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 술이 부른다 (3)
토토의 꼬리 끝 푸른 불꽃에서 작은 불꽃들이 뿜어져 나왔다.
방금 전, 윌도가 만들었던 마법진이 순식간에 만들어지며 선홍빛을 뿜었다.
그 모습에 놀란 드워프들이 후다닥 테이블에서 멀어져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부풀었던 마법진은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렸다.
“이… 무슨……?”
헤리퍼슨이 허탈한 듯 중얼거리는데, 모르달이 감탄했다.
“오오오오! 토토 님! 새로운 기술을 배우셨슴다욧!”
얼큰하게 취한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뼉 쳤다.
호응에 더 신이 난 토토가 가슴을 부풀리더니, 홀 끝 신비한 자연이 펼쳐진 창으로 달려가 양손을 펼쳤다.
“불꼰노리! 펑펑 불꼰노리도!”
장엄한 폭포가 흐르는 대자연에 난데없이 불꽃 비가 내렸다.
울창한 숲, 물 할 것 없이 불에 타올랐다. 거기에 폭발까지 더해져 신비한 자연은 어느새 불의 지옥도로 변해 버렸다.
입이 쩍 벌어진 드워프들 사이에서 윌도가 눈물을 머금고 손뼉을 쳐 댔다.
“이런, 장엄한, 폭발! 처음! 존경!”
할 말을 잃은 케그와 헤리퍼슨이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빅마이트의 양쪽 어깨를 토닥였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또 윌도의 폭발에 휘말렸을 거야.”
딸꾹거리며 케그가 먼저 운을 뗐다. 빅마이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웅얼거렸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다 토토 님 덕이지.”
헤리퍼슨이 축 처진 그의 등을 팡 때렸다.
“화로 3개를 날려 먹었던 폭발보다 더 강했어. 터졌다면 정말 목숨을 장담 못 했을 거야. 빅마이트, 자넨 우리의 은인이야.”
“퍼슨… 케그…….”
빅마이트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해졌다.
그는 양손으로 눈물을 훔치고서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었다.
“미, 미안…하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둘의 눈이 잠깐 커졌다. 되돌아왔을 땐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케그가 헛기침하며 괜히 주변에 시선을 던졌다.
“크흠흠, 오랜만에 시원한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알딸딸하구만. 딸꾹!”
헤리퍼슨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맛있는 술에 음식까지 먹으니 홀라당 다 까먹어 버렸어.”
“그렇지! 딸꾹, 이렇게 맛있는 걸 놔두고 이러고 있을 테야? 어서 가서 마저 먹자고! 딸꾹!”
“자네들…….”
결국 빅마이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케그가 과장되게 혀를 찼다.
“쯧쯧, 마이트. 취하기라도 한 게야? 딸꾹, 자네 술버릇이 우는 것일 줄은 몰랐구만!”
헤리퍼슨이 무척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 시작인데, 이러면 마이트는 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지. 맛있는 술을 같이 못 먹는다는 게 아쉽군! 딸꾹!”
두 드워프의 대화는 만담처럼 이어졌다. 만담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울먹이던 빅마이트의 눈물은 마르고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이, 이것들이! 내가 그 정도로 취했다고?! 드워프인 내가?! 좋아, 내 주량이 얼만지 보여 주지! 벨트를 풀겠다!”
“오오오! 마이트가 벨트를, 딸꾹! 푼! 다아아아!”
토토가 불꽃놀이를 멈추기 무섭게 신비한 자연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드워프들은 헛것을 본 게 아닌지 눈을 끔뻑이다 서로를 보고 웃었다.
윌도만이 토토와 함께 마법진에 빠져 서로 깃펜과 꼬리로 마법진을 그려 대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도현은 모르달의 수다를 건성으로 들어 주며 더 끈끈해진 드워프 셋을 보다 물었다.
“만들려고 했던 게 술 창고라고?”
드워프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도현에게 시선을 모았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빅마이트가 말했다.
“그랬었지.”
“그랬었지?”
이상한 말꼬리에 헤리퍼슨이 말꼬리를 올렸다.
