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89화 (89/200)

# 89

89. 황금 상자 (4)

30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섰음에도 쉼터는 널찍했다.

도현은 능숙하게 불을 지피고 솥을 올렸다. 솥 하나만 해도 100인분은 나올 만큼 컸는데, 하나가 아닌 세 개가 끓고 있었다.

스르릉.

도현이 첫 솥의 뚜껑을 열었다.

짙은 김이 구름처럼 뿜어지며 칼칼하고 달달한 향이 쉼터 가득 퍼졌다.

수북한 고깃덩어리들이 자작한 붉은 국물과 함께 끓고 있었다.

도현은 대형 볼에 깍둑썰기 해 둔 감자와 당근을 솥에 쏟아부었다.

지금 그가 하는 요리는 크로아 볶음탕.

처음에는 고래를 꺼내 수육을 할까 했지만, 너무 허기가 진 탓인지 자극적이면서도 속을 든든히 채울 먹거리가 고팠다.

거기에 입이 많다 보니 제일 만만한 것이 농장에 판치는 크로아였다.

크기는 소보다 더 큰 놈들이 번식력도 대단했다. 몸을 나누는 아메바가 아닐까 싶을 정도.

인어들과 호라타스로 곧 정리되겠지만, 현재 하리오카 숲까지 차지한 크로아는 농장의 생태계 교란종이 되고 말았다.

도현은 1m짜리 나무 주걱을 들고 솥 안에서 익어 가는 고기와 채소들을 뒤섞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요리는 크로아탕.

볶음탕이 된 이유는 인어들이 재배한 농작물 때문이었다.

성장 패시브가 있어서인지 하루 만에 재배가 되어 버리자 소비하는 양보다 쌓이는 양이 더 많았다.

농작을 할 수 있도록 한 손 거든 엄마는 새 사업 아이템이라며 기뻐하셨다고.

농장이 알아서 돌아가니 편하긴 했지만, 좀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신의 대리자인지 뭔지 때문에…….’

찡그려지려는 미간을 억지로 편 도현은 작은 접시에 요리를 덜어 맛을 봤다.

시간 가속 마법을 사용해 초고속으로 삶은 크로아 고기. 씹자마자 지방이 고소한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살짝 느끼할 수도 있는 맛이 뒤에 오는 칼칼한 국물에 오히려 깔끔하면서 녹은 지방의 단맛에 다시 고기를 한입 베어 먹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탱글탱글한 고기가 쫀득하게 씹혔다. 기호에 따라 이대로 먹어도 맛있겠지만, 아직은 양념이 배지 않았다.

‘좀 더 끓여야겠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절반으로 낮추었다. 막 넣은 감자와 당근이 익을 때쯤이면 고기에 양념도 밸 테다.

마지막으로 어슷썰기 해 둔 대파를 넣고 솥을 닫았다.

도현은 두 번째 솥으로 갔다.

두 번째 솥은 밥이 익어 가고 있었다.

피이이익―

솥과 뚜껑 사이로 뿜어지는 김이 맛있는 밥 냄새를 풍기며 식욕을 자극했다.

‘끓은 지 얼마 안 됐으니 조금만 더 끓이고 뜸 들이면 되겠고…….’

도현은 솥에 쌀을 부을 때가 생각났다. 헌팅을 시작하고 인벤토리에 쌀을 가마니로 넣고 다녔는데, 그걸 꺼내 들자마자 헌터들은 밥이 있다며 햅밥을 꺼내 보여 주었다.

햅밥을 처음 본 도현은 신문물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조리도 간단하고 맛도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헌팅 중인 헌터들에게 식사는 그저 배고픔을 달래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헌팅킷트가 있지만, 맛은 정말 최악이라고. 그래서 악담처럼 전투 식량이라 부른단다.

‘편의점에 도시락 천지던데 헌터용으로는 못 만드는 걸까?’

없다면 엄마한테 말해서 사업 진출해도 될 것 같다.

보관이 문제이긴 하지만, 시간 정지 마법이야, 마법진 하나 그리면 끝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요리 수업이 있었지.’

요리를 생각하니 갑자기 요리 학원이 떠올랐다.

수요일에 시작한다 했지만, 내일부터 헌터들은 비상 체제에 들어간다고 했다.

