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 워프파크? (4)
차도식은 차가운 시선으로 정준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준혁 헌터님은 빌런킹과 싸우던 우도현 님을 못 보셨습니까?”
“그때 차 헌터님은 지친 상태 아니셨습니까? 워프도 모든 게 정리된 상황이었고, 차 헌터님과 한차례 싸웠던 빌런킹도 힘이 빠졌겠죠. 그러니 말짱한 우 헌터가 정리할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대부분의 헌터들이 정준혁의 말에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식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욕을 뱉으려고 할 때였다.
“거기 인간, 말이 심하심다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모르달이었다.
정준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는 몬스터까지 시비다.
“말 좀 할 줄 안다고 네가 헌터라도 되는 줄 아나? 하찮은 몬스터 주제에.”
그저 눈살만 찌푸렸던 모르달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토토가 화들짝 놀랐다.
“호곡, 아찌, 나쁜 말, 안 대! 모루달 화나써! 어떠케, 어떠케!”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헌터들은 의아했다.
오직 모르달의 능력을 아는 차 부부만이 서둘러 모르달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모르달이 빨랐다.
“몬스터? 지금 소인더러 몬스터라고 했슴까요?”
몬스터를 제일 혐오하는 게 모르달이다.
늘 웃는 얼굴만 보던 헌터들은 당황했다.
민혁과 아바는 충격이 제일 컸다.
도현에게 그렇게 맞아 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르달이 정말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준혁은 네 사람이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다. 고작 5급밖에 안 되는 몬스터 때문에.
‘시간 낭비했군.’
비즈니스 겸 그렇게 떠들어 대는 우도현이란 놈이 궁금해서 왔더니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기분도 더럽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간만 낭비했군요. 내 팀은 이만 가 보겠… 큽!”
갑자기 날아온 하얀 꼬리에 정준혁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었다.
휴가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지만, 은빛 방패 정준혁이다. 5급 따위의 공격은 간지럽지도 않아야 했다.
그런데…….
‘윽?!’
꼬리를 막은 팔이 화끈거리며 바늘 수천 개가 찔러 대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4등급 워프의 네임드를 훨씬 능가한다.
‘5급이… 아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는 생각으로 상태창을 불렀다.
체감으로는 체력이 30%는 깎였을 거라는, 그 예상과 달리 깎인 체력은 1이었다.
당혹감을 느끼기도 전에 다시 날아오는 하얗고 두꺼운 꼬리에 허겁지겁 옆으로 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 몬스터가!”
피하기 무섭게 또다시 날아오는 꼬리에 정준혁은 펍의 나무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헌터들이 아직도 폭포 앞자리에 앉은 도현의 뒤통수를 보며 외쳤다.
“우도현 헌터! 몬스터를 멈춰요!”
“몬스터가 헌터를 위협하다니! 이런 위험한 몬스터를 풀어놓으면 어떡합니까?!”
휴가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헌터들의 항의에 모르달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천천히 날리던 꼬리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매서워졌다.
정준혁은 죽을 맛이었다. 근처, 손에 잡히는 집기란 집기는 다 들어 꼬리를 막았다.
그럴 때마다 모르달의 꼬리가 족족 집기들을 쳐 냈다.
조각나 파편이 되어야 할 집기들은 이상하게도 철썩거리는 소리만 날 뿐, 멀쩡한 형태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정준혁은 현실을 믿지 못하는 듯 눈을 끔뻑였다.
꼬리가 닿으면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그건 의자나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꼬리가 닿았던 바닥도 말끔했다.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지만 역시나 깎인 체력은 1.
미칠 노릇이었다.
정준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이런 개 같은……!”
콧방귀를 킁, 하고 뀐 모르달이 팔짱을 끼며 나무랐다.
“소인, 모르달. 몬스터와 비교하지 마심쑈. 인간. 이 어여쁜 모르달의 어디가 몬스터라는 검까요?”
무척이나 평온한 말투였다.
오히려 도현에게 따박따박 따질 때보다 더.
하지만 정준혁은 그 모습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내가……?’
그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그는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무기, 스파이크를 꺼내 힘껏 휘둘렀다.
퍽!
모르달의 꼬리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준혁은 비릿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가시에 터져 나갈 꼬리가 곧 눈앞에 펼쳐질 테니까.
그러나 결과는 정말 터무니없었다.
텅! 데구르르르.
뚝 부러진 스파이크의 머리가 찌그러진 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멍청하게 서서 바닥에 뒹구는 스파이크를 쳐다봤다.
모르달이 코웃음 쳤다.
“고작 4급 헌터가 이 모르달에게 덤빔까요?”
도현을 부르던 헌터들은 그 모습에 목소리가 뚝 끊겼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이… 이……!”
정준혁은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번들거리는 눈이 모르달을 향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살랑거리는 꼬리. 그 끝에 걸린 링에서 시선이 멈춰 버렸다.
회색과 초록색이 섞인 가락지 형태의 링. 눈이 부릅떠졌다.
‘저건 몬스터 포획용 링……?’
회사 의뢰 때문에 간 연구소에서 우연히 보게 된 링이었다.
연구 목적으로 3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포획할 때 쓰는 링.
한 번 착용하면 풀 수 없고, 어마어마한 고통에 몬스터들도 울음을 터트린다 했다.
저 링 하나에 30억은 우습게 깨진다고 들었는데…….
그런 링을 끼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르달을 깨닫자, 그는 차가운 얼음을 삼킨 듯 소름 끼쳤다.
‘최소’ 3급.
“허…….”
왠지 건들면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부순 것 같았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정 팀장님!”
