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07화 (107/200)

# 107

107. 깽판 (2)

깽판의 종류엔 무엇이 있을까.

꽤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계획을 무산으로 만들어 버린다든가,

당사자를 손본다든가,

뒤통수를 친다든가,

제삼자를 끌어들여 자멸하게 만들어 버린다든가.

“하지만 그것도 인간일 때나 통하는 짓이지.”

도현이 깽판 치는 목적은 신을 엿 먹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소해선 티도 안 난다.

“마계는… 그라드가……. 음, 패스.”

깽판 치려니 눈치가 보였다. 겨우 안정기에 들어섰을 텐데.

마법사였던 전적과 꾸렸던 집단 때문인지 그라드는 문서를 무척이나 잘 꾸몄다.

덕분에 마계 안정화가 빨라졌지만, 반대로 그런 그의 능력을 대신할 인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미오르에게 인재를 받고 싶어 어필 중이라는데, 과연 누가 마계로 가고 싶어 할까.

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 아, 이건 아닌가?

“그렇다고 천계는….”

나르시즘에 걸린 병자 집합소.

처음에는 제브라드와 제일 연관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곳이었지만, 전혀 무관했다.

그냥 날개 달린, 힘 좀 있는 비둘기들이 사는 곳일 뿐.

아니지. 도움을 받은 애들이 몇 있었으니 비둘기보단 닭으로 격상해 주자. 치킨은 늘 옳으니까.

아무튼 이 2곳을 제외하니 눈을 돌릴 만한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다.

중간계.

그것도 신님이 직접 굽어 살피시는 신교, 제브라드교.

“마침 에놀드가 갔으니까.”

에놀드가 신교 정찰에 나선 지 한 달쯤.

너무 조용했다.

헤미오르가 국교로 우도현교를 지정한 지 곧 1년.

신교가 조용하다?

“이거 정말 뭐가 있는데?”

방문자 페널티 이후 신의 대리자가 되고, 모르달이 제브라드를 느낄 수 없다는 것도 힌트다.

모르달의 신성력도 제브라드에게서 나오는 게 아닌 자신의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이고.

반대로 생각한다면,

“신성력이 없을지도?”

도현의 미소가 짙어지다 멈췄다.

“그렇다면 약 1년간 어떻게 버틴 거지?”

도현은 헤미오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브라드교는 요즘 어떻지?]

[국교 자격을 박탈당하고 작은 반발은 있었지만, 그것도 한 달쯤. 잠잠해지더니 이동이 많아졌어요. 작은 신교는 철수했고, 남은 신교는 대신교라 부르는 5곳뿐이에요.]

축소라.

그저 국교 박탈로 인한 타격이라 보기엔 너무 빠른 행동인데?

이어서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포교 활동도 중단했어요. 국교가 아니란 이유를 대더군요. 사제들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세 달 전쯤부터 사제들이 체술을 익히기 시작고요. 검을 차고 다니는 사제들도 많이 보였어요. 사제 윗급인 주교는 그대로예요 다만, 신성력을 요청하면 거부하더군요. 최근 2주 전쯤, 요르하그 백작의 장남이 몬스터 공격에 큰 부상을 입은 일이 있었어요. 신교에 신성력 치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백작가 아들의 치료는 헤미오르가 직접 나서 물의 정령으로 완치시키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역시 신성력이 사라진 게 맞아.”

확신했다.

직업이 신의 대리자로 바뀐 이후부터 그가 신성력을 허용한 이는 모르달뿐이었으니까.

제브라드교의 만행에 귀족들은 반발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단다.

사고나 상처를 달고 사는 용병과 영주민들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내는 포션으로 치료한다는 보고였다.

포션은 도현이 제브라드에 있을 때도 고가여서 자작가에서도 쉽게 쓰지 못했던 것이지만, 현재는 헤나지그의 실용 마법학파에 의해 무척 저렴해진 가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에서 치료를 어떻게 하나 묻더니 그게 이 이유이었을 줄이야.

그 일로 연금술을 다루는 마법사와 약초를 다루는 약제사, 정령사까지 실용 마법 학파인 제6마탑에 몰려들었고, 6마탑은 승승장구하며 어떤 학파도 건들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마법사의 꿈의 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헤나지그가 주거지 개편을 시작한 거구나.”

그 정도의 인력이라면 시작할 만하지만, 주먹구구식이 될 뿐이다.

도현은 어제 방문자로 왔던 드워프들을 떠올리며 헤나지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상을 떠도는 드워프 넷이 있어. 맛이 가긴 했지만, 쓸모는 있을 거야.]

신상이라는 뻘짓은 못하게 일을 많이 떠안겨 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럼 신교부터 차근차근 밟아 볼…….”

갑자기 페드릭의 메시지창이 불난 것처럼 쉼 없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도현 님! 미친 파란 도마… 아니, 스승님 좀 말려 주십시오! 도현 님께서 주신 쪽지를 보더니 신교에 간다며 가게를 뛰쳐나갔습니다!]