빅마이트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만하려고. 너무 오랫동안 내 욕심만 채웠어.”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얼굴이었다.
기뻐할 거라는 그의 생각과 달리 드워프 셋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싫어!”
“안 되네! 딸꾹!”
“그건 아니야!”
빅마이트가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술이 아니면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는 케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고!”
딸꾹거리는 그 옆으로 헤리퍼슨과 윌도가 동조했다.
셋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을 모습이었다.
빅마이트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꽉 막히려는 목을 몇 번이고 침을 삼켜 잠재운 그는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 욕심으로 구올루드 산맥의 용암이 깨어났어. 남은 건 없을 거야.”
반사적으로 케그와 헤리퍼슨이 윌도를 쳐다봤다. 용암이 깨어날 원인은 폭발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는 윌도는 어깨를 움츠렸다.
빅마이트가 다시 강하게 말했다.
“내 욕심이야. 내 욕심 때문이라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타는 목에 다시 술을 벌컥, 벌컥 들이켠 케그가 잔을 탕 내려놓으며 과장되게 웃었다.
“용암이 삼켰으면 어때?! 터야 찾으면 되고! 까짓것, 여기저기 세상 구경도 좀 하고!”
헤리퍼슨도 동조했다.
“그래, 150년 동안 산맥에 처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시던 참이었는데, 좋네!”
보기 드물게 윌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은 미안. 여행 동안 참을게. 윌도, 여행 좋아해.”
“뭐, 그렇다는데?”
케그가 실실 웃으며 빅마이트를 봤다. 빅마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대로 입을 열었다간 터질 울음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헤리퍼슨이 모른 척, 흡족하게 웃었다.
“허, 이렇게 마음 맞기는 20년 만이지?”
케그는 또 술잔을 비우며 킬킬댔다.
“그러취! 딸꾹! 그런데 이 술은 어떻게 못 가지고 가나? 처음 맛보는 건데, 사랑에 빠질 것 같구만! 딸꾹!”
헤리퍼슨이 쯧쯧, 혀를 차며 ‘또 시작이야! 주정뱅이!’라고 구시렁댔다.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토토가 식사에 집중하자 윌도는 음식을 열심히 먹으며 떠드는 모르달과 턱을 괴고 건성으로 ‘어, 어.’거리는 도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약해? 아니, 강해? 음… 이상해.’
함께 앉아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그 둘에 대해서나 여기가 어딘지, 궁금증을 가진 드워프는 없었다.
……있긴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만 집중하는 드워프 특성상 까먹고 그냥 넘겼다는 게 맞다.
그러다 윌도의 눈에 다시 띈 것이고.
‘요리, 맛있어. 폭발 같아. 술, 정말 맛있어. 폭발 같아.’
윌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마치 폭발을 앞둔 가슴 설레는 모습이었다.
이 모든 걸 가져온 건 저 검은 머리 인간이다.
윌도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인간, 누구야?”
눈을 끔뻑거린 헤리퍼슨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불의 화신님을 모시는 노예들 아닌가? 여긴 불의 화신님의 신전이고.”
“그러니 이렇게 맛있는 술에 고급스러운 그릇도 만드는 게 아니겠어? 딸꾹!”
막 잔을 비운 빅마이트도 감탄했다.
“크흐, 이렇게 무엇이든 잘 만드는 노예라니! 토토 님이 너무 부러워!”
윌도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야. 인간, 인간 맞아?”
모르달이 벌떡 일어났다.
제일 좋아하게 된 회와 꼬리 끝까지 짜르륵 울리는 기똥찬 술에 이어, 오늘은 도현이 이야기까지 들어 주자 기분이 최고조를 넘어 하늘을 붕붕 나는 것만 같았다.
“엣헴! 우리 도련님은 인간 맞슴다요! 제브라드 님도 인정하신, 우도현 도련님입니다욧!”
순간, 홀이 얼어붙었다.
빅마이트는 술이 확 깨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도현!
드워프 왕국의 왕 차클락을 죽인 인간!
술을 빚는 기술만큼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한 번 맛보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장인 중의 장인이었던 차클락은 애주가였다.
우도현의 마수가 뻗은 건 당연했다.
