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91화 (91/200)

# 91

91. 황금 상자 (6)

한바탕 쏟아부으려던 차도식은 이내 수긍해 버렸다.

‘하긴 뭐, 같이 온 워프 던전이니 헌팅 권한이 없는 것도 아니지.’

가끔 저런 놈들이 있다.

욕심에 눈이 멀어 꼭 보상이 있을 마지막 구간에서 뒤통수를 치는 놈들.

개개인이 그랬던 적은 있어도 팀째 저러니 웃음이 났다.

형식적인 보고를 자신에게 한 것도 이 자리에서 자신이 제일 급수가 높은 헌터라서일 뿐.

‘1급이었다면 밟아 버리는 건데.’

그는 입맛을 다셨다.

헌터계의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헌터 1급.

2급인 차도식도 대단하긴 했지만, 사람은 자신보다 높은 곳만 보지, 낮은 곳을 보는 이는 드물었다.

차도식은 헌터들의 불만스러운 분위기를 느꼈다.

강압할 수 없다면 빨리 보내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정식 헌팅도 아니었으니까.

차도식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차에 도현이 먼저 대답했다.

“싫은데.”

정준혁이 도현을 쳐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우 헌터님은 아직 헌터계의 예의를 모르시나 봅니다. 다섯 이상의 헌터가 한자리에 모였을 경우, 급수가 제일 높은 헌터가 리더를 맡습니다. 3급이 아니라.”

모두가 불쾌감 섞인 탄식을 내뱉는데, 차도식은 자신도 모르게 커진 눈으로 정준혁을 살폈다.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뭐… 처남님이 구제해 주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능력만큼은 정말 괜찮은 헌터이니 말이다.

도현이 나서자 차도식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정준혁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2급 헌터가 3급 헌터에게 모든 권한을 내어 주다니.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어차피 통보했으니 상관없다.’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도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빨리 끝내고 제브라드도 손봐야 하는데.

그래서 쉼터 이후 모든 함정을 없애 버리고 걷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누워서 떡이나 받아먹던 놈이 배부른 소릴 해 대니 이뻐 보일 리가 있나.

거기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분위기를 망치는 놈인데.

도현은 무리에서 이탈하는 놈들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음?”

정준혁이 움찔하자마자 나머지 넷이 뭔가에 걸린 듯 몸을 굳혔다.

당황으로 물든 그들을 보며 헌터들이 수군거렸다.

“먼저 가더니 함정에 걸렸나 봐.”

“잘나가시는 분들도 별 볼 일 없네.”

“그러게 왜 단독 행동을 해? 저게 더 매너 없는 거 아닌가.”

귀에 대고 말하듯 똑똑히 들리는 대화에 다섯의 얼굴은 붉어졌다.

이들을 멈춰 세운 장본인인 도현이 입가에 조소를 걸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예의 좋아하시네.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

낯 뜨거워진 진시형이 화풀이처럼 도현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쪽은 뭣도 아니라고 했을….”

도현이 인벤토리에서 헌터증을 꺼냈다. 헌터들에게 익숙한 헌터증이었지만, 뭔가 생소했다.

유리로 만든 것같이 무척이나 맑고 투명한 카드.

민혁과 친해져 농담 따 먹기 하던 프리헌터 민인성이 놀라 중얼거렸다.

“헐… 저거 플래티넘 자격증인데?”

헌터 1급만 가질 수 있는 플래티넘 자격증. 마력 등급에 따라 백금색, 금색, 투명으로 나뉜다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에 조용해졌던 분위기가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정준혁의 목이 고장 난 인형처럼 끼기긱 돌아갔다.

모르달이 풉! 하고 웃었다.

“고작 4급이 1급한테 개김까요?”

헌터들 사이에서 헛기침이 돌았다. 대놓고 웃을 수 없으니 최선이라면 최선이었다.

차도식만이 도현을 보고 쌍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때 다섯의 몸을 움켜쥐던 힘이 사라졌다.

그들은 입을 닫은 채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무리의 제일 끝으로 돌아갔다.

거기까지 확인한 도현이 한마디 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빠르게 가겠습니다.”

조용한 동굴 길이 이어졌다. 왼쪽, 오른쪽. 휘어짐은 있었지만, 뻥 뚫린 고속 도로처럼 편하게 달리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10분쯤.

하나라도 나왔어야 할 함정이 없어 모두가 의아한 가운데,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동공 앞에서 도현이 멈췄다.

100명 정도는 가볍게 수용할 것 같은 동공. 벽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횃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혀 있었다.

그 중심에는 중세 시대의 갑옷 두 줄이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크기만 해도 하나하나가 3m는 될 갑옷. 손에 든 무기들은 제각각이었다.

