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90화 (90/200)

# 90

90. 황금 상자 (5)

제브라드를 부르짖으며 분노하던 도현은 빨리 워프 던전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갈 계획을 짰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으니까.

정말, 제대로, 깽판을 치기로!

지구에 장난을 친 신 놈들이나 제브라드나.

힘도 되찾았으니, 걱정거리도 없었다. 정말 희박한 일이지만, 만약 뭉쳐서라도 오겠다면 그건 그것대로 환영이다.

‘해 봤자 둘셋이지.’

땅따먹기나 해 댈 놈들이 제대로 뭉치기나 하겠나.

그 정도면 시겔로에게 한 놈을 제물로 던져도 남는 장사였다.

‘제브라드는…….’

이게 제일 짜증 나는 일이었다.

신언으로 추방당한 탓에 갈 수도 없고, 그저 입으로만 떠들어야 하는데, 움직여 줄 말들이 제각각 개인 사정이 있다.

‘그래도 꼭 엿 먹이고 말 테다. 꼭, 반드시!’

도현은 이를 갈며 눈에 빛을 냈다.

지구에서의 1분이 제브라드에서는 1시간 반이 지난다. 100배란 게 이렇게 사람을 애달프게 만들 줄은 몰랐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식사도 대충 끝났을 테니, 정리하고 남은 함정만 지나면 보스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친숙한 캔맥주가 불쑥 튀어나와 치익, 소리와 함께 뚜껑이 따졌다.

“처남님, 이거지요? 잊으신 게.”

씨익 웃는 차도식을 보자 도현은 조금 전 분노도 잊고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시원한 맥주 한 캔 정도야 뭐….

굳었던 도현의 입가도 슬며시 풀어졌다.

“매부, 잘 마실게요.”

“핫핫, 이 정도야. 그런데 와이프에게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들키면 일주일 동안 잔소리 각오해야 합니다.’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캔맥주를 땄을 때부터 이미 모든 테이블의 시선이 이쪽에 몰려 있었으니까.

특히 이글이글 타오르는 하지현의 시선에 이어 멍하니 침을 흘려 대는 모르달과 토토가 보였다.

도현은 보란 듯이 씨익 웃으며 맥주를 원샷 했다.

역시 얼큰한 탕엔 맥주가 최고다.

식사가 끝나고 다시 헌팅이 시작되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도현의 뒤를 어색하게 쫓던 헌터들의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워졌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오갔는데, 대부분이 도현에 관한 것이었다.

무뚝뚝한 도현의 겉모습에 다가가길 꺼리던 헌터들은 웬만한 요리사가 한 요리보다 더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자 데면데면할 수 없었다.

프리헌터 김영식이 스스럼없이 먼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걸 시작으로 다른 헌터들도 감사의 말을 했다.

사소한 예의였지만, 오히려 도현은 마음껏 먹으라며 아직 가득한 솥에서 음식을 덜어 주기도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헌터들은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찔렸다.

헌터들 중에 도현처럼 속과 겉이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

무뚝뚝한 것도 낯을 가려서라는.

그런 착각을 시작으로 도현의 이미지가 엄청난 호감으로 바뀌었다.

덩달아 토토와 모르달의 인기도 수직 상승했다.

특히 인맥발로 찍혔던 민혁은 예상과 달리 털털하고 재치 있는 입담에 헌터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스스럼없이 도현을 대하는 민혁과 그런 민혁에게 투덜대지만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도현을 보고 헌터들은 또다시 감탄했다.

남자 헌터들은 둘을 보며 오랜만에 친구를 그리워했다. 여자 헌터들은 민혁의 옆자리라는 잿밥에 관심을 가졌다가 아바를 보고 포기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모르달과 토토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여자 헌터들의 경쟁으로 눈치 싸움도 벌어졌다.

내일부터 있을 비상 체제에 즉흥적으로 주어진 휴가였지만, 하나의 일의 연장선으로 생각했던 헌터들은 진심으로 친해졌고 더불어 워프 던전까지 경험하는 헌터 맞춤형 휴가를 사심 없이 즐겼다.

이 모든 게 도현의 작품이었다.

헌터들이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한편, 정준혁 팀이 불편한 기색으로 맨 끝에서 억지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적이 있었나?’