[대체 쪽지에 뭐라고 쓰신 겁니까? 미… 아니, 스승님이 신 제브라드에게 엄청난 욕설을…….]

[차원 이동을 막았다는데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요…? 설마 신이 막았다는… 하, 하하하…….]

응, 그래. 그거 맞아.

도현이 씨익 웃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이오르가 깽판 치는 걸 라이브로 못 보는 게 아쉬운데. 아, 에놀드가 있었지.”

도현은 경쾌하게 에놀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까지 정찰만 하고 있을 건데? 설마 그것들한테 교리 설파니 뭐니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한 달 잠수 탄 것에 비해 빠른 답장이었다.

[퍽이나. 그런데 뭐하냐? 박살 내고도 남을 시간에. 그것들 신성력도 없잖아?]

[알고 있군. 네가 제브라드 님과 관계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이상한데?]

[질투냐?]

[미친놈.]

“부정은 안 하네.”

잠수 탄 신이 뭐가 좋다고.

불쾌감과 즐거움, 그 경계에서 헛웃음을 흘린 도현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오르가 거기 갔어. 어디를 먼저 간 건지 모르겠는데, 남은 대신교 5개만 남았다지?]

[이오르 님은 너랑 연결 안 되어 있으니 지금 나보고 실시간으로 보고해 달라는 건가?]

[그것도 좋고. 아니면 다른 깽판 좀 칠까 싶어서.]

[무슨?]

[뭐가 있을까?]

[…너 지금 누구한테 뭘 묻는 거야?]

반응이 영 이상했다. 잠깐 생각해 보니…

“짝사랑하는 여자의 약점을 캐묻는 파렴치한 놈으로 보는 건가?”

그럼 말을 돌리면 될 일이다.

[제브라드가 잠수 탔어.]

[잠수? 제브라드 님이 사라졌다는 걸 말하는 건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어떻게?’라는 의문이 들기 바쁘게 이해가 갔다. 제브라드가 에놀드를 살렸던 전적이 있으니까.

그러니 신교를 정찰하러 간 거겠지.

신교를 비호하는 신성의 막. 그 막의 유무만 훑어도 상황은 알 수 있다. 단지 그걸 보려면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나 자신처럼 강해야 가능하지만.

잠깐 멈췄던 메시지를 빠르게 보냈다.

[그럼 찾아야지.]

[그래서 물어본 건가? 하… 과정은 마음에 안 들지만 부정할 수 없군.]

주절주절 떠들지 말고 본론 좀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구시렁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지 곧바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태초의 신전. 신이 태어난 곳이라고도 하지.]

“그런 곳이 있다고?”

도현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제브라드의 땅덩이가 워낙 넓긴 했지만, 이런 정보는 처음이니까.

“하긴 그 넓은 땅덩어리에 인간이 사는 곳이라 해 봤자 절반뿐이지.”

남은 절반 중 제일 많은 땅을 차지한 건 몬스터다.

강한 놈일수록 넓고 기름진 땅을 차지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세계수.

그 넓은 몬스터 영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몬스터로는 번식력도 강하고 수십, 수천이 무리 지어 사는 오크와 고블린이었고, 이놈들을 주식으로 삼는 오우거, 트롤 등 개체 형태의 몬스터들이 주변에 분포해 서식하는 형태였다.

이놈들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살지 않는다는 죽음의 숲처럼 접근할 수 없는 이상한 곳이 많았고, 그런 곳을 제외하고 남은 5퍼센트의 땅에 소수만 살아남은 이종족들이 흩어져 사는 게 지금의 제브라드였다.

밝혀지지 않은 이유를 나름 해석해 수긍하던 도현은 이어진 메시지에 눈을 끔뻑였다.

[세계수. 그게 태초의 신전이다.]

“미친…….”

[야,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

[나도 몰랐어. 신교에 들어왔다가 고서를 발견하고서 말해 주는 거야.]

정찰이라더니, 단서를 찾으려고 침입한 거였어?

“그런데 그걸 함부로 보여 주나?”

이방인이 된 에놀드에게?

아니나 다를까.

[이미 5개 다 내가 해 먹었다.]

5개? 대신교 5개?

“푸하하하하!”

[마음에 드셨습니까, 나의 신이여.]

진짜 최고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이오르가 더 광분하겠지.

아니, 이미 광분했을지도?

키득거리던 도현은 순간 얼굴이 묘해졌다.

“에놀드가 메시지창에 떴었나?”

커넥트창의 메시지를 다시 꼼꼼히 훑어본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님을 깨달았다.

에놀드의 행적은 한 달 전 신교 정찰로 끝.

그런데 대화를 해 보니 이미 모든 대신교를 부쉈단다.

“행적이 감춰졌어.”

