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 비상 체제 (1)
비상 체제의 아침이 밝았다.
도현은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회로 먹고 남은 키리카의 머리로 칼칼한 매운탕을 해 먹은 그는 후식으로 차를 마시며 정오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제 농장에 갔다가 인어들이 씻고 말리고 덖은 타이탄 레인보우의 꽃봉오리 차.
새콤달콤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일품이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대한민국은 오늘부터 워프 비상 체제에 들어갑니다. 2주기 워프를 우선으로 워프 파괴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동원 가능한 헌터들이 전부 투입됩니다. 각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는 헌팅으로, 총 255개의 워프를…….]
보통 정오 뉴스는 가볍게 시작하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나운서의 모습이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다른 소식에 비해 설명도 많은 만큼 비상 체제 소식만으로 5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옆 소파에 앉아 오븐에 구운 스네일을 팝콘처럼 씹어 먹던 모르달이 쯧쯧 혀를 찼다.
“저게 언 발에 오줌 누기 아님까요? 올해 1주기 워프도 많다는데, 그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슴다요.”
도현은 어이가 없어 무시했다.
매니저가 된 지 이제 일주일인 놈이. 실제 교육받은 시간은 많이 쳐봤자 이틀이 다인 놈이.
대답이 필요 없었는지 또 혼잣말을 해 댔다.
“비상 체제도 말이 안 됨다요, 그사이에 워프가 터져 버리면 어쩜까요? 지키는 헌터들은 없고 전부 헌팅 갔는데, 사람들이 불안해서 살겠슴까요.”
저놈 오늘따라 이상하다.
어제는 우울 모드더니 오늘은 오지라퍼 모드인가?
“모르달.”
“왜 부르심까요?”
“헛소리하지 말고, 오늘 일정 읊어 봐.”
한탄하던 모르달은 어디 갔는지 갑자기 눈치를 슬쩍 보더니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3등급 워프 12개임다요.”
“……?”
“아직 2주기에 안 들어가서 3등급임다요.”
도현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 숫자, 익숙하다
주 차장이 브리핑하던 때 봤던 2주기 대상 3급 워프 전부.
이거… 그냥 철판 깔고 떠맡긴 거 맞지?
1급 자격증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짜증이 스멀스멀 오르는데,
“오늘 하루 만에 끝낼 건 아니고, 한 달로 잡혔슴다요.”
“한 달?”
“예, 도련님 하실 일은 3등급 워프 12개가 다임다요.”
거짓말처럼 짜증이 가셨다.
그 자리를 채운 건 고민이었다.
빨리 끝내고 쉴까?
아니면 놀면서 한 달을 채울까?
‘한 주에 3개라…….’
이틀에 하나꼴.
3급이 이끄는 헌터 팀이라도 타이트하게 돌아야 이틀에 하나 끝낼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하지만 도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에 다 끝낼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워프핵만 파괴하면 되니까.
‘재료라도 찾아서 요리나 해 볼까?’
그것도 나쁘지 않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요리 첫 수업이지.’
주 2회, 수요일, 토요일 수업인 걸 기억해 냈다.
‘그럼 재료 좀 모아서 수업 들으러 가면 딱이네.’
도현은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모르달의 마지막 한마디만 없었다면.
“참, 도련님. 전부 몬스터 워프임다요.”
인상 쓰는 도현의 얼굴에 괜히 시선을 외면하는 모르달 사이로 TV 화면 아래 ‘특보 워프 마켓 1위 블랙홀, 헌터 협회와 지속 협력 관계 구축. 헌터 복지 개선에 힘쓸 것.’이란 자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대한민국이 워프 비상 체제로 떠들썩한 만큼, 현재 헌터 협회는 헌터들의 항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쾅!
손바닥으로 데스크를 친 헌터, 진석찬이 거칠게 항의했다.
“5급 팀보고 4등급 워프를 파괴하라고요? 미쳤습니까?!”
계양산 워프 브레이크 이후, 비상 체제 통보가 시작되고 하루가 멀다고 계속 물밀듯 항의가 빗발쳤다.
