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 술이 부른다 (2)
토토로 인해 조용해진 드워프들은 자동으로 복구된 홀의 8인 테이블에 앉아 토토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마이투, 나쁜 말! 못써! 잘못, 사과해야지!”
빅마이트는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다. 능력도 계획도 좋지만, 문제는 크게 벌인다는 것. 그래서 작업도 늘 두, 세 명이 모여 합작을 해야 했다.
이번 작업도 그랬다.
구올루드 산맥은 1년 365일 더운 지역이다. 뜨겁고 덜 뜨겁고의 차이만 있는 이 산맥은 대장장이로서 화로의 온도를 최적으로 맞출 수 있지만, 반대로 술을 좋아하는 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기후였다.
술이라면 무슨 술이든 마다하지 않는 케그조차 불평해 댈 정도였으니, 시원한 맥주에 대한 갈망은 고통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빅마이트가 일을 저질렀다.
시원한 술을 먹기 위해!
그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빅마이트의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예술이란 장인의 덕목이라 생각하는 그의 철칙으로 시원한 맥주 창고 제작이 늪이 되어 버릴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장식 하나, 생김새 하나, 마법진을 새겨 넣을 방법까지.
이 모든 술통을 보관할 창고조차도 아름다워야 했다.
욕심은 커져 갔다.
창고의 중심축이 될 냉기 회로조차도 그 철칙에 제브라드 여신상으로 선택되었다.
열의를 불태우는 그에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일이었지만, 이 모든 계획을 들은 셋은 앞날이 깜깜해졌다.
계획을 듣지 않고 시원한 술이라는 말에 덥석 낚여 버렸으니.
그렇다고 그들이 빅마이트에 비해 대장장이의 능력이 뒤처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적당함을 알 뿐이었다.
삶을 욕망만으로 살 순 없으니까.
적당한 계획 속에서 삶의 질을 높인 것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의 혼에 죽고 사는 빅마이트의 제일 큰 문제는 계획을 짜고, 모두가 모여 훑고 나면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나를 언급해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결과까지 도달해 있어야 했다.
제브라드 여신상을 예로 들자면, 팔을 만들겠다고 언급하면 팔의 길이와 비율, 손가락의 굵기, 손톱의 크기, 최상의 곡선율까지.
엄격함에 이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에 질려 버렸다.
그저 시원한 술을 원했던 셋은 타협했다. 언젠가 만들어질 술 창고를 위해 빅마이트에게 맞추기로.
그렇지 않으면 또 거대한 계획으로 자신들을 들들 볶아 댈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세월을 보낸 지 20년.
예상과 달리 술 창고 계획은 이제야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창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냉기 회로만 남겨 둔 상황에서 결국 터져 버렸다. 그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쳐 버린 것이다.
윌도의 폭발.
케그의 술 중독.
헤리퍼슨의 잠.
‘지쳤다.’라는 의미를 모르는 빅마이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강철 일족들이 떠나갔던 예전에도, 현재 넷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토토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를 아주 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나 자신이 맞고 저들이 잘못됐다는 생각만 끊임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외면했어도 벌써 하고 남았을 상황이었지만, 왜인지 머리가 마지막 남은 선 앞에서 자신을 막고 있었다.
“후우…….”
빅마이트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열정, 대장장이의 혼.
독선적인 건 알지만 자신만큼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 온 드워프는 없다고 믿었다.
‘이해는 안 되지만 가슴이 시킨 일이야. 말해야지. 말해야 하는데…….’
계속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200년 평생 단 한 번도 사과를 입에 담은 적이 없었던 그다.
맞은편에 앉은 셋은 얼굴을 돌린 채 자신을 보지도 않았다.
“마이투! 맴매! 맴매해야겟따!”
토토가 테이블 위에서 발을 콩콩 굴리며 말했을 때, 도현이 음식을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먹고 하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길쭉한 접시들이 각각의 자리마다 놓였다.
그 아래 3구 종지가 두 개가 자리 잡았다.
오른쪽은 쌈장과 초고추장, 간장이 든 소스였고, 왼쪽은 곁들여 먹기 좋은 락교와 초생강, 가스오부시에 절인 단무지가 들어 있었다.
앞접시 왼쪽 대각선엔 구운 김과 김을 찍어 먹기 좋은 간장까지 각각 놓였고, 마지막으로 수저와 포크, 나이프가 갖춰졌다.
“꺄앗! 해다! 해!”
