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 워프파크? (2)
오롯이 방관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삭의 주인, 오제아.
도현과의 맹약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명령이라면 언제든 힘을 보태겠다는 이야기도 전해 왔다.
끝에는 빌런킹 채근석에 대해 짤막하게 덧붙여져 있었다.
정신 개조 완료, 긍지 높은 마족으로 성장 중.
“…….”
오제아의 기록서를 조용히 덮은 도현은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로 밝아지는 밖을 멍하니 보다 눈을 감았다.
그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수능을 무사히 치르고 새해 첫날 밤.
도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은 친우 셋과 함께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치켜들었다.
쨍!
네 개의 맥주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거품이 출렁였다.
약속한 듯이 원샷으로 넘긴 넷은 저마다 캬―! 하는 탄성을 질렀다.
도현 옆에는 민혁이, 민혁의 맞은편에는 근석이가, 도현의 앞에는 강한이 앉은 상태.
저마다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늘 말 많은 민혁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난 한예대도 붙었으니 여한이 없다아아!”
“새끼, 지금 어디다 염장질이야? 가서 여자나 후리지 말고 잘 배워라. 미래의 존잘 배우 놈아.”
근석이가 눈을 흘기며 살짝 감정을 담아 투덜거렸다. 그 한마디에 셋이 킬킬댔다.
민혁이 입술을 비틀며 인상을 썼다. 마주 보던 근석이 짜증을 냈다. 드라마에서 볼 법한 남주처럼 보여서다.
재수 없는 웃음을 짓는 도현을 향해 민혁이 삿대질을 했다.
“염장질은 내가 아니라 현이잖아? 세상사에 관심 없고 게임 고인물이란 놈이 한국대학교가 뭐냐? 안 그래, 한아?”
팔짱을 끼고 있던 강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저 새끼는 진짜 미친놈이야. 학교에서 잠만 퍼질러 자는 놈이 어떻게 수능 만점이야?”
근석은 도현을 까는 강한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하번드로 유학 가시는 분이 그런 말을 지껄이시면 재수생은 분통 터집니다만?”
“야, 내가 가고 싶어 가냐? 엄마, 아빠가 닦달하니 가지. 난 그냥 소소하게 살고 싶었다고.”
도현이 물었다.
“소소?”
강한의 입에 살짝 미소가 지어지며 얼굴을 붉혔다.
“소설가. 조안 H. 롤란의 테니포터를 넘는 대작을 쓰고 싶거든!”
근석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 새끼 맛 갔다.”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불러 터졌나 봐.”
강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뭐라고?! 이 자식들이!”
넷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도현은 대화에 집중했지만, 이상하게도 웅웅 울리기만 했다.
아쉬운 마음에 더 귀를 기울이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민혁이었다.
“현아! 내가 왔다! 음하하하!”
잠이 깬 도현은 인상을 쓰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민혁이 냅다 달려와 이불을 걷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이! 친우가 왔는데도 안 일어나? 벌써 11시라고! 회식은 까먹었냐?”
회식?
도현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민혁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아, 젠장. 일어나자마자 보는 얼굴이 시커먼 사내새끼라니.”
도현의 잔뜩 잠긴 목소리에 민혁의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왔다.
“새끼, 누군 아침부터 사내새끼 깨우고 싶겠냐? 같이 가자고 불렀으면 재깍재깍 일어나 준비하고 있어야지, 늦잠이 뭐야?”
‘아. 눈을 감았다가 나도 모르게 잤나 보네.’
그러니 그런 꿈도 꿨겠지.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평범한 일상을 꿈꿨었나 보다.
다른 놈들이야 얼굴을 봤으니 됐지만, 한 놈이 마음에 걸렸다.
‘송강한…….’
돌아온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연락 한 번 없는 녀석.
TV에 얼굴도 팔려서 알 텐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서일까, 민혁이 손을 눈앞에 흔들어 댔다.
“너 잠 덜 깼어? 멍 때려?”
“그러게 멍하네.”
“빨리 가자! 아니면 약속 늦어.”
“어.”
도현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방에서 나왔다.
***
어제 계양산을 정리한 후, 뒤풀이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지만 협회장인 강혁이나 차도식, 하지현의 경우 처리할 일이 남았었고, 결국 다음 날 휴가를 근처 계곡으로 놀러 가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다.
