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 황금 상자 (2)
차도식의 미약한 마나가 마음에 안 들었던 디하라크는 그가 수련이라는 멍청한 짓을 할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당장 워프에 가서 워프핵을 삼키란 말이야! 그럼 넌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거라고!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다시 한번 폭포를 가른 차도식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난 짐승이 아니야. 노력으로 정당하게 강해질 거다.”
차도식에게 채근석의 일은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강한 힘.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힘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건 자신이 추구하는 힘이 아니다.
디하라크는 그런 차도식의 생각에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강해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그 과정에 의미를 두는 것인지 그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도식이 다짐처럼 말했다.
“처남님을 위해 한 점 부끄럼 없이, 꼭 밥값을 하고 말 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하라크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 이, 미친……!
오만 욕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뱉고 싶었지만, 마침 멀리서 다가오는 미친 인간의 기운에 다시 숨어야 했다.
도현은 씩씩대며 걸어가는 하지현을 따라 폭포와 싸우고 있는 차도식에게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모르달과 민혁, 아바가 뒤를 따랐다. 여기까지야 같은 팀원이니 이해되는 이동이지만, 남은 헌터들은 왜 따라오는 건지.
헌팅 영상으로 잡음이 사라져 편하긴 한데, 안면이라도 트고 싶은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폭포에 도착하자마자, 대검이 가른 폭포가 다시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물을 흠뻑 뒤집어쓴 차도식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
하지현이 차갑게 따졌다.
“오늘 수련 안 한다며?”
차도식은 폭포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밥값 해야지.”
“오늘만큼은 절대 안 하겠다며.”
대검을 내리긋던 그의 팔이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직 이렇게나 부족한데 어떻게 놀겠어!”
“하하…….”
허탈한 웃음에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꼬리처럼 따라온 헌터들의 의아한 시선들이 하지현에게 꽂혔다.
“그렇단 말이지.”
그녀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하지현은 휴가로 인벤토리에 넣어 둔 액세서리를 꺼내 양팔 가득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도현이 준 장갑을 꺼내 꼈다.
막힘없이 이루어진 헌팅 복장에 살짝 불안함을 느낀 차도식이 그녀를 불렀다.
“여보……?”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편 하지현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붉은 불꽃이 일렁이며 그녀의 손을 감쌌다.
“부숴 버릴 거야! 전부 다!”
하지현은 도식의 대검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당황한 차도식은 검면을 들어 주먹을 막았다.
콰아앙!
-어, 어억헉?!
디하라크는 보석에 닿는 뜨거운 충격에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제 시작이었다.
쾅, 쾅, 쾅, 콰아앙!
-크아아악! 이, 이 미친년! 말려, 말리란 말이다! 어어억!
차도식은 미칠 노릇이었다.
대검으로 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반격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아내 아닌가.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듯 그녀는 더 매섭게 달려들었다.
디하라크의 분노에 찬 욕설과 비명이 함께 울렸다.
“여, 여보 잠깐! 내, 내 말 좀……!”
자신을 노려보는 하지현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차도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그녀가 땅을 박찼다. 쏜살같이 날아가는 방향은 물을 콸콸 쏟아 내는 폭포였다.
“여, 여보오오오!”
비명인지, 외침인지 모를 차도식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녀는 불꽃에 휩싸인 주먹을 폭포에 냅다 갈겼다.
꽈과과과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하늘이 울리더니 돌무더기들이 우박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오늘 휴식을 위해 헌터를 제외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한 탓에 재난에 휩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
아니, 한 사람 있었다. 차도식과 마찬가지로 폭포가 떨어지는 바닥 아래.
동굴에서 수면을 가르던 김경희였다.
김경희는 어제 워프핵을 부쉈을 때, 3급이 된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떤 테스트를 해도 결과는 4급이었다.
어떻게 워프핵을 파괴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일은 김경희의 노력 때문이라 결론을 내렸다.
푸르스름 하루가 다시 밝아 오던 시각, 하루를 마감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허탈감과 허망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더니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오늘 휴가도 팀원 전원 참석이 아니었다면 헌팅이랍시고 화풀이나 해 댔겠지.
휴가에서 헛헛한 가슴에 불 지른 건 차도식 팀장님이 떠받드는 처남, 우도현 헌터.
첫 공식 데뷔 때도 멋졌지만, 이번 헌팅 영상은 한 편의 영화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놀 때가 아니지.”
도현의 헌팅 영상을 다시 떠올린 김경희는 검을 고쳐 잡았다.
폭 10m에 이르는 계곡은 떨어지는 폭포에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꿈틀대는 생경함.
이 물길을 검으로 아무리 내려쳐도 수면 위로 찰박거리는 물보라만 만들 뿐이었다.
그때였다.
“엉?”
위에서 뭔가 말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귀가 먹을 정도의 굉음에 동굴이 진동했다.
“뭐, 뭐지?”
설마, 몬스터라도 나타난 건가?
특수 워프라 거대한 개구리를 제외하면 몬스터의 ‘몬’ 자도 구경하기 힘든 워프인데?
당황하는 사이 삽시간에 퍼진 균열이 동굴을 무너트렸다.
쿠구구구궁!
“어… 어……!”
쾅! 콰광! 우르르르!
하지현의 주먹이 폭포에 닿을 때마다 장관을 자랑하던 폭포는 포크에 유린당하는 조각 케이크처럼 부서졌다.
사방으로 튀는 돌덩이와 돌 부스러기가 폭탄이 되어 계곡을 초토화시켰다.
폭포 앞 매장이 들어선 건물. 위치상 제일 위험한 곳이었지만 도현의 손짓 한 번에 날아오던 돌무더기는 튕겨 나가기 바빴다.