엄하게 분위기 잡던 토토는 어디 가고 먹을 거에 폴짝폴짝 뛰는 어린 원숭이만 남아 있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조리실에서 먼저 먹고 있는 모르달을 테이블의 빈 좌석에 앉힌 다음에야 인벤토리에서 머릿수대로 맥주잔을 꺼냈다.
큼직한 손잡이가 달린 유리잔으로 500ml의 대용량 잔이었다. 거기에 이중 진공 유리라 해서 이슬도 맺히지 않는다는, 신식 유리잔이다.
“오오오! 이런 잔은 처음… 헉! 이, 이건 유리?!”
빅마이트가 크게 눈을 부릅떴다.
광물보다 더 귀한 취급을 받는 유리. 그것도 모래의 작은 알갱이가 섞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잔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유리였다.
다른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음식보다 유리잔과 식기, 도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은 잔을 모아 살짝 얼린 다음, 술을 꺼냈다.
소주, 맥주, 럼주.
우선은 드워프 머릿수대로 맥주를 따랐다.
제브라드의 맥주는 진하고 텁텁한 맛이 강해 무척 저렴한 술로 인간들에게 인기가 없지만, 그 맛을 즐기는 드워프들에게는 최상의 술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모르달과 토토에게는 정량으로 섞어 취향껏 블루베리 흑초를 살짝 타서 주자, 둘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눈에 별빛이 흘렀다.
“도련니이이임♡”
모르달이 감격한 듯 잔을 양손으로 꽉 쥐고 눈물이 일렁이는 눈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못 볼 걸 본 듯 인상을 썼다.
“시끄러. 안 마시면 뺏는다.”
두 펫은 부리나케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꿀꺽, 꿀꺽, 꿀꺽, 넘어가는 목 넘김 소리에 드워프 넷이 침을 꿀꺽 삼켰다. 커진 눈이 잔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캬아아아!
속 시원한 탄성이 홀을 채웠다 사라졌다.
“허어억! 이게 수울?! 딸꾹! 이 미친 맛은 뭐야 대체!”
케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잔을 부라렸다.
“이런 술은 처음 먹어 보는데? 허… 이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헤에… 술, 팡팡 터져, 시원해, 시원한 폭발!”
그 못지않게 헤리퍼슨과 윌도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빅마이트만이 입만 벌린 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가 원했던 시원한 맛, 거기에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깔끔한 끝 맛은 정말 극찬을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빈 잔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챈 도현은 맥주가 아닌 세 가지 술을 최상의 비율로 섞어 잔을 채워 주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목을 축이는데,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케그가 술의 향을 음미하더니 도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좀 전에, 딸꾹! 불의 화신님과 신의 심부름꾼에게 넣어 준 것이 뭔가? 딸꾹, 나도 먹고 싶네!”
말없이 잔에 타 주자 섞이기도 전에 허겁지겁 들이켰다.
그러곤 몸을 부르르 떨며 만세를 불렀다.
“나,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 아니지, 아니야! 다 마시고 죽을 테다, 딸꾹!”
흔히 드워프를 대장장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말로 주(酒)신의 신자들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물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종족이다.
도현은 술을 딱 두 번 타 준 것으로 테이블 위에 술을 풀었다. 양주, 코냑, 고량주, 위스키, 보드카까지.
다양한 술병이 어지럽게 널렸다.
드워프들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제브라드에서 드워프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으니까.
드워프 왕국의 왕으로 불렸던 장인 차클락. 그의 손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들 중 감탄이 나오지 않는 건 없었다.
장인 중에서 장인이라 불렸던 그는 혼을 태우는 만큼 술을 좋아했다.
주신과 대장장이신이 차클락을 두고 싸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래곤 육아로 찾아가게 됐던 그날. 차클락은 작정을 하고 드래곤의 명령을 거부했다.
‘더 이상의 약탈은 참지 않겠다며, 차라리 죽여라, 라고 했었지.’
그런 말을 하던 차클락은 만취 상태였다.
술을 딱히 즐기지 않았던 도현은 인벤토리만 차지하는 술을 처분할 생각으로 다 던졌고, 거기에 홀딱 넘어간 차클락은 도현을 죽마고우라 지칭했다.
“크하하하, 좋구나! 좋아!”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들이켜는 드워프들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연거푸 10잔을 더 들이켜고서야 갈증을 채운 그들은 토토와 모르달이 먹고 있는 회라는 음식에 관심을 가졌다.
토토는 손에 포크를 쥐고 있었는데, 인어 워프에서 소스에 맛을 들이더니 이제는 매운 것도 곧잘 먹었다.