넋이 나간 정준혁에게 팀원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정준혁을 몸으로 가리며 모르달을 경계했고, 나머지 두 사람이 그를 일으켰다.
모르달을 경계하던 팀원, 진시형과 조태현이 대놓고 살기를 뿌렸다.
“감히 몬스터가 탱커를 농락해?”
“팀장님! 이 문제는 가볍게 못 넘어갑니다.”
정준혁을 부축하던 두 사람도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4명이 모르달을 압박하자 당황한 건 모르달이 아닌 정준혁이었다.
“모두 무슨 짓…!”
그사이 아바의 품에서 겨우 벗어난 토토가 후다닥 뛰어와 모르달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모루달, 모루달 갠차나? 저거 모루달 때찌햇써! 나뻐! 토토가 혼내 주께!”
모르달 앞에 네발로 선 토토가 꼬리를 세우며 적의를 불태웠다.
본능적으로 움찔한 정준혁 팀원들의 머릿속에 어제의 토토 모습이 떠올랐다.
3m의 거대한 덩치의 붉은 고릴라. 푸른 불꽃에 닿은 모든 몬스터는 순식간에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졌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워프 안으로 들어가 보스 몬스터라는 꽃조차 아무렇지 않게 뜯어 온 괴력까지.
팀장이 당했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려와 소리쳤던 팀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정준혁 눈에는 모르달과 마찬가지로 토토의 꼬리에 끼워진 링만 시야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모르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의 공격력은 1. 저들을 떡으로 만들 순 없었으니 토토 님께 맡기면 확실하게 처리해 줄 거다.
엄지를 치켜든 모르달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으르렁거렸다.
“토토 님, 뜨거운 맛 좀 보여 주심쑈.”
토토의 손이 허공에 푹 담겼다 빠졌다. 빈손에 새카만 도자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김경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뚝배기…?”
얼이 빠진 헌터들의 머리 위로 무수히 찍히는 물음표는 곧 이어진 토토의 행동에 느낌표로 바뀌었다.
“맹매!”
토토가 가볍게 뛰어 정준혁의 머리를 뚝배기로 후려쳤다.
분명 4명의 헌터가 에워싸고 있음에도 어떻게 된 일인지 토토를 막지 못했다.
그 결과.
빠악―!
“커억!”
상상도 못 한 타격음과 함께 정준혁이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충격과 공포였다.
토토가 다시 네 사람을 향해 맴매를 휘두르려 할 때….
“후우….”
폭포 앞 창가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순간 손에 쥔 뚝배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양손을 뒤로 숨긴 토토가 창밖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도현은 폭포를 보며 감상에 젖기도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커네팅 창에 정신이 없었다.
지구의 시간으로 반나절이지만, 제브라드 시간으론 100배 즉 50일이 지난 거다.
[백부님, 노아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어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 있어요!]
헤미오르가 보낸 첨부 파일인 양피지를 훑었다.
상황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몰락 귀족의 자제로 아도노스 아카데미에 기사로 입학, 검에 대해 엄청난 자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기사가 되어 주길 바랐지만 이를 거부했고, 결국 앙심을 품은 귀족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퇴출되었습니다.
그길로 카자크라마국(현재 노아국 수도)으로 돌아갔습니다.
1년 후 소드마스터가 되어 카자크라마 5세의 호위기사단 단장으로 발탁되면서 백작으로 신분 상승하였고, 그로 인해 카자크라마국이 부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없었으나 주변국들이 카자크라마국에 흡수되면서 5년 후 카자크라마국은 10배로 확장되었습니다.(현재 노아국의 크기입니다.)
다시 1년 후 카자크라마 5세가 갑자기 쓰러졌고, 반년도 안 되어 사망했습니다.
카자크라마 5세가 남긴 유언은, 다음 왕위를 노아에게 넘긴다는 것이라 합니다.
유언이 발표되자마자 왕비와 황태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계승권 포기, 모두가 동의하며 노아가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즉위식을 치르자마자 카자크라마국을 노아국으로 공표하여 약 23년째 통치 중입니다.
20년 전 왕비를 맞이하였으나 자식은 없으며 첩도 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근 그가 꿈의 경지라 하는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다는 정보 입수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노아로 알려져 있으나 풀네임은 노아 이선이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몇몇만 아는 정보였습니다.
*백부님께서 주신 물건과 함께 그라드 님과 라스 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보를 모으는 도중 그라드 님께서 상처를 입었으나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내, 알려 드리겠습니다.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 올림
이 양피지 한 장으로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진 느낌이었다.
‘미국에서 사라졌다는 그 헌터가 왜 저기에?’
저놈이 사라진 날부터 계산해 보자면 최소 150년이 흐른 상태.
그럼 이 사달이 난 이유가 저놈의 깽판이라는 건데.
제브라드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괴롭힌 목적 중엔 저놈의 죗값도 포함된 게 아닐까?
‘그래서 나한테 다 떠넘기시겠다?’
나를 돌려보내다 생긴 일이라서?
‘개소리. 애초 게임에 그런 마법을 걸어 둔 게 누군데?’
도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추려 헤미오르에게 보냈다.
대충 일을 마친 도현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보니 여기도 개판이다.
종업원들은 한곳에 모여 덜덜 떨면서도 휴대폰을 꽉 쥔 폼이 촬영 중이었고, 헌터들은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었다.
차 부부와 그들의 팀원, 도현의 팀원인 민혁과 아바.
그리고 모르달 앞에 모인 다섯 헌터를 제외한 모든 헌터가 멀찍이 떨어져 구경 중이다.
도현은 딴청 부리는 토토의 앞, 다섯 헌터를 살폈다.
낯익은 헌터 하나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기절한 모습은 토토의 짓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