어디를 쳐들어가고, 누굴 처리했다는 그런 메시지야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헤미오르나 헤나지그처럼 업적이나 평판에 대한 메시지가 단 한 줄도 없었다.

신교의 영향력이 줄어서?

신교의 고서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럼 왜?

“…숨긴 거야. 자신의 힘이 직접 닿는 곳은 아예 보여 주지 않은 거였어.”

처음으로 깨달은 메시지의 허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브라드의 손에 놀아난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애초에 이 모든 걸 떠맡긴 것도 제브라드였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우도현이 아니다.

받은 만큼 이자에 복리까지 쳐줘야지.

그러려면 직접 움직이는 게 좋은데,

“갈 수가 없지.”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

이런 빅 피처를 예상한 제브라드가 직접 신어로 추방한 걸까?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계략이다.

물론 당한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도현은 당장에라도 폭발하려는 본성을 내리누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패.

이제 좀 봐줄 만해졌지만 각자 제 사정들이 있었다.

그나마 움직이기 편한 패라고는 에놀드 정도.

“혼자 가는 건 자살행위야.”

무려 태초의 나무다. 제브라드에 퍼진 전설로는 그 세계에 처음 내려진 생명.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

드래곤 로드보다 더 까마득한 세월을 산 존재를 쳐부수러 가는데, 고작 5천 년을 산 에이션트급 드래곤이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보다 더 무모한 짓이다.

“이오르는…….”

움직이는 건 쉽다. 이번 쪽지처럼 흘리기만 해도 되니까.

그래봤자 달걀 2개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무엇보다 내키지 않았다.

이오르는 전술이나 모의, 계략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때 기분에 따라, 치고, 박고, 뒤엎는 게 딱 맞는 놈이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상황에서 움직여 줄 말로는 적당했다.

변수라는 패 말이다.

“하, 다 짜증 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현은 분에 찬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정보. 우선은 정보가 시급해.”

태초의 나무, 세계수.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어떻게 모은다?

“세계수… 나무… 엘프. 그래, 엘프가 있었지.”

세계수를 지키며 세계수에 기생하는 태초의 엘프.

태초의 신전이라는 것도 그놈들과 관련이 있을 게 뻔했다.

일반적으로 영악한 엘프들과 달리 태초의 엘프는 무척이나 폐쇄적인 놈들이다.

들이닥치면 미로 같은 세계수 지대에 꼭꼭 숨어 버리겠지만, 그놈들도 엘프. 물꼬만 트면 세상에 찌드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고 보니 딱 적합한 사람이 있었잖아?”

하이든.

신혼여행 중이겠지만 밥값은 받아야겠다.

당장에 하이든의 메시지창을 열어 짧고 굵게 적었다.

[세계수. 정보 좀 모아.]

그리고 빠르게 깜빡대는 에놀드의 메시지창을 눌렀다.

[방금 이오르와 만났어. 태초의 신전 얘기 해도 될까?]

[전부 말했다. 따로 움직인다더군. 난 단서를 먼저 모았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엘프 놈을 찾아볼 생각이야. 받을 빚도 있고. 주기적으로 보고 남길게.]

성격이 급해선지 보기와 다르게 확실히 행동이 빨랐다.

[어. 하이든에게 이야기 해 뒀어. 쓸 만한 정보가 생기면 알려 줄게.]

그렇게 메시지를 남긴 도현은 창 전부를 끄고 일어났다.

현재 시각은 밤 10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건지 집은 조용했다.

“후…….”

깽판도 치고 스트레스도 확 풀 줄 알았던 도현은 오히려 자신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아 속이 끓어올랐다.

한쪽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웃음을 지었다.

“손바닥에서 팔딱거리는 날 보고 재미 좀 보셨겠어?”

얼마나 재미나겠는가. 요즘 말하는 팝콘 각이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뒤통수지만.

으득.

갈 길을 잃은 눈동자가 팽팽 돌며 살기로 번들거렸다.

분풀이라도 안 하면 집은 물론이고 서울, 경기도가 재해를 입지 않을까 싶을 정도.

“하! 그래, 이번만큼은 내가 졌네, 졌어.”

커넥트에 이런 허점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한때 죽어도 죽지 않을 독종이라 불렸다고.”

죽으면 혼을 인도하기 위해 온다는 제브라드의 사자들도 도현을 보면 도망갈 거라고.

그 정도로 악의 정점을 달렸던 그였다.

도현은 창밖의 새카만 하늘을 직시하며 씹듯 중얼거렸다.

“기필코 찾아내서 이 빚은 꼭 받아 내겠다.”

그때 가서 몸서리치며 울고불고 매달려도 절대 적당히 끝내지 않을 생각이다.

도현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지며 블라인드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가 나타난 곳은 제주도의 한라산.

늦은 밤, 제주도에는 이유 모를 진동이 울렸고, 근원지였던 한라산 정상에 자리 잡았던 2등급 워프는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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