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 워프핵 (2)
아바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거실에 있었는데, 지금 있는 곳은 숲이었다.
마치 워프 속에 들어온 것처럼 피부에 닿는 진한 마나에 몸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내가 긴장한다고?’
의아함도 잠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녹음과 화산, 옅게 쿵쿵 울리는 땅의 진동과 함께 숲을 뛰어다니는 적색 호랑이가 보였다. 코끼리 3마리를 합친 듯한 무식한 크기에,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던 그녀는 그 주위로 거대한 무지개 꽃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걸 보고 멈칫했다.
“타이탄 레인보우……?”
계양산 정상, 터졌던 워프에서 토토가 가지고 나왔던 그 꽃 몬스터.
“이게 왜…….”
멍하니 중얼거리던 아바는 꺄르륵, 토토의 웃음소리에 앞을 봤다.
저 멀리 워프핵을 입에 문 토토가 네발로 신나게 뛰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반대편, 비릿한 바다 내음을 풍기는 거대한 강 같은 바다를 넘어 단층집이 무리 지은 곳에서 하얀 날개를 단 익숙한 사내가 보였다.
휘르카였다.
3킬로미터는 더 될 먼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온 휘르카는 반가운 얼굴로 아바와 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혁 님! 아바 님! 오랜만입니다.”
그는 워프에서 봤을 때보다 더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바는 눈이 팽팽 돌 것만 같았다. 이해 안 되는 수학 공식을 머리에 때려 넣듯 흘러가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모든 걸 보여 주는 도현의 저의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복잡한 머리와 답답한 마음에 결국 폭발한 그녀는 휘르카와 인사를 나누는 도현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죠?”
“딱히? 궁금해하니까 보여 준 것뿐인데.”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모습에 다시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후, 진정하자. 진정해야 돼!’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하지만 농장이 눈에 들어오자 시작도 하기 전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이게 일개 헌터의 능력이라고?’
팀원이 되어 얼굴을 본 지 이제 일주일.
그 안에 얼굴을 맞댄 날짜는 4일밖에 안 된다.
그런데… 그 4일간 그가 보여 준 능력을 나열하자면 입이 절로 벌어지다 못해 질려 버릴 지경이었다.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 같은 인간이라니.
끝없이 나오는 새로운 능력이 이젠 두렵기까지 했다.
설마 신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물… 어봐……?’
아니, 물어봐서 어쩔 건데?
진실을 알고 나면?
이미 자신의 임무는 실패했다.
자신이 스파이라는 것도, 그를 귀화시키러 왔다는 목적을 알고 있음에도 너무 허술하게 대하니, 그녀는 자신의 목적과 위치를 망각할 때가 많았다.
자괴감과 현타가 동시에 밀려오자 그녀는 어깨가 축 처졌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쯤은 준비운동이라 생각했었는데.
금의환향을 기대했다.
이후로는 미국으로 귀화한 도현과 함께 팀을 짜 맡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완수할 거라고.
명성과 존경, 그리고 경외를 한 몸에 받아, 마지막엔 그와 결…….
‘아니, 미쳤다고 그런 망상을!’
힘껏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쳤다.
저런 인간, 그냥 줘도 필요 없다고!
아무튼, 자신의 이름이 나오면 어느 누구든 감탄해 마지않는 그런 헌터가 되고 싶었다.
부와 명예, 그리고 행복. 모든 걸 당연하게 갖게 될 거라는 부푼 꿈.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현실을 마주했다.
맨 처음 느낀 건 게으름이었다.
12시간 넘게 의자에 앉아 일을 처리함에도 능률은 거의 없다시피 한 직원들.
그리고 헌터들은 이익만을 좇았다. 돈이 안 되면 헌팅조차 안 한다는 거다.
반대로 돈이 되는 건 미친 능률을 보이고, 힘든 헌팅에서도 최상품만 뽑아냈다.
그런데 다치지도 않는다. 분명 위험해서 무조건 한둘은 죽는, 사망률이 높은 워프임에도 말이다.
돈에 미친 이기주의자들.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건 그러면서도 정이라는 문화였다.
