자신 앞에 두었다.
혹시 모르니 다시 뚝배기 2개를 꺼내 두 펫이 제일 좋아하는 곰탕을 끓일 준비는 해 두었다.
마트를 다시 털어 왔을 때 사 두기만 하고 바빠 손을 못 댔던 불닭탕면.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도현은 냄새만 맡고 잔뜩 기대했었다.
마그마처럼 선명한 붉은 국물 속에서 젓가락으로 면을 건졌다.
뜨끈함에 입안이 데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동시에 매운 향이 기도와 콧속을 틀어막듯 김과 함께 뿜어졌다.
누구나 한 번쯤 터지는 기침에 멈출 법도 했지만,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면을 맛깔나게 흡입했다.
후루루룩!
면발 끝이 살아 있는 새우처럼 튕기며 도현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매콤한 맛이 강렬하게 입안을 채우기 무섭게 구수한 닭 육수가 감칠맛을 냈다. 거기에 무겁고 진한 중간 맛은 아무래도 돼지 육수의 느낌. 탱글탱글한 면발이 씹히며 밀가루 특유의 고소한 맛이 함께 어우러졌다.
꿀꺽.
자칫 텁텁하지 않을까 싶은 걱정과 달리 미끄러지듯 식도로 넘어가는 끝 맛. 닭 육수의 깔끔한 맛이 매운맛과 어우러져 여운을 남겼다.
국물을 맛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현은 주저하지 않고 뚝배기를 들었다. 아직 김을 뿜어내는 뚝배기는 맨손으로 들어 올릴 수 없을 뜨거움을 품고 있었지만, 도현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후르릅!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쥐똥고추처럼 더 매운맛과 섞여 알싸하게 입안에 퍼졌다.
고소하고 진하면서 담백한 육수가 시원했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캬하!”
고래 고기와 곁들여 먹기 위해 내놓았던 김치를 씹었다.
면과 함께 먹은 건 아니어도 입안에 남은 육수의 여운이 김치와 어우러져 매운 입안을 더 달궜지만, 그 느낌에 찌꺼기처럼 남았던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렸다.
이 맛에 사람들이 매운 걸 찾는 걸까?
마치 뜨끈뜨끈한 사우나에서 땀을 쫙 뺀 듯 개운했다.
새로운 맛에 눈뜬 도현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역시 라면 1개는 입가심 정도밖에 안 된다.
도현은 싱크대 위, 봉지밖에 남지 않은 멀티팩을 바라봤다.
‘괜히 하나만 샀네.’
도현은 선반을 가득 채운 라면들 중 불닭탕면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여운을 달래듯 몇 점 남지 않은 고래 고기를 씹던 그는 눈물, 콧물 다 빼며 뚝배기를 비워 가는 두 사람을 봤다.
“크하! 훌쩍! 콜록!”
리듬감까지 느껴지는 그들의 식사가 웃기면서도 다시 떠오르는 라면 맛에 토토와 모르달을 슬쩍 살폈다.
“토토, 매어! 무, 물! 학! 학! 매어!”
“크흡! 이건 고문 전용 음식임까요? 헥, 헥! 먹을 수가 엄씀다요!”
혀를 길게 내빼고 파닥이는 토토의 털이 이리저리 삐친 듯 삐죽거렸다.
모르달은 붉게 변한 코에서 콧물이, 길게 내뺀 혀에서는 침이 줄줄 흘렀다.
도현은 두 펫이 먹던 뚝배기가 절반 이상 남을 걸 보고 욕심이 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토토와 모르달에게 우유 두 잔을 건네며 뚝배기를 자신 앞에 두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에 스프와 면을 넣고 불을 껐다.
젓가락으로 휘저어 주고, 면이 풀어지자 두 펫 앞에 뚝배기를 내려놓았다.
입안의 불을 끈 두 펫은 당연하다는 듯 곰탕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괴로운 비명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역시 라면은 곰탕임다요! 후욱! 매운 라면이라니, 다시는 먹고 싶지 않슴다요!”
“마자, 마자! 마싯써! 라면! 매운 시러!”
맞은편에 앉은 민혁과 아바가 티슈로 코를 닦으며 웃었다. 도현도 빙그레 웃으며 조금 퍼진 불닭탕면을 후루룩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