말이 비상 체제지, 내용은 헌터들을 더 빡시게 굴려 등급 불문하고 2주기에 들어가는 워프들을 정리할 셈일 거다.

‘요리사도 헌터니까 또 수업이 밀리려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전국 각지의 모든 헌터에게 내려진 비상 체제이니까.

‘그래도 들러는 봐야겠다.’

시간이 어떻게 되든 한 번쯤은 학원에 방문 할 생각이었다.

도현은 생각을 멈추고 세 번째 솥의 뚜껑을 열었다.

뽀얀 국물 사이로 한 손 크기의 스네일들이 맛있게 익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더 곁들여진 것이, 어제 토토가 워프에서 농장으로 옮긴 꽃의 줄기와 꽃봉오리다.

‘타이탄 레인보우라 했나?’

아무튼, 살짝 데쳐 먹으면 맛있다는 인어들의 조언을 듣고 토토가 가져온 것이었다.

‘브로콜리 같을까, 양배추 같을까?’

브로콜리라면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고, 양배추라면 간장 장이나 젓국 장에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아삭아삭 씹힐 그 맛을 예상하던 도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세 번째 솥의 불을 껐다.

‘찍어 먹을 장도 준비해야지.’

문득 요리에 대한 생각들이 샘솟았다. 그리고 경험을 토대로 하나씩 갖춰 가자, 나름 자신만의 한 상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쳤다.

‘내가 직접 해냈구나.’

갑자기 가슴이 뿌듯했다. 요리로 인해 살짝 올라갔던 입꼬리가 진하게 휘어졌다.

순수한 기쁨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양쪽 입꼬리를 한 손으로 주무르던 도현은 제브라드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제브라드에 떨어져 살기 위해 먹었던 몬스터 고기. 그 독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목숨 대신 미각이 사라졌다.

그 때문인지 잘 내보이지 않던 감정은 더 가라앉았었다.

그나마 페론드 때문에 가끔 표현했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서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집에 돌아온 뒤로 편안해져서일까, 미각은 페론드와 함께할 때만큼 돌아왔었지만 감정의 고조는 비슷했다.

‘지금과의 차이가 뭐지?’

제브라드에게서 뜯어낸 태초의 씨앗으로 미각을 완전히 찾았고, 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헌팅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만들고 있는 요리를 제외하고서도 다양한 요리해 보고 싶어졌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등.

‘아… 의욕.’

모든 게 귀찮았던 성격에 금이 가며 그 아래 묻혔던 감정이 하나둘씩 빠져나온다.

‘그래. 요리가 하고 싶다.’

좀 더 다양하고 맛있는 요리를.

그리고 그걸 만들어냈을 때의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졌다.

가슴에 퍼졌던 뿌듯한 느낌.

페론드와 강해지며, 나라를 만들며 느꼈던 그 감정을 요리하면서, 그리고 먹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아.’

흡족한 웃음이 입가에 그려졌다.

다시 찾은 즐거움.

페론드가 없어도, 혼자 즐거울 수 있다는 것.

“즐겁다라…….”

가끔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계획을 짰던 페론드가 떠올랐다.

그 계획은 늘 실패하고 분통을 터트리던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며 푸하하, 웃었던 자신.

“푸흐흐.”

그 즐거움이 오랜만에 느껴졌다.

‘너 없이 혼자 즐거워도 되겠지?’

그 녀석 얼굴에 대고 물었다면 1초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난 남자한테 취미 없다. 복세편살!’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라고.

띵언… 아니, 명언이라며 외치던 놈.

언제부턴가 저처럼 줄여 말하는 모습이 정말 한국인 같아 웃겼던 친우 놈.

혼자 웃던 도현이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꼈을 때였다.

띠링!

[손실된 능력치가 100% 복구되었습니다!]

[--- 조건 1]을 달성합니다.

한편, 김경희는 워프 던전에서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슈슈슈슉! 콰광! 쿠르르릉!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폭탄과 쏟아지는 불화살에 온몸은 검댕으로 가득했다.

겨우 헤쳐 나왔다 싶으니 동굴이 무너져 뭣 빠지도록 뛰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옮겨 동굴이 조용해지자 털썩 주저앉은 김경희는 눈물을 주륵 흘렸다.