‘데스크가 워프산 원목이라 다행인지…….’
그것도 최상급으로 치는 3등급 워프의 부산물이란 게 아이러니하지만.
아무튼, 이 레퍼토리만 524번째던가?
이제는 놀라긴커녕 또 시작이냐는 생각만 드는 그녀였다.
하아, 피곤하다.
“무슨 말 좀 해 보시죠!”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니 무시한다고 느꼈는지 더 목소리를 높였다.
따지는 이유?
그야 뻔하다. 헌터 급수보다 워프 등급이 높으니까.
그녀, 이정현은 헌터 진석찬을 똑바로 봤다.
찡그린 얼굴에 강한 불만과 거드름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대접받길 원하는 부류.
‘5급 그린이면서 뭘?’
꼴값 떤다는 게 딱 이런 상황을 보고 하는 말이겠지.
어제부터 지겹게 떠들었던 말들이 기계처럼 입에 맴돌았다.
‘충분히 안전성을 고려해 파견했습니다.’
‘높은 등급의 워프 헌팅을 감안하여 한 주에 2번의 헌팅만 있습니다.’
‘비상 체제인 만큼, 수수료를 각각 1% 줄였습니다.’
‘힘내세요, 헌터님!’
……힘내기는 개뿔!
평소라면 그저 헌팅을 끝낸 헌터들의 보고와 헌터캠 수거만 하면 됐지만.
계양산 워프 브레이크가 뭔지.
하아.
이제 겨우 3일째지만 이런 항의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버티려니 미칠 것 같았다.
감정 노동에 대한 보상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억울했다. 24시간 돌아가는 협회의 특성에 따라 3교대라서 월급은 높은 편이지만, 이런 감정 노동은 업무 사항에 없었다.
각성자나 일반인이라도 피곤한데, 밥벌이가 몬스터와 싸우는 이들이니….
가만히 있어도 위압감과 살기가 풀풀 풍기는 헌터들이다. 그런 이들이 진상 부리면?
이 팀에 실려 간 경험 없는 직원은 없었다.
그녀만 빼고.
하지만 그런 그녀도 오늘따라 유난히 힘들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FM보다 지친 본심이 튀어나와 버린 건.
“뭐, 어쩌라고요?”
“…예?”
“5급 다섯 팀. 충분히 4등급 워프를 파괴할 수 있잖아요?”
워프 등급에 맞춰 같은 급수의 헌터 5명이 헌팅한다.
이게 헌팅의 정설이다.
헌터 급수보다 워프 등급이 1단계 높으면?
5등급의 헌터 5명이 4등급 한 명이라 할 수 있으니 25명만 있으면 헌팅이 가능했다.
즉, 큰 문제가 없는 배치였다.
겉으로 볼 때만.
진석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25명이서 헌팅 하라고요?! 헌터는 땅 파서 돈 법니까? 수리비는요? 장비값은요?!”
역시 어딜 가나 돈이 문제였다.
아무리 수수료를 줄여 준다 해도, 장비가 망가지면 헌터 생활도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데스크 옆 두껍게 쌓인 종이 더미에서 한 장을 쥐어 건넸다.
“비상 체제에 따른 협회 보장 내역 상세 설명서입니다. 장비 수리비 70% 지원, 상급 워프 헌팅에 한해 90% 할인 가격으로 장비 대여, 기타적으로 헌팅 워프 개수 초과 시 초과 워프당 포상금 제도까지.”
얼떨떨한 얼굴로 종이를 받은 진석찬에게 그녀는 마침표를 찍듯 덧붙였다.
“이 모든 복지와 편의는 우도현 헌터님의 요청에 의해 블랙홀에서 도움 주셨습니다.”
“우 헌터? 블랙홀이요……?”
기가 팍 꺾인 목소리였지만,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보통은 여기까지 말하면 도망치듯 가 버리는데,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데스크 앞이 아니었으면 못 들었을 혼잣말이 들렸다.
‘하, XX. 돈 조온나 많다고 돈XX이야? 노블레스 오블리주 좋아하시네, 차라리 돈으로 협회를 사시지, XX.’
