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93화 (93/200)

# 93

93. 정비 (2)

황금색 갑옷, 리갈루스는 자신 앞에 10열로 도열한 200여 개의 갑옷 기사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주먹에 맞은 매끈한 은빛 갑옷들이 분해되며 요란한 깡통 소리와 함께 상아색 대리석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절반의 갑옷 기사를 부순 리갈루스는 왕좌로 되돌아가 털썩 앉았다.

동시에 알현실 바닥을 어지럽히던 갑옷들이 저절로 달라붙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도열한 갑옷들을 향해 리갈루스가 진득한 살기를 내뿜으며 으르렁거렸다.

「머저리 같은 놈들……!」

왕좌 앞 첫 번째 갑옷 하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자가 주둔지를 찾을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상 밖이었다? 그게 유언인가?」

「아, 아닙니다! 주둔지를 잃었으나 헌터라는 여섯의 인간을 사로잡았습니다.」

리갈루스는 팔걸이를 검지로 톡톡 쳤다.

「여섯?」

「예, 데스브링어와 비등한 실력이 하나, 그 아래로 다섯입니다.」

「흠…….」

갑옷은 리갈루스의 노기가 누그러들자 빠르게 덧붙였다.

「방패. 막는 데 특화된 자로, 데스브링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괜찮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갑옷은 속으로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갈루스가 말했다.

「귀화가 끝나면 주둔지를 다시 만든다.」

「주둔지를 말입… 커헉!」

꽈드득, 꽈드득!

순간 어떤 자리인지 망각한 갑옷은 되묻다 온몸이 우그러지며 야구공 크기의 덩어리가 되어 리갈루스의 손에 쥐였다.

도열한 갑옷들이 작게 부르르 떨었다.

리갈루스는 점잖게 말을 이었다.

「주둔지의 위치는…….」

그가 손을 들자 허공에 홀로그램 형태의 지구본이 생겨났다.

천천히 자전하는 지구본을 보던 리갈루스는 검지로 육지 한 곳을 찍었다.

「여기가 좋겠군.」

붉은빛을 띠는 황금색 눈동자에 웃음이 스쳤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었다.

***

도현이 집에 도착한 건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협회 소속 헌터 양성에 대한 세부 계획을 논의하자고 더 잡을 줄 알았지만, 이후 문제는 삼촌이 정리하고 연락을 주기로 했다.

저녁도 먹지 않고, 대련하자고 매달리지도 않은 채 깔끔하게 보내 주는 모습에 다들 놀라긴 했지만.

내일부터 시작될 비상 체제에, 휴일임에도 쉬지 못하고 몇 시간 동안 붙잡은 게 미안해서인지도 몰랐다.

협회에 갈 때부터 입을 닫고 있던 모르달이 도현에게 물었다.

“도련님, 검은 갑옷 말임다요. 이상하지 않았슴까요?”

“뭐가?”

뭔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아주 약하지만, 신력이 느껴졌슴다요.”

“알아.”

“예에? 그런데도 그냥 두셨슴까요?!”

김경희를 베려고 했던 검은 갑옷, 데스브링어. 도현이 나섰던 이유도 미약한 신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껍데기잖아. 뭐 하러 기운 빼?”

“그야…….”

아무래도 골고타처럼 처리했으면 하는 뉘앙스였다.

“그릇이어야 뭘 하지.”

저번, 골고타와 싸웠던 워프에서 오제아가 했던 말이었다.

신이 축복했던 생물에게서 다시 힘을 거둘 순 없지만, 그 축복만으로도 생물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장의 단계를 가늠해 신이 강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생물은 그저 그 힘을 품고 있을 뿐.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고, 소비한 힘은 언젠가 사라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슴까요……?”

“신의 심부름꾼이라더니, 그것도 못 알아봐?”

도현은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제브라드의 만행에 이를 갈며 빈정댔다.

당연히 반박할 줄 알았던 모르달은 귀와 꼬리가 처져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요즘 좀 이상함다요. 예전엔 제브라드 님이 보이지 않으셔도 언제나 함께한다는 게 느껴졌슴다요. 근데 지금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슴다요. 겨우 얇은 실 하나만 남은 느낌임다요…….”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뜨끔했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아 불쾌했다.

그는 그런 마음을 숨기려는 듯 표정이 더 삐딱해졌다.

“신성력 못 써?”

“……그건 아님다요.”

“그럼 됐잖아.”