인정한 사람이라면 그 무엇도 재지 않고 감수했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그들은 게으른 게 아니었다. 세상에 찌든 것이었다.
지지부진한 일의 능률은 혼자서 3명분의 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헌팅 워프는 그 수준이 평균이었다는 것이다.
‘쥐어짜면 다 하게 되어 있어.’
협회의 부장이라는 사람이 혼자 중얼거리던 말.
이해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렇게 썩어 빠진 나라가 헌터 강국 1위라고?
웃음이 나왔다.
이런 나라라면 사람 하나 빼 내는 건 어렵지 않다고.
오직 교류 헌터로 오게 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갖춰진 게 없었다.
정보도, 활동도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이 통했을까. 잭팟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세계 최대 워프 마켓 블랙홀의 2세. 거기에 3급 블랙 헌터 우도현.
거기에 교우 관계까지.
여기까지 정보를 모았을 뿐인데 손이 떨렸다.
이런 거물을 어떻게 자신이 감당하겠는가.
즉시 본국에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자신이 아닌 전문 인력을 보내 주길 바라면서.
그녀는 당연하게 귀환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임무를 계속 진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할 수 있을까? 아니, 저런 괴물을 어떻게 귀화시키냐고. 차라리 워프에서 3년을 더 살라면 그걸 택하겠다 싶었다.
고민과 갈등이 계속되는 사이, 도현은 공식 데뷔 무대까지 가졌다.
3등급 워프, 크로아의 바위산.
2주기로 1등급으로 변이 예정 중인 워프였다.
현재 행방불명된 노아 이선 헌터가 아니면 구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어졌던 사건이다.
그런 대사건을 그가 해냈다.
그것도 살아 있다면 꼭 돌아와야 한다는 헌터들만 데리고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를 보자마자 그녀는 도현이 두려웠다.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스트레스로 폭식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도현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팀원이 되란다.
이 소식을 협회장이 들고 왔다.
거부한다면 바로 미국으로 귀환시키겠다고.
공식적인 입장이 오가기에 본국의 땅을 밟을 순 있을 거다.
그 뒤에 자신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겠지.
두려웠다. 이제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답을 받았지…….’
팀원이 됨과 동시에 본국에서 다음 임무가 내려왔다.
우도현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빼내라는 것이었다.
쓰디쓴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땐 몬스터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 느끼는 건 몬스터는 도현이 아닌 국가였다.
이기적인 국가보단 차라리 한국의 이기적인 헌터들이 낫다 싶었다.
적어도 정이란 것에서는, 아무리 무모하다 한들 계산을 들이밀진 않으니까.
겉으론 고상한 척,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 척하지만, 그 고고한 가면이 벗겨지자 그렇게 추악할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구역질이 올라와……?’
2년 동안 적지 않은 훈련을 겪으며 주기도문처럼 외웠던 그 말이 떠올랐다.
조국이 있고 자신이 있다. 조국을 위한 희생은 불멸이요, 그 불멸로 나는 다시 태어나리.
아바는 온몸에 돋은 소름도 느끼지 못한 채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났다지만 그런 엄청난 애국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애국심이란 게 헌터가 되었다고 해서 생겨나지도 않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되살아난다니, 말이 돼?’
마치 악마 숭배자의 주문처럼.
이상하다.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미쳤어……?’
헌터가 된 이래 국가에 대한 믿음이 와장창 깨졌다.
두통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믿어 왔다는 것이, 국가 전체가 그런 상황이라면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난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거지……?’
혼란으로 떨리는 아바의 눈동자가 당연하게 도현을 향했다.
‘얘 왜 이래?’
도현은 아바가 다시 바락바락 대들며 화낼 줄 알았는데,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자 의아했다.
머릿속이 무척 복잡해 보이는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뭐야?”
“…아니에요.”
그러면서 아바는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찝찝했지만, 기분만으로 협박하자니 이쪽이 아쉬워하는 느낌이다.
쯧, 혀를 차며 민혁을 봤다.
민혁은 농장 여기저기를 살피며 감탄 중이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아니, 이게 강하다고 가질 수 있는 거긴 한가?”
무려 워프다.
워프를 소유한다는 발상을 할 수나 있을까?