동공 전체에 피어오른 푸른 불꽃에 칙칙한 회색 갑옷이 더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줄 맨 안쪽에는 검은 갑옷이 황금 상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크기는 성인 하나가 누워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컸다.

헌터들은 동공에 들어서는 도현을 뒤따르며 흥분해 외쳤다.

“오오! 황금 상자다!”

“진짜 황금 상자야!”

모두가 황금 상자에 시선이 뺏긴 사이, 차도식은 그 위에 앉은 검은 갑옷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도현에게 말했다.

“처남님, 보스방입니다.”

“확실히 매부의 말대로 좀 더 강한 놈이긴 하네요.”

“그래도 이만하면 식후 운동으로 적당하지요. 다른 헌터분들에게도 좋은 경험일 겁니다.”

차도식은 검은 갑옷 위에 뜬 이름을 보고 인상을 좁혔다.

[데스브링어]

‘워프 던전에서 몬스터 이름이 뜬다?’

워프 던전은 몬스터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게 정설이니 이름이 뜨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그때, 동상처럼 가만히 있던 검은 갑옷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지킨다. 보물, 지, 킨다!

“오오오! 정말 뭔가 있나 봐!”

“보물이래! 와씨, 나 지금 손 떨린다!”

“그런데 저 갑옷, 강해. 4등급 워프 네임드보다 센데?”

헌터들은 침을 튀겨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반대로 차도식은 곰곰이 생각했다.

‘상자를 지킨다? 정말 뭔가 제대로 든 놈이란 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입이 헤죽하고 벌어졌다.

‘크… 희야, 넌 정말 크게 될 놈이다!’

노력도, 지식도, 열정도 남다른 김경희.

나이에 비해 빠른 성장 속도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정이 남다른 헌터였다.

거기에 노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해박한 지식과 직설적인 말투가 시원시원해 보여 처음부터 호감이 갔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존경한다는 말에 바로 제자 겸 팀원으로 합격시켰던 놈.

1년 뒤면 3급에 오를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팀을 꾸리고 첫 헌팅에서 3등급 워프핵을 부쉈다는 소식에 예사 놈이 아니겠다 싶었더니.

복덩이도 이런 복덩이가 없었다!

‘우선은 이놈 먼저 처리하고 봐야겠군.’

차도식은 흐흐흐, 계속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물고 검은 갑옷, 데스브링어를 주시했다.

3급에 가까운 4급.

‘그래 봤자 나한테는 안 되지.’

처남님이 이런 곳에 힘쓰게 만들기보단 자신이 나서서 정리하는 게 맞다.

씩 웃은 차도식이 나서려고 할 때 동공 반대편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으아아아! 출구다! 출구우우우!”

김경희가 원시인을 떠올릴 만큼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두 팔을 번쩍 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희야……?”

“아! 까먹은 거.”

차도식과 도현이 동시에 다른 말을 내뱉었다.

“형니이이임!”

도식의 외침을 들은 김경희가 울먹거리며 도식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순간 회색 갑옷들이 동시에 무기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황금 상자 위에 앉아만 있던 데스브링어가 순식간에 김경희 뒤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깡!

도현이 데스브링어의 칼을 손으로 막으며 김경희를 차도식에게 던졌다.

공격이 막혔음에도 검은 갑옷은 계속 중얼거렸다.

-침, 입자 죽, 인, 다. 상자, 지, 지, 킨다!

도현은 차도식에게 말했다.

“매부, 김경희 헌터는 모르달에게 맡겨요.”

“예, 처남님. 감사합니다.”

차도식은 도현의 등을 향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 김경희를 고쳐 안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반가움과 동시에 기절해 버린 김경희의 모습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걸레짝이 된 헌터웨어와 불구덩이에서 탈출한 건지 머리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땜빵처럼 타거나 꼬불꼬불해졌다.

“아이고, 이게 사람 몰골이람니까요? 이리 내려놓으심쑈.”

먼저 대기하고 있던 모르달은 차도식이 김경희를 내려놓자마자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은빛 기운이 김경희의 몸을 감싸 허공에 떠올랐다.

찢겨 뒤집힌 피부가 빠르게 아물었다. 화상으로 물집이 잡히거나 터져 피가 배어 나오던 상처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졌다.

낫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빠져 버리며 새로 자라나 제자리를 찾았다.

흔적만 남은 헌터 웨어까지 복구되었다면 시간을 되돌렸다고 믿는 게 나을 듯한 신성력에 구경하던 헌터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웬만한 헌터, 아니 팀보다 더 높은 능력을 가진 테이밍 몬스터라니!