정준혁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짜증 가득한 시선이 도현과 그 주위를 에워싼 헌터들에게 향했다.

적의는 덤이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차 부부와 친분을 다지고 도현과는 블랙홀 사업을 추진해 교류의 장이라는, 좀 더 건설적인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이 얼마나 뜻깊은 시간인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자신이 누군가. 국내 헌터 회사 5위라는 유니크의 1팀 팀장이다.

은빛의 방패라는 별명이 이름처럼 불릴 정도로 유명했고, 세계 공식 랭커 10위라는 엄청난 타이틀까지 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사업적인 능력은 회사에서 인정할 정도다.

다재다능한 미래의 CEO, 정준혁!

하지만 계획은 시작도 못 하고 사라져 버렸다.

우도현이 저런 성격을 가진 헌터라고는….

거기에 차도식 헌터는 왜 우도현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까.

우도현에게 찰싹 붙어 가이드를 자처하는 차도식을 기가 찬 시선으로 주시했다.

둘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차도식의 주절거림.

마치 주인이 가는 곳 어디든 꼬리 치며 따라나서는 충견이 따로 없었다.

‘우도현… 차도식의 무슨 약점을 쥔 거냐…!’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계획의 실패 요인을 되짚었다.

모든 이유가 차도식이었다.

‘그러면 전면 수정한다.’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자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초조했던 마음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펍에서, 펍에서 다시 시작한다.’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봐야 했다.

오직 자신만 빛나야 했다.

계획의 목적은 이미 사라진 뒤라는 걸 정준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펍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 교류 헌터, 아바의 입에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가 나왔다.

‘갈라졌어요, 바다가.’

모두가 비웃었음에도 차도식은 끝까지 우도현을 치켜세웠다.

정말 저 말대로 신을 모시는 절실한 신도. 딱 그 모습이었다.

아무도 반론하지 못하는 상황.

그는 자신의 무대가 시작될 시간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지금까지 받은 무시에 대한 분노를 터트릴 준비를 했다.

그 시작은 만만한 교류 헌터인 아바와 우도현의 두 몬스터였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저 우도현의 펫이라는 하얀 가래떡 같은 몬스터 놈이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3급 테이밍 몬스터… 그것도 두 마리 다.

그 상황이 다시 떠오른 정준혁은 덜덜 떨리는 몸이 분노 때문이라 생각하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늦게 나타난 우도현은 상황을 정리했다.

속에서 차오르는 아니꼬움을 뱉어 내고 싶었지만, 손을 튕기는 그 동작 하나로 난장판이 됐던 펍을 한순간에 되돌린 스킬에 눈이 튀어나왔다.

입은 절로 닫혔다.

계획은 실패했다.

남은 건 분풀이였다.

우도현의 헌팅 영상으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차도식과 김경희가 폭포로 뛰쳐나가며 상황은 이상하게 흘렀다.

이후 김경희 헌터가 실종되고 워프 던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을 김영식이란 프리헌터가 떠들었다.

‘고작 프리헌터 주제에!’

속으로 분노를 표출했을 때 자신은 이미 그 말을 비웃으며 받아친 뒤였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대부분 수긍하는 눈치였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대로라면 차도식과 우도현이 아닌 자신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들썩이는 마음을 다독이며 헛기침하는데, 갑작스럽게 우도현이 소환한 불덩이가 폭포를 녹였다.

프리헌터의 말대로 숨은 워프 던전이 나타났다.

충격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렇게 큰 충격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인가…….

인정해야 했다.

우도현은… 강하다고.

걱정하는 팀원의 부축을 받아 워프 던전을 향했다.

산책이라도 하듯 워프 던전을 거침없이 헤쳐 나가는 우도현을 멍하니 따랐다.

정준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이 그렇게 비웃던 들러리 헌터 중 하나가 된 후였다.

그의 눈썹이 한층 더 깊게 찌푸려졌다.

쉼터에서 먹었던 식사가 떠올라서다.

입맛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탓에 5성급 호텔의 요리사가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자신이다.

덕분에 인벤토리 대부분의 자리가 그 요리로 가득하다는 건 인기 헌터의 공연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볼이 터질 듯 팽팽해진 건 둘째 치고, 제대로 다물어지지 못한 입가로 붉은 국물이 침과 함께 흘러내렸다.

