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 정비 (1)
대한민국과 한국 헌터 협회가 발칵 뒤집혔다.
비상 체제에 들어가기 전 하루.
헌터들에게 사기를 위해 휴가를 주었고, 미라클랜드 무료 입장과 펍을 통째 빌리는 등의 편의까지 제공했는데, 난데없이 워프 던전이라니.
거기에 헌터 6명이 행방불명이 된 일까지 겹치며 일은 일파만파로 커지기 시작했다.
한국 헌터 협회장 강혁은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소파에 앉은 헌터들을 쳐다봤다.
차 부부와 도현. 그리고 그의 펫인 모르달과 민혁까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비상 체제 때문에 오늘만큼은 아내와 보려 했던 영화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크게 사고를 쳐 주신 이 영웅들을 보자 절로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워프파크에 워프 던전이 있을 줄은…….’
워프 던전. 세상이 바뀌고 5년이 흘렀지만, 아직 정의할 수 없는 곳 중 하나.
그저 워프의 등급보다 워프 던전의 등급이 높다는 것과 보스 몬스터의 등급은 워프 던전 등급보다 최소 한 단계, 최대 두 단계나 높았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곳이라지만, 그 과정은 불빛만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과도 같았다.
오히려 끝없는 함정과 특수한 몬스터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게 허다할 정도로, 살아 돌아오기만 해도 천운이라는 곳이 워프 던전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강혁이 피곤에 전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너희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난 안심이다. 실종된 헌터들은… 너희들이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어. 그놈들이 이탈해 이 사달을 만든 거니까. 그리고 모두 같은 증언에 증거물인 영상까지 있으니 더더욱 상관없다.”
그래도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습관처럼 헌터캠을 가지고 다니는 프리헌터 김영식의 도움으로 영상까지 입수할 수 있었다.
단지 강혁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워프 던전의 발생으로 세계적 관광 명소인 미라클랜드가 한동안은 손님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워프 던전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사후 조사를 위해 최소 몇 주는 출입이 금해졌다. 덩달아 미라클랜드는 그동안 생겨날 손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기업들도 난리가 났다. 그러면서 그 손해를 국가와 협회에서 보상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무논리를 들먹이기까지.
법으로 따지면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지만, 어떻게든 손해를 줄이기 위해 위로금이라도 받으려는 수작이 빤했다.
‘유니크에서도 항의가 들어왔었지….’
대기업이라 일컫는 헌터 회사 유니크에서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헌터 협회에 사건 경위와 함께 워프 던전 조사 허가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똥 뀐 놈이 성낸다더니.’
아직 헌터들의 증언이나 영상을 발표한 게 아니라서일까, 기업이나 헌터 회사나 국가와 협회를 물로 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건, 고급 인력이 사라진 것이니 헌터 회사에 한한 게 아니라, 국가적 손실로 봐야겠지만….
강혁은 퀭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다 소파에 앉은 헌터. 제 자식 같은 아이들을 보고 애써 웃음을 그렸다. 차도식에게 물었다.
“워프 던전에서 황금 상자가 나왔다고?”
“예, 워프 던전에서 발견된 상자 중에 가장 컸습니다.”
“뭐가 나왔는데?”
차 부부는 동시에 도현을 쳐다봤다. 이상한 분위기에 강혁이 도현에게 물었다.
“조카야, 얘네 왜 이러냐?”
“상자에서 포션이 나와서요.”
강혁의 눈썹이 위아래로 휘어졌다.
“포션?”
“음, 마나 확장 포션이라 해야 하나. 마시면 마나가 늘어나요.”
“뭐라고?!”
깜짝 놀란 강혁이 책상을 쾅 치며 벌떡 일어났다.
“어, 얼마나?”
“급수로 치자면 한 단계쯤.”
“그, 그게 정말이냐? 허, 로또 던전이라더니, 진짜 로또였어?”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양은 얼마나?”
이번엔 하지현이 대답했다.
“5개밖에….”