참석 유무는 자유.
말을 먼저 꺼낸 차 부부와 그의 팀은 당연하게도 꼭 참석해야 했다.
도현은 멀찍이 떨어져 워프에서 마주쳤던 신 놈들을 생각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했고, 도현의 팀인 민혁과 아바도 참석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도현은 냉수로 샤워하고 머리를 털며 민혁에게 물었다.
“장소가 어딘데?”
“문자― 봤을 리 없지. 계곡이라던데?”
“계곡?”
“여름이잖아. 내일부턴 빡시게 헌팅 한다니까, 당일치기라도 스트레스 좀 날리자는 말이지.”
워프 헌팅으로 잔뜩 물을 보고 왔던 도현에게는 감흥 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귀찮기만 했다.
쉬는 날은 당연히 집에서 뒹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 좀 봐라.”
들은 체도 안 하던 도현은 막 농장에서 돌아온 토토와 모르달의 호들갑에 더 정신 사나워졌다.
“도련님, 준비 끝냈슴다욧! 다들 먹다 배 터져 죽을지도 모름다요, 캬하하핫!”
“압빠, 토토! 그릇! 낸비! 다 만드럿써! 꼬꼬!”
40대 아저씨처럼 배를 내밀며 웃어 대는 모르달이나 폴짝폴짝 뛰며 가자고 재촉하는 토토나.
‘그런데 언제 영어를 배웠대?’
어제 계양산에 두고 가서 그런가?
외국어를 가르쳐야 하나, 고민하던 도현은 토토가 어리기에 차차 알아 가기로 했다.
‘뭐, 하고 싶다면야… 많이 알면 좋은 거지.’
***
차를 타고 이동하길 1시간.
도착한 곳은 어느 테마파크 옆 워프였다.
7등급 워프를 끼고 형성된 테마파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여태 봐 왔던 워프들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 민혁이 들떠 말했다.
“특이하지? 저 워프가 카프카프의 계곡이라는 곳인데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나? 나이아가라 폭포 절반만 한 폭포가 있대. 주변에는 먹거리도 많고 돗자리 깔기 좋은 잔디에 정원 같은 숲도 있다더라. 호텔도 있다는데 그건 너무 비싸서 쳐다도 보지 말래. 암튼, 경치가 끝내준단다.”
“몬스터는 없나 보네.”
“있어. 뭐라더라? 개구리? 진돗개만 한 건데 사람한테 관심 없고 계곡에 사는 물고기만 먹고 산대. 가끔 사람들을 기웃거려 먹을 거 얻어먹기도 하고. 그 모습이 귀엽다나?”
이런 워프를 은어로 워프파크라 하는데, 국내에 7개 정도 퍼져 있단다.
더 특이한 건 주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
‘특이하긴 특이하네.’
그런 감상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아바 목소리가 들렸다.
“민혁 씨!”
높게 묶은 금빛 포니테일, 푸른색의 민소매 티에 박시하게 걸친 흰 블라우스. 하의 실종으로 보이는 짧은 흰색 팬츠까지.
방금까지 조잘조잘 떠들던 민혁은 헤벌쭉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댔다.
“입가에 흐른 침이나 닦아.”
움찔, 닦는 시늉을 하던 민혁은 도현을 째려보다 막 도착한 아바를 반겼다.
“우 헌터님도 안녕하세요. 모르달도 안녕! 토토! 잘 잤니?!”
도현은 그저 심드렁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토토와 모르달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바 아씨! 오늘도 참 아름다우심다요!”
“아바 누나! 안뇽!”
다시 수다가 시작되었다. 도현은 혼자 떨어져 나와 모이는 장소인 워프 입구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붐비는 곳인데, 워프로 다가갈수록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출몰해 사람들이 몰린 느낌이랄까.
특히 비명과 탄성은 즉석 팬 미팅 현장 같았다.
“아, 어떡해, 어떡해! 차 부부 헌터야! 저, 저기 채빈 헌터도 있어! 진기찬, 박성한 헌터까지?! 팀원 다 왔어! 꺄아, 미치겠다!”
“언니! 오빠! 여기! 여기 좀 봐욧!”
“차도식 형! 여기 좀! 와, 씨, 졸―라 멋지다!”