“그치만… 마음이… 꾸엑!”

도현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우물쭈물하는 모르달을 발로 차 버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예상보다 훨씬 늦었지만, 도현은 밥은 챙겨 먹고 제브라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한국인은 밥심 아니겠나.

“모루달 힘내! 갠차나! 갠차나!”

토토가 시무룩한 모르달을 토닥이는 걸 흘려들으며 무슨 요리를 해 볼지 고민했다.

‘음, 오늘 쉼터에서 만들었던 크로아 볶음탕이 꽤 맛있었지.’

곁들인 스네일이나 타이탄 레인보우의 줄기와 꽃잎도 맛이 기가 막혔다.

헌터 중에 입이 까탈스러운 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정신없이 들이켜는 걸 보며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만든 요리를 잘 먹어 준다는 건 미운 놈도 괜찮은 놈으로 보이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도현은 그 상황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역시 일반적인 음식 재료보단 워프 재료가 좋단 말인데.”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최근 농장에 직접 터를 만든 몬스터가 떠올랐다.

“키리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바빠서 잠깐 맛밖에 못 봤지만, 그 맛은 회를 쳐도 구워도 정말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거기에 저 녀석도 좋아하니까.’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려 거실에 앉은 모르달과 토토를 봤다.

둘은 방금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라 눈을 끔뻑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피식 웃은 도현은, 오랜만에 수고를 좀 해 볼 생각이었다.

제브라드에서 일어나는 일의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 신경 못 썼던 펍의 해프닝.

뒤에 민혁에게 들어보니 좀 더 깽판을 부린 뒤 일어날 걸 그랬다 싶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자신의 펫으로서 대우 좀 해 줄까 싶었다.

절대, 불쌍해서가 아니라.

‘꽤 반성한 것 같으니까, 술도.’

오늘은 꽤 맛있는 놈으로 고르자.

대신 맛있게 먹은 만큼 굴려 줄 생각이었다.

“오픈.”

도현이 즐거운 생각을 하며 식당의 약속된 단어를 말함과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끼이익―

방문자였다.

***

이미 날은 저물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그런 밖의 시간과 달리 구올루드 산맥의 한 동굴에서 대낮보다 더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입구에 서기만 해도 녹아내릴 것 같은 초고온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동굴.

그 속엔 동화에서 볼 법한 난쟁이, 아니 드워프 넷이 모루 앞에 모여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짤따란 키와 두꺼운 몸. 얼굴은 눈, 코, 입을 제외하고 길고 수북한 털로 가득한 이들.

민소매의 두꺼운 작업복을 걸친 넷은 쌍둥이로 보일 정도였다.

그중 유난히 손이 큰 빅마이트가 갑자기 망치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버럭 화를 냈다.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내가 원했던 그 아름다움은! 이런 해괴망측한 덩어리가 아니야! 이번에도 실패야! 으아아악!”

코가 붉은 케그가 반쯤 감긴 눈을 감았다 뜨며 딸꾹질을 해 댔다.

“딸꾹, 저 새끼 또 발작하는구만.”

수북한 털로 눈만 보이는 헤리퍼슨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배를 덮은 수염을 정리하며 말했다.

“끝나면 나 좀 깨워. 꼬박 사흘을 새웠더니 피곤해.”

케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술병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뚜껑을 따고 꿀꺽꿀꺽 마시더니 인상을 썼다.

“끄윽, 이거 너무 뜨끈뜨끈하잖아? 뭐, 뜨거운 대로 맛은 있군. 딸꾹! 퍼슨, 화로 앞에서 자다 수염 다 태워 먹을 일 있나? 집에 가서 처자게.”

“귀찮아. 어차피 저놈 저러다 우리 사라진 거 알면 더 날뛸 놈이야.”

케그는 웃음 대신 딸꾹질하며, 만들던 물건을 결국 화로에 처넣는 빅마이트를 안주 삼아 다시 병나발을 불었다.

그러곤 계속 혼자 중얼대는 윌도를 힐끗 봤다.

“윌도, 언제 끝나는가?”

돋보기 같은 두꺼운 안경을 쓴 윌도는 한참 전부터 깃펜을 들고 허공에 뭔가를 그려 대다 케그를 봤다.

“뭐, 왜?”

두꺼운 안경 때문에 튀어나온 것 같은 눈이 가늘어지자 케그는 한숨처럼 딸꾹질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빅마이트가 화로에 던져 버린 물건이 붉게 달궈지다 폭발한 것은.