커헉, 가슴을 부여잡은 강혁의 입이 헤벌쭉 늘어났다.
이번 계양산의 워프 브레이크 때, 몬스터만이 아닌 헌터 문제도 함께 수면에 드러났다.
도현이 끌고 왔던 5명의 헌터.
셋이야 어중이떠중이라지만, 4급이라는 두 헌터는 확실한 3급이었다.
강한 헌터 하나하나가 아쉬운 협회다 보니, 공식 3급 헌터 등록으로 처벌 없이 풀려났지만, 그는 이번 일을 쉽게 넘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포션이라면!’
어쩌면 국내 헌터계를 뒤집을 수도 있다!
하필 오늘 낮 3급 헌터 양성 성공을 발표한 미국에 이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3급 헌터 수를 공개했다.
제일 충격적인 소식은 미국의 3급 헌터였던 리암 루카스가 1급에 올라선 것인데 국내에는 도현이 있다 한들, 외국에서 강한 헌터가 나온다는 건 어쨌거나 속이 쓰린 일이었다.
요즘은 강대국을 논하는 데 헌터의 머릿수와 급수가 먼저 거론됐다.
어찌 됐든 미·중·일의 상급 헌터 발표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한국을 치켜세우던 헌터 약소국들이 한국을 무시하고 미국, 중국, 일본에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딱히 한국이 헌터로 갑질한 적은 없었으나, 뱀의 꼬리보단 용의 꼬리가 낫다는 거겠지.
강혁은 생각할수록 배알이 꼬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의 눈에 열의가 피어올랐다.
‘콧대를 찍어 눌러 주마!’
“크하하하핫!”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은 강혁은 점잖은 척 다시 물었다.
“흠흠, 포션… 어떻게 하기로 했냐?”
차도식이 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헌팅했던 헌터들에게 우선권이 있죠.”
“그건 그런데…….”
강혁이 슬쩍 도현의 눈치를 봤다.
세 사람의 시선도 도현을 향했다.
강혁은 이번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다른 헌터라면 거래의 ‘거’ 자도 꺼내지 못했겠지만, 도현이라면 가능했다.
차도식에게 대검을 준 날, 자신에게도 별것 아닌 듯 던져 준 클로
그 무기 덕에 전투력이 1.5배나 상승했으니 말이다.
반색한 그가 애절한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봤다.
도현이 덤덤하게 말했다.
“포션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죠.”
“무슨 문제?”
“헌터들의 썩어 빠진 정신.”
“…….”
강혁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애초 헌터들에게 의무란 건 없었으니까.
그저 헌터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뿐이었다.
책임과 의무를 부르짖기에는 가진 자들의 갑질이 너무나도 모범이 되지 않았던가.
이기적인 자본주의 폐해였다.
입맛이 썼다. 하루 이틀로 정리할 수 없는 문제라 더 면이 안 섰다.
눈앞에 다가온 이상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런 강혁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도현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팀을 만드세요. 삼촌 말이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헌터들로.”
“조카야, 난 협회장이다만?”
협회장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면 헌팅조차도 뛸 수 없는 몸이다.
“그럼 호위기사단, 아니 협회 소속 헌터 팀을 만들죠. 헌터 회사도 있는데, 협회라고 못 만들 이윤 없잖아요?”
차 부부와 강혁이 떨떠름해졌다.
차도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남님… 지금도 없는 건 아닙니다만, 지원자가 없습니다.”
도현의 얼굴이 삐뚜름해졌다.
강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원해 줄 수 있는 게 부족할 수밖에 없다 보니.”
헌터들은 급수에 따라 대우가 천차만별이었다. 헌터 회사들이야, 기업이다 보니 기업을 우선시하는 국내법에 자본을 쓸어 담기 바빴고, 그런 기업에 비해 자본이 한정적인 협회가 밀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모두가 심각하게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민혁은 멍하니 테이블만 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헌터가 된 지 5일밖에 안 된 파릇파릇한 신입 헌터인 민혁에게 협회장실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헌터 3급. 공식적으로 3명밖에 없는 귀한 인력이라지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은 도현의 팀원. 그러니까 일용직으로 치자면 대모(일용직 보조 작업자) 정도라 생각했다.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손재주가 없어 망치기 일쑤였으니까.