헌터들은 갑옷 기사들과 대치 중인 도현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어쩌면 차도식이 떠들어 대던 ‘우도현 헌터는 신이다!’란 말이 사실이지 않을까?

묘한 기류가 생성된 가운데, 차도식은 바닥에 누워 편히 잠든 김경희의 손을 꽉 잡았다.

“잘했다. 넌 역시 내 제자다!”

인벤토리에서 모포를 꺼내 김경희를 덮어 준 차도식은 몸을 일으켜 헌터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부터 헌팅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5명씩 팀을 갖춰 저 깡통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깡통이란 말에 헌터들의 눈에 살짝 웃음이 맺혔다 사라졌다.

차도식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우도현 헌터님이 막고 계시지만, 저 검은 깡통은 제가 맡겠습니다. 더 이상 우 헌터님께 폐를 끼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먼저 가겠습니다!”

차도식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대검을 소환해 먼저 달려 나갔다.

차도식과 헌터들이 갑옷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 나갈 때, 움직이지 않은 정준혁 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가 차도식과 김경희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정준혁과 그의 팀원들은 황금 상자에서 눈을 못 뗐다.

저렇게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황금 상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

욕심에 눈이 먼 그들은 황금 상자 탈취를 선택했다.

‘거리는 20m.’

넉넉잡아 3초면 닿을 거리였다.

차도식의 대검이 데스브링어의 머리 위로 떨어졌을 때였다.

‘지금!’

정준혁이 선두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도현이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팀도 황금 상자에 지분이 있으니 할 말은 있었다. 다만,

‘우선권은 이쪽에서 접수하지.’

그만큼 수치를 줬으니 이 정도의 보상은 받아야 타당했다.

‘1초, 곧!’

뻗은 손가락 끝에 황금 상자가 닿을 때, 빠르게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입술을 씹은 정준혁이 황금 상자에 손을 올리자마자 남은 손으로 기척 주인의 목을 틀어쥐었다.

“큭…!”

당연히 헛손질일 줄 알았던 그는 놀란 눈으로 목의 주인을 확인했다.

“저…도 끼워, 주시죠…!”

프리헌터 박효진이 시뻘게진 얼굴을 억지로 휘어 웃었다.

분명 숨 쉬기도 버거울 텐데, 그 눈은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쥐어짜는 목소리였지만, 이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헌터들이다.

동굴 벌레의 기어 다니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반응은 무척이나 빨랐다.

“어? 정준혁 헌터?”

“황금 상자에 손을 대다니!”

순식간에 동굴이 어수선해졌다. 절대 곱지 않은 시선들이 정준혁과 그 팀에게 꽂혔다.

‘젠장! 이판사판이다!’

자물쇠도 없는 황금 상자. 그는 상자에 올렸던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그 시각, 차도식의 대검이 데스브링어의 허리를 갈랐다.

스걱!

가볍게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가로로 갈리는 데스브링어가 돌연 괴성을 질러 댔다.

크아아아아!

투구 안 푸른 불꽃이 갑옷을 감싸고 타올랐다. 위협적인 기운에 차도식은 자신의 최강 기술인 레드 다이너마이트를 빠르게 사용했다.

불꽃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곳의 헌터들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흐아아압!”

활활 타오르는 갑옷을 찌르고, 베고, 갈랐다.

붉은 기파가 허공을 잘라 내듯 상처를 남겼다.

푸른 불꽃을 붉은 기파가 덮으며 막을 형성했을 때, 차도식은 검을 역으로 쥐었다. 그리고 붉은 구슬을 향해 대검을 찔러 넣었다.

콰과과과광!

강한 폭발음이 동굴을 흔들었다.

당연히 동굴을 박살 낼 줄 알았던 폭발의 피해는 도현의 개입으로 동공을 울렸을 뿐이었다.

차도식은 자신 앞에 선 도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싸움을 끝낸 헌터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 폭발과 함께 사라진 붉은 구슬의 자리에 희미하게 피어오른 푸른 불꽃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하지현이 소리쳤다.

“오빠! 싸가지! 피해, 어서!”

“무슨 소리야? 다 끝냈…….”

멍청한 얼굴로 되묻던 차도식은 도현 앞에서 크게 치솟은 푸른 불꽃을 보고 눈이 커졌다.

콰아아아!

갑옷만큼 커진 불꽃은 방향을 틀었다.

황금 상자 속에 손을 뻗는 6명을 향해 쏘아졌다.

“헛?”

“뭐, 뭐야?”

당황해 피하지도, 공격하지도 못한 정준혁 팀원 넷과 프리헌터 박효진의 목을 잡고 있던 정준혁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불꽃은 수명을 다한 듯 한순간에 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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