“헉, 헉! 던전이 왜 이 모양이냐고오오오…….”

기대에 부풀었던 워프 던전. 여태 쌓은 헌팅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만했던 그는 수없는 함정에 영혼이 갉아 먹힐 것 같았다.

“차라리 몬스터나 나오라고오오!”

칼을 휘두르든 주먹으로 패든 해야 성미에 맞는데, 이 워프 던전은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워프 던전!”

김경희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에 못 이겨 주먹으로 동굴 벽을 쳐 버렸다.

꽈르르릉, 쿵!

동굴이 진동했다. 등이 서늘해 돌아보니 자신 두 배만 한 돌이 굴러오고 있었다.

김경희의 눈이 번뜩였다.

“내가 또 도망칠 줄 알아?!”

벌떡 일어선 그는 여태 계속 쥐고만 있었던 예비 검을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매끈한 검날을 타고 마나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발치까지 굴러온 돌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서늘하면서도 깔끔한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간 돌이 동굴 양쪽 벽에 처박혔다.

“그으으뤠에에에! 이거지! 이거야!”

피어나는 먼지 속에서 박장대소하던 김경희는 쪼개진 바위 하나가 벽 안에 숨겨진 함정을 건드렸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화르르륵!

한참 웃어 젖히던 그는 불길한 소리에 흠칫 떨며 돌이 굴러왔던 길을 슬쩍 보곤 빠르게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씨이이바아아알!”

용암 덩어리 같은 시뻘건 불길이 동굴을 집어삼키며 그를 바짝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살아야 해!’

여기서 죽으면 정말 개죽음이 따로 없었다. 워프든 워프 던전이든 살아서 나가야 의미가 있는 거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조금이라도 닿으면 타 버릴 것 같은 열기가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어어어!’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의 빛이자, 목표이자, 삶의 이유가 되었던 차도식 헌터!

드디어 그분의 팀원이 됐는데!

‘도식이 형니이이임!’

동굴에 떨어지기 전 차도식과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자 경희는 눈물을 머금으며 외쳤다.

“으아아악! 바아아아가아아압!”

처량한 비명이 동굴에 울려 퍼졌다.

***

“어?”

도현은 얼큰한 크로아 볶음탕을 흡입하다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남님,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감탄하며 스네일을 뜯던 차도식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도현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도식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뭔가 떠오를 듯 말 듯만 했다.

그때 두 테이블 건너 여자 헌터들만 모인 테이블에서 모르달이 감탄을 남발했다.

“도련님! 크로아탕이 기가 막힘다요! 워프 던전에서 먹어선지 더 기가 막힘다욧!”

“헥헥, 양양이 탕 매워! 근데 마싯쪄! 무무! 무울!”

물을 찾아 팔딱대는 토토와 ‘이럴 땐 시원한 맥주가 최곰다욧! 매애액주우우!’라고 외치는 모르달의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알림이 떴었는데.’

농장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와 설치하는 두 펫 때문에 까먹고 있었던 알림을 확인했다.

[손실된 능력치가 100% 복구되었습니다!]

“오…….”

며칠 전 85%를 복구했다는 알림 뒤로 신경을 끈 탓인지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갑자기 100%?’

좋아야 할 문젠데 왜 기분이 나쁠까?

지구에 장난을 친 신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힘을 완전히 되찾아야 하는 건 맞는데…….

‘그래, 그 페널티.’

쑥과 마늘을 먹어야 했던 그 일이 떠오르자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거기에 되지도 않는 ‘신의 대리자’라는 직업까지.

‘다 떠맡기고 잠수를 타?’

생각만 해도 열불 나고 이가 절로 갈리는 상황에 당장에라도 모르달을 쥐어 패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참기로 했다.

‘절대 불쌍해서가 아니야. 크로아 볶음탕이 식으면 맛없으니까.’

다시 양념이 잘 밴 크로아를 한입 크게 베어 물던 도현은 알림 메시지가 하나 더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곤 상태창을 열었다.

[--- 조건 1]을 달성합니다.

“이건 또 뭐야?”

상세 설명을 확인하기 무섭게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 조건 1]을 달성합니다.

-대상의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상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조건 2] ???

*격이 부족해 조건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이건 빼박이다!

‘신의 조건’이 분명했다!

도현은 이를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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