평소였다면 그냥 개가 짖는다며 무시했을 거다.
하필, 오늘이 비상 체제 시작 날에 철야. 그리고 찜찜한 소식까지.
뚜렷하지 않은 복잡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래서였을 거다.
그녀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입에 담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 우 헌터님은 2주기 예정인 3등급 워프 12개를 헌팅하세요. 그것도 한 달 안에.”
‘그러니까 적당히 짖어 대고, 주는 거나 주워 먹으라고. 찌질한 새끼야!’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을 꾸욱 다물었다.
업무니까, 업무라서, 업무이므로…….
터질 듯한 화를 억지로 누르는 사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거친 살기가 그녀를 죽일 듯 쏟아졌다.
“…XX, 헌터 보고나 처받는 말단 경리 X이 죽고 싶어?!”
삐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소리가 먹혔다, 그저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일그러진 채 욕을 쏟아 내는 헌터의 입 모양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입술이, 주먹 쥔 손이, 몸 전체가 덜덜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저 쓰레기가 뱉는 오물을 맞고만 있어야 해서다.
‘참아, 이정현! 참아야 한다고! 조 과장이 이번엔 시말서로 안 된댔어!’
울컥 눈물이 났다.
옆자리의 직원, 이영은이 안쓰럽게 등을 쓸어 주며 그녀의 데스크에 ‘문의는 옆 데스크를 이용해 주세요’라는 팻말을 올렸다.
그제야 주변 소음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헐뜯던 헌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
힘내, 라고 뻥긋대는 옆 직원과 시선이 부딪히고서 현실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금세 들이닥치는 헌터로 할 수 없었다.
-흐아암, 저딴 게 헌터라니, 헌팅 때 콱 죽어 버리라지. 아니다, 내가 가서 소각장에 버리고 올까?
멍하니 정신을 놓을 뻔했던 그녀는 자신의 데스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12시간째 꿈쩍하지 않고 자던 검은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검은 가면으로 눈만 가린 듯, 입부터 배까지 이어지는 하얀 털이 인상적인 블랙&화이트 컬러의 늘씬한 고양이.
애―옹.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하는 귀여운 모습에 한 번쯤 돌아볼 법했지만, 누구 하나 반응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가 각성하면서 나타난 정령, 마루였으니까.
‘고양이가 아니라 보낸 마루의 모습을 한 정령이지만….’
오늘따라 자신의 손등을 토닥이는 흰 양말을 신은 발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또 그 고양이 생각이야? 어쩌겠어. 네 염원이 이 모습인걸. 근데 저 쓰레기 그냥 둘 거야? 곧 협회 1층이야.
‘헌터야. 당할 것 같아?’
평소 뒷담화나 정보를 물어 오는 마루였다.
가끔, 아주 가끔. 그녀를 해코지하려는 직원들을 마루가 골려 주긴 했지만, 그것도 일반인이나 6, 7급의 각성자였다.
그것마저 들킬 뻔했는데, 5급 헌터가 모를 리 없다.
-후후훗, 오늘만큼은 다를 거야!
‘어떻게?’라고 묻기도 전에 마루는 사라지고 없었다.
기운이 쭉 빠진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댔다.
머리가 멍했다.
어제, 알고 지냈던 한 헌터가 워프 던전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
‘4급 그린, 박효진 헌터….’
각성하자마자 4급 그린 판정을 받은 헌터.
힘들었던 사회생활을 청산하고 프리헌터가 되었다며 이제 숨 좀 쉬겠다던 사내.
사회생활 한 게 맞는지 서류 작성을 정말 못해서 챙겨 주다 보니 정이 살짝 들었었다.
그러다 어느새 연락도 뜸해지고 오지도 않는다 싶었더니….
워프 던전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안면 있는 헌터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일상이 갑자기 너무나도 차갑고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강한 헌터라 한들,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아마도 죽었겠지….’
헌터들의 삶이란 그랬다.
환한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그래도. 강해지고 싶다.’
최소한 이렇게 앉아 욕받이가 되느니, 차라리 이 한 몸 불살라 화끈하게 살고 싶었다.
생사의 경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