펑! 펑! 퍼엉!

활화산에서 터져 나온 불덩이처럼 튄 물건의 파편이 동굴 여기저기 박혔다.

빅마이트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윌도를 봤다.

“윌도! 너 마법진 제대로 그린 거야?”

윌도는 케그를 봤을 때와 다르게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잘됐어. 더 그렸어!”

“더 그려…?”

케그가 술병에서 입을 떼며 키득거렸다.

“보나 마나 폭발 회로지. 딸꾹!”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는 빅마이트와 달리 윌도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빅마이트의 숨이 거칠어지며 얼굴이 화로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윌도오오오!”

퍼어어엉!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화로를 등지고 있던 빅마이트는 폭발의 여파에 몸이 튕기며 철퍼덕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바닥에 떨어진 쇳가루와 흙으로 범벅이었다.

그 모습에 케그는 배를 잡고 넘어갔다.

“크하하, 마이트, 그 모습도 잘 어울리는군! 딸꾹!”

윌도는 폭발로 팝콘처럼 튀는 불덩이를 보며 해맑게 손뼉 쳤다.

“역시 폭발은 멋져!”

빅마이트는 푸들푸들 떨리는 얼굴과 달리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윌도…….”

“응?”

“폭발… 몇 번이나 추가했지…?”

윌도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어 빅마이트에게 들이밀었다.

“3번! 마지막, 제일 강해!”

“……얼마나?”

“음, 화로 1, 2, 3보다 더?”

그 한마디에 빅마이트는 말할 것도 없었고, 여태 킬킬대던 케그까지 굳었다.

이전 대장간 3개를 부숴 먹은 것도 윌도의 폭발이다.

특히 3번째에는 정말 죽다가 살아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빅마이트는 망치와 자신의 키만 한 모루를, 케그는 아직 남은 술병을 모조리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둘은 윌도의 양팔을 잡았다.

“응? 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윌도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굴 입구를 향해 윌도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윌도가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놔! 폭발, 볼 거야!”

케그가 불콰해져 소리쳤다.

“이 미친놈! 화로에 눈먼 드워프는 있어도 너같이 폭발에 미친놈은 처음 본다! 차라리 다른 자살 방법을 찾으라고!”

“주정뱅이! 폭발, 무시해?!”

윌도는 씩씩대며 케그가 잡은 팔을 힘껏 뿌리쳤다. 취기가 잔뜩 오른 케그의 다리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윌도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빠르게 깃펜을 쥐더니 허공에 죽죽 그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푸른빛의 실선이 생겨나며 특이한 도형, 아니 복잡한 선들이 얽히고설켰다.

놀란 빅마이트가 윌도의 팔을 쥔 손을 거칠게 흔들었으나 깃펜을 따라 그어지는 선의 시작과 끝이 먼저 맞물렸다.

그리고.

쾅!

“커헉! 위, 윌도!”

작은 폭발이 일었다. 빅마이트의 몸이 날아, 동굴 입구 근처까지 굴러갔다.

구구구궁!

동굴이 진동했다. 가볍게 떨리는 정도가 아닌, 동굴 아래 깊고 묵직한 울림이었다.

‘사, 산이!’

50년간 잠들었던 용암이 땅 깊숙이 있다. 300년에 한 번 터질까 하는 그것이, 불과 50년 만에 왜…?

“폭…발…….”

멍하니 중얼거리던 빅마이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용암이 끓어오른다면 폭발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깜짝 놀란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배를 짓누르는 모루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터, 터진다! 모두 도망쳐!”

하지만 그 목소리는 두 드워프에게 닿지 못했다.

윌도는 사납게 올라간 눈으로 쓰러진 케그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딸꾹!”

깃펜을 주머니에 넣은 윌도는 케그의 허리춤의 술병을 양손으로 하나씩 꺼내 화로를 향해 던졌다.

경악한 케그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에에에! 내 수우우울!”

빅마이트는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자 낑낑대며 모루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로를 향해 날아가는 술병을 보고 하얗게 질려 버렸다.

화로 아래, 깊게 잠든 헤리퍼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퍼스으으으은!”

그래서 빅마이트는 듣지 못했다.

자신의 머리맡에 생겨난 낡은 나무 문을. 그리고 그 문이 열리는 소리를.

그때 윌도가 던진 케그의 술병이 부글부글 끓는 화로에 닿았다.

꽈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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