사람들 머리 틈 사이로 이야기를 나누는 차 부부가 보였다. 도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둘은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홱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 때문에 도현은 급하게 기척을 지웠다.
하지만 그 노력은 마침 다가온 두 사람과 두 펫으로 헛수고가 되었다.
“우왓! 모르달이야! 진짜 모르달!”
“꺄아아아악!”
“안녕하시렵니까욧! 소인, 모르달임다욧! 캬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인파에는 여성이 많았는데, 그녀들의 비명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도현은 손바닥으로 눈을 덮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튈까……?’
사람만 30명. 도현의 펫인 토토와 모르달까지 총 서른둘이라는 대 인원이 움직였다.
헌터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름만 말해도 알 법한 헌터들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헌터들의 정점이라 불렸던 차 부부까지 나타나자 인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기에 도현의 등장으로 워프 앞은 수백의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워터파크에서 출동한 직원들의 진압으로 겨우 벗어나 워프에 입장할 수 있었다.
[7등급 워프, 카프카프 계곡에 입장하셨습니다]
도현의 팬 카페, 우도현교의 창설자이자 첫 번째 신도인 차도식은 당연하게 도현을 호위하듯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촌지간이라 알려진 하지현도, 도현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다른 헌터들은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그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헌터가 있었으니, 도현의 뒷줄에서 걸어가는 민혁이었다.
도현의 팀원이자 3급이라는 신입 헌터.
그를 향한 시선은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로 가득했다.
특히 사내들의 시선이 그러했는데, 민혁 옆에 찰싹 붙은 미국 교류 헌터 아바 때문이었다.
그런 묘한 분위기를 맨 뒤에서 지켜보는 마지막 무리가 있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 걷는 5명의 프리헌터.
그중 38살로 나이가 제일 많은 김영식이 팔짱을 끼고 터덜터덜 걸으며 투덜댔다.
“외모고, 능력이고, 인맥이고 햐… 왕족이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아, 세상 참 뭣 같다.”
함께 걷던 민인성이 키득거렸다.
“행님, 본래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는 게 아니라 했음요. 봐서 뭐합니까? 그냥 사는 세상이 다른데.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살면 되는 겁니다.”
김영식이 눈을 흘겼다.
“스물셋이 벌써 현실에 찌들어서는. 하, 난 이제 5등급 워프도 버거운데 마누라는 바가지나 긁어 대고 아들내미는 곧 국민… 아니지, 초등학교 입학하지. 정말 죽을 맛이야.”
“그래도 민규는 아빠바라기 아님까요?”
민인성의 한마디에 잔뜩 주름졌던 김영식의 얼굴이 눈 녹듯 풀어지며 팔불출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야― 흐흐. 안기면서 아빠 최고! 이러는데, 내가 그 맛에 살지!”
김영식 뒤에서 따라 걷고 있던 박효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영식 님은 여기 왜 오셨습니까?”
언제 웃었냐는 듯 김영식이 차갑게 되물었다
“그럼 박효진 씨는 왜 왔습니까?”
“뭐, 눈도장 좀 찍고 가능하면 좋은 자리 좀 받을까 싶어서…….”
박효진이 어색하게 웃자 민인성이 혀를 찼다.
“형씨는 눈칫밥 좀 묵어야겠습니다? 다른 행님들께 그 말 했음, 칼침 맞음요.”
“어? 내, 내가 뭘 했다고……?”
김영식이 흠, 하며 박효진을 훑었다. 당황한 얼굴은 무척 말끔했다.
헌터보다는 사무직이 더 어울릴 마스크.
“박효진 씨는 헌터 전에 무슨 일 했습니까?”
“뭐… 흔히들 하는 사무직이었습니다.”
“얼마나요?”
“……3년쯤요.”
정직하게 1년이라 말하려다 괜한 자존심에 경력을 부풀린 박효진은 슬쩍 눈을 아래로 깔았다.
김영식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민인성이 슬쩍 몸을 박효진 쪽으로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형씨, 어설픕니다.”
박효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거짓말이 들켰다는 수치심이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묵묵히 걷는 둘의 뒤통수를 깨 버리고 싶었다.
‘그럴 거면 왜 남의 사생활을 묻고 XX인데?’
씨근덕대려던 그의 뒤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