헌터의 힘이란 건 본인 외에는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
때문에 랭킹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해 헌터들의 힘의 차이를 수치화 하는 기준을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도현처럼 워프 하나를 개인이 가진다는 건 개념부터 다른 이야기였다.
도현이 거만하게 웃었다.
“내가 좀 강하다고 했잖아.”
“그럼 도식이 형님이 신이라고 하더니, 진짜 신이야?”
농담조이지만 살짝 진심이 들어간 걸 모를 리 없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매부가 신이라고 했다고?”
“몰라? 우도현교. 진짜 유명한데. 회원 수만 100만을 넘었을걸?”
모르달이 배를 잡고 넘어갔다.
“제브라드에 이어 지구에도 우도현교임까요? 아이고, 배야. 도련님은 어쩔 수 엄씀… 꾸엑!”
도현이 모르달의 배를 지그시 밟았다.
민혁은 제브라드가 무엇인지 물으려다 모르달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오히려 치고 들어온 것은 휘르카였다.
그는 레이저라도 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우도현교? 도현 님을 모시는 인간들이 있다는 겁니까?”
“아… 뭐, 그렇죠.”
비슷하긴 하다. 종교가 아니라 팬심이지만…….
적절한 수긍만 했다. 팬심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의미를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해 보여서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멍해졌던 휘르카는 이를 악물고 분한 듯 말했다.
“그렇군요. 도현 님은 신이시죠. 인간계를 평정하고도 남는 게 당연할 텐데, 제 생각이 짧았군요.”
맹수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에 민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확실히 예전보다 몇 배나 강해진 힘의 위압감은 소름 끼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판 붙자는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때, 혼자만의 세상에 빠졌던 휘르카가 맹세하듯 외쳤다.
“하지만! 밤의 인어족은 더욱더 강해질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앞장서 도현 님을 모실 겁니다. 민혁 님, 세상이 넓다는 걸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휘르카가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동시에 도현이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쏟아붓고 싶었지만, 당사자인 차도식은 이 자리에 없었다. 괜히 애먼 사람 잡아서 뭣 하겠나.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도현은 무난한 말을 뱉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아닙니다, 도현 님. 도현 님이 가시는 길이 어디든 밤의 인어족은, 이 휘르카는 오른팔이 되어 따르겠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더욱더 사기를 불태우는 휘르카를 보니 목이 턱 막혔다.
하아…….
도현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도 안 왔다.
그사이 도현의 발에서 빠져나온 모르달이 버럭했다.
“어디서 오른팔을 넘봄까요? 소인과 토토 님의 자리임다욧!”
“아! 실례했습니다, 모르달 님! 밤의 인어족은 어떤 신도들보다 앞장서 도현 님을 위해 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시원한 미소를 짓는 휘르카가 더없이 든든해 보였지만, 둘을 향한 도현의 눈초리는 살벌하기까지 했다.
전혀 눈치 못 채는 모르달이 제 팔을 엮어 팔짱을 끼고 낮게 웃었다.
“후후훗, 휘르카는 아직 멀었슴다요. 제브라드에는 더 위대하고, 더 강한 신도들이 얼마나 많을 줄 아심까요? 뭐, 소인보단 못……. 도, 도련니이이이임! 카학!”
결국 도현은 부글부글 끓어 대는 화산을 향해 모르달을 던졌다.
웬만한 투수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깔끔했다.
카웅~!
껑충껑충 뛰어다니던 호라타스가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모르달을 덥석 물더니 꼬리 끝을 살랑살랑 저으며 타이탄 레인보우 지대로 돌아가 버렸다.
“헉! 모, 모르달!”
파랗게 질린 민혁이 달려가려 하자 휘르카가 그를 잡아채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민혁 님, 괜찮습니다. 호라타스가 모르달 님을 너무 좋아해서 물어간 것 같군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저 덩치에 앞발만 휘둘러도 모르달이 죽을 것 같은데요!”
휘르카가 눈을 끔뻑이다 피식 웃었다.
“모르달 님이요? 하하! 민혁 님은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호라타스가 안 다치면 다행이지요. 이곳에서 모르달 님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건…….”
“…….”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