‘아, 차라리 아바 씨도 같이 왔더라면…….’
민혁은 같은 팀이지만 교류 헌터라서 못 온 아바가 그리웠다.
예쁘고, 유머도 있고, 교류 헌터라는 엘리트답게 헌터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깊었다.
특히 취향이 비슷해서 좋았다. 그리고 함께 있으면 뭐랄까, 무척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엄마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느낌이었다.
‘아바 씨는 뭐 하고 있을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8시가 넘었다.
워프 던전 쉼터에서 밥을 먹었다지만 그것도 벌써 5시간 전 이야기.
‘저녁은 먹었으려나……?’
휴대폰을 꺼내 문자라도 해 볼까 하다 눈치가 보여 손만 꼼지락거렸다.
이 자리도, 장소도 불편했지만, 1시간 넘게 앉아 있으려니 온몸이 쑤셔 온몸이 뒤틀렸다.
그럼에도 암말 없이 가만히 있는 건 눈치라도 있어서다.
자신만큼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모르달마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말이다.
‘답답하다…….’
작게 한숨을 쉬는데, 옆에 앉은 도현이 입을 열었다.
“각성자들로 팀을 꾸려 보죠.”
차 부부가 이해 못 한 얼굴로 도현을 쳐다봤다.
강혁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 말은, 각성자들에게 포션을 쓰겠다는 말이냐?”
다른 방법을 써 볼 생각이었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우선은 5명. 소수 정예로 합시다.”
하지현은 믿지 못하는 듯 도현을 살폈고, 차도식은 감격에 취해 울컥했다.
강혁은 애써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이 웃다 만 것 같아 더 이상했다.
“장기로 봤을 때 좋은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조카야, 각성자가 헌터가 된다 해도 바로 헌팅에 투입할 순 없어.”
다른 헌터들은 모르겠지만, 도현에게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오히려 방법보단 귀찮음이 더 했지만.
‘비상 체제에 내내 불려 다니느니, 이 방법이 제일 낫지.’
강한 헌터를 늘려 일을 줄이는 게 확실한 방법이었다.
헌팅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할당량을 채웠음에도 쉬지 못하고 매번 불려 다니는 건 이제 사절이다.
여태 대부분, 협회에 끌려다니다 보니 이것도 사람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래오래 제대로 구를 수 있도록.’
진심으로 양성할 생각이었다.
설명을 바라는 셋의 마음을 무시한 도현은 조건을 읊었다.
“10년 계약, 임금은 매년 100% 상승, 초과 근무 수당 2.5배, 철야 수당 5배 지급, 연차 30일, 휴가 여름, 겨울 2주씩. 이건 연차와 별도로. 급수가 오르면 인센티브 100% 별도 지급. 계약 완료 후 재계약 시 마지막 임금의 5배.”
네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민혁이 황당해서 물었다.
“너… 5년 동안 어디 계약직으로 일하다 온 거 아니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지만 도현은 픽 웃기만 했다.
강혁이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리다.”
이런 조건이라면 웬만한 헌터들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예산도, 이런 복지로 운영하려면 노동력은 노동력대로 부족하고 돈은 돈대로 든다.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도현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다.
“제가 투자하죠. 개인이 안 되면 엄마, 아빠 회사인 블랙홀로.”
순간 강혁은 책상을 뛰어넘어 도현을 와락 껴안았다.
“웁?!”
비명은 민혁에게서 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 자신의 자리와 도현의 자리가 뒤바뀐 거다.
“조카야! 사랑한다! 너밖에 없어!”
그것도 모르고 강혁은 민혁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2대 협회장은 당연히 조카다!’
“커, 커헉! 혀, 협회장…님, 저, 저, 민…혁…….”
모두가 숨죽여 웃는데, 안긴 민혁만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