콸콸 쏟아지던 물은 이제 그녀의 몸을 감싼 불꽃에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 퍼져 나갔다.
짙은 안개가 주변을 메웠다.
모두가 넋을 잃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폭포를 바라보는 가운데 눈치를 살피던 민혁이 도현에게 물었다.
“현아, 안 말려? 괜찮은 거야?”
“부부 싸움에 끼어드는 거 아니야.”
그랬다.
다른 헌터들은 당연하게 도현이 중재할 줄 알았지만, 이건 일반 싸움이 아닌, 부부 싸움이다.
그 한마디에 뜨끔한 차도식이 손에 쥔 대검과 안개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박살 나는 폭포 쪽을 번갈아 봤다.
“하아…….”
차도식은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에 빠지면 그것만 보고 돌진하는 성격.
장점이라면 어떻게든 끝을 본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것조차도 단점을 예쁘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지금처럼.
‘강해져야 하는데, 처자빠져 놀아? 먹는 게 목구멍에 들어가? 그 시간에 검이나 들어!’라는 생각과.
‘그래, 워프 좋지! 강해질 수 있잖아? 이번엔 어떤 워프를 가 볼까? 3등급? 아니지, 2등급은 돼야 하지 않아? 목숨을 건 전투! 얼마나 강해지겠어?!’
이런 미친 생각까지.
머리로는 어서 빨리 그녀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잘못이 없다고 배를 들이밀고 있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야 하는데 아직도 망설이고 있지 않나.
‘……난 정말 쓰레기구나.’
자책하는 사이 도현이 다가와 차도식의 어깨를 잡았다.
시선이 맞닿자 도현이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매부, 간절함 때문에 소중한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별것 아닌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차도식을 찔렀다.
도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가서 빨리 데려오세요. 더 지체하면 용서도 못 빌어요.”
민혁과 아바가 놀란 눈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저 성격에 그런 걸 알고 있는 게 신기해서다.
차도식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것.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소중한 건…….
‘한 번 잃으면 끝이다.’
그는 곧바로 대검을 소환 해제했다. 아직 굉음이 터져 나오는 폭포에 있을 하지현을 향해 달려갔다.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차도식의 뒷모습을 보며 민혁이 슬쩍 도현에게 물었다.
“너, 여자 모르지 않았냐?”
도현은 페론드의 부인이자 황비였던 헤이오나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뭐, 30년 정도 겪어 보면 절로 알게 되지.”
“응?”
민혁이 되물었지만, 도현은 그저 웃기만 했다.
***
거센 바람이 불며 폭포를 뒤덮었던 안개가 사라졌다.
물을 쏟아 내던 폭포는 폭삭 주저앉아 쪼개진 상태였다.
절벽에서 떨어지던 물은 50m나 더 멀어져 무너진 돌의 경사로를 따라 주저앉은 폭포의 웅덩이를 채우며 아래로 흘렀다.
시원한 맛의 폭포는 사라졌지만, 호수 같은 웅덩이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난장판이 된 주변을 정리하고 다듬는다면 말이다.
헌터들이 3급의 힘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동안 30분 만에 나타난 차도식은 한쪽 뺨에 붉은 손도장을 찍은 채 하지현과 함께였다.
하지현이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다들 배고프실 텐데, 들어가서 식사 계속하죠!”
차도식도 한 박자 늦게 ‘민폐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외치며 웃었다.
도현은 그 웃음이 오랜만에 시원해 보였다.
모두가 의식적으로 차도식의 뺨을 모른 척했다.
어색해진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지고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멈춘 차도식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호, 혹시 김경희 헌터 보신 분……?”
전부 고개를 저었다. 하지현까지 당황해서 그에게 물었다.
“경희 어디에 있었어…?”
“폭포 아래… 동굴에…….”
“도, 동굴?!”
놀란 그녀가 뒤돌아 무너진 폭포를 봤다. 같은 높이의 지면이 움푹 내려앉았다.
적어도 20m 이상.
새파랗게 질린 하지현이 멍하게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
“아우, 머리야…….”
김경희는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목소리가 넓게 울리자 아직 동굴 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경희는 침착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눈동자가 밝은 푸른색으로 빛나며 깜깜했던 동굴이 불빛을 비춘 것처럼 내부가 속속들이 들어왔다.
“높이 30m쯤, 넓이 10m, 길이가 100m…? 길게 이어진 걸 보니 통로 같은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시야를 확보하던 그는 마른 바닥에 의아했다. 분명 폭포 아래 깊은 동굴에 빠졌으니까.
“물바다인 것보단 낫지. 아무튼, 크게 위험은 없을 것 같고.”
이어서 몸을 살폈다.
옷은 이미 찢어지고 흙에 더럽혀져 엉망이었지만, 상처라고는 쓸린 게 다였다.
“그나마 헌터라서 살았지… 각성했다 해도 어디 하나는 부서졌겠어.”
갑자기 동굴이 무너졌을 때, 그는 반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밟고 있던 바닥까지 꺼져 버리자 휩쓸리고 말았다.
“헌터 웨어라도 입고 있을 걸 그랬나.”
그랬다면 이런 상처도, 옷을 버리지 않아도 됐을 거다.
“그나저나, 여긴 왜 마나 농도가 짙지?”
조용한 동굴. 정체된 공기가 텁텁하면서도 갑갑했다. 거기에 7등급 워프치고 마나 농도가 짙었다.
대략 5등급쯤?
엥? 워프가 7등급인데 농도가 5등급…?
“아! 워프 던전!”
기억을 떠올린 김경희의 얼굴이 밝아지다 못해 붉게 상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