차클락에게 교묘히 접근해 술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 맛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차클락은 술을 더 원했고, 우도현은 그때 본성을 드러냈다.
술로 협박해 왕의 혼을 앗아 갔고, 차클락은 죽었다.
이후, 왕국은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진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술을 빚는 검은 머리 인간을 조심하라고. 절대 술을 맛보지 말라고!
빅마이트는 세상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빅마이트! 일족을 이대로 죽일 셈이야?!’
그는 두껍고 큰 손으로 자신의 양 뺨을 힘껏 때렸다.
화끈거리는 고통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도, 도망가!”
테이블 위로 펄쩍 뛰어오른 빅마이트는 양팔을 쫙 펴 도현의 시야를 가렸다.
동시에 요란하게 의자가 넘어가며 허둥대는 드워프들로 잔이 떨어지며 깨졌다.
이를 악문 헤리퍼슨이 케그와 윌도의 손을 잡고 끌었다.
하지만 케그는 앉은 상태로 넋이 나가 버렸다.
“케그! 정신 차려어엇!”
이끌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저하는데, 다시 빅마이트의 외침이 들렸다.
“어서 가! 퍼슨, 윌도 너희들만이라도 살아!”
헤리퍼슨은 입술을 씹었다. 그나마 얇고 왜소한 윌도는 끌고 갈 수 있었다.
홀의 끝, 창밖을 향해 뛰어가려는데, 윌도가 소리를 질렀다.
“토토 님!”
아슬아슬하게 토토의 꼬리를 잡아챈 윌도가 소중하게 토토를 품에 안았다.
놀란 토토가 고개를 갸웃갸웃대는 사이, 윌도가 빅마이트를 불렀다.
“마이트!”
“빨리 가아아앗!”
빅마이트는 비장한 얼굴로 회를 털어 버리고 접시를 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가한 징집병 같았다.
참담하게 일그러진 둘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크읍?!”
“어엇―?!”
세상이 멈춘 듯, 두 드워프의 몸이 허공에 멈춰 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만이 지진이라도 난 듯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현이 심드렁하게 토토를 불렀다.
“토토, 이리 와.”
“압빠!”
윌도 품에 안긴 토토가 윌도의 어깨를 딛고 뛰어내려 쏜살같이 도현의 어깨에 올라갔다.
눈을 뜬 채 기절한 케그를 제외한 드워프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식은땀을 흘려 댔다.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빅마이트만이 토토의 대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아빠…라고?”
술 빚는 검은 악마가?
막 정신 차린 케그까지 모두가 제자리에 앉았다.
난장판이 된 테이블 주변은 말끔해졌지만, 좀 전과 같은 훈훈한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 모르달과 토토만이 회를 두 접시째 박살 내고 있었달까.
의외인 점은 토토가 드워프를 옹호했다는 것이었다.
“압빠, 드어푸 착해! 잘 만드러! 착해! 맴매 안 대!”
그들은 토토에게 감동했지만 도현이 미소 지으며 토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 더 경악했다.
‘불의 화신님께 무슨 세뇌를…!’
‘재앙이다, 재앙이야! 딸꾹!’
‘대장장이의 혼이 악의 손에 떨어졌구나!’
‘헤― 토토 님 기분 좋아 보여.’
……아무튼, 제각각의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쳤다.
긴장으로 숨소리조차 조용한 가운데, 맞은편에 줄줄이 앉은 드워프를 훑은 도현이 입을 열었다.
“술 창고, 내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세뇌받느니, 죽음을 택하겠어!”
“재… 딸꾹, 크흠흠! 술이면 난 혼을 팔겠네!”
“난 절대 대장장이의 혼을 팔…! 이, 미친 케그! 술 아니면 눈에 뵈는 게 없어?!”
당황해서 케그의 어깨를 탈탈 터는 빅마이트 옆으로 윌도가 토토에게 물었다.
“토토 님, 좋아? 행복해?”
“응! 마싯는 거! 노리터! 모루달! 나뿐 신 맴매 햇써! 압빠 채고!”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젠 신계를 점령한 거였어?!’
세 드워프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