테이블이 조용하다 싶었더니, 팀원들이 손을 멈춘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낯이 뜨거웠다.

움찔한 정준혁은 무슨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텅 빈 그릇을 발견하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때, 무심히 다가온 도현이 다시 한번 그릇을 채워 주었다.

결국 그는 세 그릇을 비우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테이블은 간간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고 숨 쉬기도 불편할 정도로 적막했다.

‘젠장…….’

우도현. 저놈은 대체 뭐지?

어떤 놈인지 감도 안 잡혔다.

저 많은 헌터들을 이끈다면 한 번쯤 으스댈 만도 한데, 걸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나태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

하지만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는 말이 무의식중에 흘러나올 정도다.

모두가 헌팅 웨어를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저놈의 옷은….

‘우 헌터님 옷이 되게 좋아 보이는데 헌터 웨어 맞죠? 브랜드가 어디예요?’

‘헌터 웨어 아닙니다. 마트에서 산 거예요.’

좀 전, 한 헌터와의 대화였다.

정준혁 팀의 팀원인 진시형은 계속 저기압인 팀장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봐도 준비한 계획이 시작하기도 전에 먼지로 비산했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끝나 버린다면 그게 더 최악이겠지.’

진시형은 일개 팀원이었지만 정준혁이 부재일 경우 부팀장 직위를 맡을 정도로 유능한 헌터였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고, 정준혁을 보며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붙여 왼쪽 관자놀이를 가볍게 톡톡 쳤다.

팀원 소통을 위한 수신호였다.

‘팀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워프 던전. 이대로 행렬을 따라 구경만 하다 끝낼 것인지, 치고 나가 혹시 모를 보상을 차지할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정준혁은 도현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계속 떠올려 봤자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어차피 쉼터를 넘겼으니 곧 보스방이겠군.’

세계적으로 워프 던전의 공식은 대개 쉼터를 중심으로 전반, 후반으로 나뉜다.

전반이 위험하고 오래 걸리는 반면, 후반은 대개 1시간에서 2시간 사이로 난이도가 완전히 낮아진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이 전반보다 더 강한 보스방이었다.

‘굳이 함께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이런 수모를 당하고서 말이다.

특히 자신을 들러리로 생각하는 놈들과는.

‘그래, 난 태생이 리더다.’

워프 던전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정준혁이 여유로운 웃음을 걸쳤다.

차도식은 가슴이 설렜다.

헌터가 되고 압사당할 만큼 많은 워프를 기계처럼 헌팅하길 2년쯤 되던 날.

헌팅 의뢰가 들어왔다.

6등급으로 등급은 낮지만 도심 지역에 생겨난 워프라 빠른 헌팅을 요구했다.

그때만 해도 워프는 무척 위험했기 때문에 헌터가 아니면 입장 자체가 금지된 상황.

4, 5등급 워프 헌팅을 밥 먹듯 하던 차도식이었으니 6등급은 휴가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워프 안에서 워프 던전을 발견했다.

국내에서 처음 나타난 워프 던전.

부푼 기대로 헌팅을 했지만, 그런 자신을 비웃듯 워프 던전 끝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후로는 워프 던전은 구경도 못 했는데.

3년 만의 워프 던전이다!

‘그것도 처남님과 함께!’

왠지 워프 던전 끝에 엄청난 보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도현과 함께했던 모든 헌팅이 그랬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휴가 날 워프 던전이면 좋은 추억이다.

‘암암, 그렇고말고.’

기분이 최고조인 차도식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익숙한 다섯의 기척에 의아했다.

유니크 1팀 정준혁 팀이었다.

“유니크 1팀은 개별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헌터들의 걸음이 멈췄다.

모두가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차도식은 정준혁을 빤히 쳐다봤다.

가끔 초대받기도 했었고, 술 한잔도 했던 사이라 나름 호감이 있었던 헌터다.

계양산 워프 브레이크에 솔선수범해 막아 낸 모습에 몇 없는 괜찮은 헌터라 생각했는데.

오늘 계속 일어나는 트러블에 사람을 잘못 봤음을 깨달았다.

거기다 지금에 와서 자유 헌팅 통보까지.

잘나시고, 사업적 수완도 좋으신 헌터시라며?

그런 것치곤 너무 대놓고 속을 보여 주는 거 아닐까?

주변은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에 아니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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