어디서 배운 건지 쌈장에 초고추장을 섞어 찍어 먹기도 하는 모습이 고수의 면모를 보이는 것 같달까.
그래도 찍어 먹을 때마다 꼬리의 불꽃이 펑펑 소리를 내는 게 맵긴 매운가 보다.
그때, 포크로 회를 찍어 먼저 먹은 빅마이트가 소리를 질렀다.
“헉! 이, 이게 무슨 요리야?!”
이어서 먹은 세 드워프도 술을 마셨을 때보다 더 튀어나온 눈으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소스에 찍어 먹는 과정도 번거로웠는지, 소스를 회에 붓거나 소스 통에 회를 가득 담기도 했다.
압권인 건 윌도였다.
고추냉이를 통째 회 위에다 쭈욱 짜더니 그 위로 간장과 초고추장을 뿌렸다.
그리고 입에 털어 넣었다.
“커헙! 크흡! 커헓!”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씹는 걸 멈추지 않았다.
볼이 터지다 못해 소스가 흘러내리면서도 끝까지 씹어 삼킨 윌도는 깃펜을 꺼내 허공에 선을 그어 대기 시작했다.
문을 넘어오기 전 그가 만들었던 복잡한 선이 반듯하고 복잡하게 얽혔었다면, 현재의 선은 선이라기보다 낙서에 가까웠다.
도현에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면, 먹는 데 정신 팔리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토토가 웬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윌도가 허공에 그리는 낙서에 못 박힌 듯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하던 낙서가 점점 세밀해지며 커져 갔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던 도현은 점차 형태를 갖춰 가는 걸 보고 흥미가 생겼다.
마법진. 무기나 방어구, 장신구 할 것 없이 그려 넣게 되면 마법이 깃들게 만드는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그런 게 그려진 물건들을 통틀어 아티팩트라고 한다.
고위 마법이 새겨졌거나, 유용한 마법이 새겨진 것일수록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중 하나가 도현이 하지현에게 던져 준 장갑이었다.
‘저 정도면 6서클이겠는데?’
마법진을 발현한다는 건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마법사는 외우기만 하면 된다지만, 마법진을 새기는 건 주문의 부분까지 전부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6서클의 마법사도 마법진을 그린다 한들, 정말 많이 해 봐야 3서클이 한계였다.
거기에 비하면 마법진계의 대마법사 수준.
그만큼 마법진의 크기는 이제 몸을 움직여야 할 정도로 커졌다.
우우웅―
마법진이 완성될수록 공명이 일었다. 은은한 붉은빛이 푸른색 마나 실선을 타고 흘렀다.
회에 빠져 허겁지겁 먹어 대던 드워프들도 서서히 끓는 마나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법진을 보자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침, 윌도가 마법진의 처음과 끝을 이었다.
만개한 꽃처럼 진홍빛으로 변한 마법진을 본 순간,
빅마이트가 벌떡 일어나더니 맞은편에 앉은 드워프 셋을 향해 몸을 날리면서 외쳤다.
“위험해앳!”
쿠당탕탕!
윌도가 그린 마법진, 익스플로전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푸쉬이이이… 픽!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부풀었던 마법진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곧 터질 폭발에 잔뜩 긴장한 빅마이트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팔에 치여 소리를 지르며 바둥대는 드워프들을 더 꽉 끌어안았다.
‘내 피부는 이놈들보다 두꺼우니까 괜찮을 거야!’
200년 평생을 화로 앞에서 살았다. 망치질을 해도 천만 번은 더 했을 자신의 질긴 근육이 어떤 폭발이 이어져도 이놈들만은 지킬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폭발에 잔뜩 날이 서 있던 빅마이트는 제 팔을 퍽퍽 쳐 대며 숨넘어갈 듯 소리를 질러 대는 케그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이놈의 난쟁이 똥자루야! 말 좀 들어라! 날 숨 막혀 죽일 생각이냐! 폭발 안 했다고오오!”
‘어? 폭발 안 했다고…?’
버둥대는 세 드워프의 발길질에 밀려나 일어난 빅마이트는 허공에 아무것도 없자 눈을 끔뻑였다.
분명… 마법진이…….
‘꿈, 아니 윌도가 정말 그렸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토토! 잼난 거! 발견햇써! 불꼰노리! 이건 펑펑하는 불꼰노리!”
테이블 위에서 까르륵, 웃음이 들리며 불쑥, 붉은 머리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