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 터졌다 (1)
2주기 워프가 터져 버린 계양산.
진태성은 날카롭게 감각을 세우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을 뒤덮은 푸른색의 넝쿨 식물과 그 넝쿨에 감겨 변이된 푸른빛의 나무, 잭과 콩나물이란 동화에서 볼 법한 거대 식물들이 즐비한 숲.
‘마치 워프에 들어온 것 같군.’
미간을 좁히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산을 오르는 이유는 이 근처에서 신호가 끊긴 헌터가 30분 만에 3명이나 되었기 때문.
‘이 근처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 게 분명해.’
코끼리의 상아처럼 커다란 송곳니에 붉은 털, 검은 줄무늬의 호라탄.
국내에 몇 없는 몬스터 워프이지만, 유일하게 인기가 좋은 워프이기도 했다.
‘가죽이나 이빨, 힘줄, 뼈. 다 돈이 되지.’
진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최근 몸의 마나가 커진 느낌에 헌터증을 꺼내 확인했더니 색깔이 검게 변해 버리는 게 아닌가.
‘이제 나도 3급 헌터라고!’
4급 블랙. 다른 말로 하자면 3급 그린! 꿈에 그리던 3급 헌터가 된 거다.
그런 자신에게 보스 몬스터 정보까지 굴러 들어왔다.
마치 3급 헌터가 된 걸 축하해 주듯.
‘4등급 보스 몬스터쯤이야!’
그의 머릿속은 이미 헌팅이 끝난 보스 몬스터를 팔아 치우고 돈방석에 앉아 깔깔대는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빌어먹을 헌터 생활도 끝이다.’
늘 돈 많은 백수를 꿈꾼 그는 이번에 제대로 한몫 챙겨 헌터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진태성은 조심스럽게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서둘러 근처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쿠우우우!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괴성이 울리며 새파란 넝쿨이 계양산의 나무와 식물 들을 휘감았다.
넝쿨에서 새싹이 자라나더니 금세 어른 몸통만큼 굵어진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고속 성장. 워프에서나 볼 수 있는 특성이었다.
그렇게 꿈틀대는 나무와 넝쿨은 움직이는 모든 걸 먹이로 삼는다.
이름 모를 풀들로 가득했던 주변이 어느새 나무들로 빽빽해졌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숨죽인 채 감각에 걸린 마나를 조심스럽게 주시했다.
사사삭.
나뭇가지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 사이로 팔뚝만 한 검은 송곳니 두 개가 보이더니 붉은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몸길이 8m, 성인 남자만 한 다리를 한 번 놀릴 때마다 4, 5m씩 쭉쭉 나아갔다.
그럼에도 바람 소리도, 심지어 진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고 날렵했다.
크르르릉―
낮게 깔리는 울음소리에 주변의 풀잎이 바르르 떨었다.
‘왔다!’
진태성은 희열로 두근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호라탄이 불쑥 그 앞에 나타났다.
진태성은 제멋대로 터져 나오려는 흥분의 비명을 씹어 삼켰다.
[검은 송곳니 호라타스]
‘월척이다!’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쾌감에 몸이 들썩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높이만 건물 한 채 높이.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금빛 눈동자에 손끝이 저렸다.
이 짜릿함, 어서 빨리 헌팅을 끝내고 헌터계를 뜰 생각으로 부푼 그와 달리 호라타스는 눈앞의 먹잇감을 어떻게 먹으면 맛있을지 고민했다.
진태성은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양팔을 들어 등에 엑스 자로 고정한 시미터 두 자루를 뽑았다.
“사냥이다!”
무기를 들자마자 그의 근육이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호라타스의 앞발을 가볍게 피하며 몬스터의 품을 파고들었다.
‘멍청한 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놈이라서일까, 엉성한 몸놀림은 몸집만 크지, 새끼인 게 분명했다.
경험 없는 몬스터. 거기에 새끼.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한들, 진태성은 업계 바닥에서도 꽤 알아주는 3년 차 베테랑이다.
그에 비해 몸집만 크고 어수룩한 호라타스는 그저 한없이 작은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라타스의 앞발이 그를 후려쳤다.
쩌어어억!
진태성 대신 애꿎은 나무가 이쑤시개처럼 부러졌다.
‘한 대 맞았다간 골로 가겠네.’
진태성은 나태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새끼라지만, 보스 몬스터.
‘우선은 발을 묶어야겠어.’
그는 이어지는 앞발 세례에 머릿속을 정리하고 왼쪽 앞발의 겨드랑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저가 포식자라는 건 알아서일까, 몸을 뒤로 쭉 빼며 품을 파고드는 건 실패할 거라 생각했던 그의 생각과 달리 얼굴과 몸에 닿는 부드러운 털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목표로 한 지점에 양손에 각각 쥔 시미터를 힘껏 찔러 넣었다.
푸우우욱!
근육을 파고드는 소리가 검을 타고 울렸다. 끈적한 녹색 핏물이 튀며 몸을 적셨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나를 불어 넣으며 더 깊게 검을 찔러 넣었다.
크허어어엉!
몸집만큼 큰 울음이 숲을 울렸다.
호라타스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나무를 들이박았다.
진태성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몸이 주체 없이 휘둘리는 와중에도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조금만 더!”
그가 노린 건 힘줄. 질긴 그 줄만 잘라 내도 손쉽게 헌팅할 수 있다.
그리고 훼손이 많지 않은 호랑이 가죽은 부르는 게 값이다.
‘돈, 돈, 돈!’
모든 게 돈이다!
그렇게 주문을 외우던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검 끝에 팽팽한 힘줄이 느껴졌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검을 교차하듯 비틀었다.
찌지지직, 뚜―욱!
호라타스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앞으로 쏠리는 중심. 관성 법칙을 느끼고 다음 목표를 눈에 담았다.
‘이제는 뒷다리!’
검을 지지대 삼아 다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밀어냄과 동시에 칼을 뽑고 건너가려던 그는 꿈쩍하지 않는 검에 당황했다.
‘안 뽑혀?!’
곡선 형태의 검 끝에 잘린 힘줄이 달라붙었다. 거기에 찔렀을 때와 달리 수축한 다리 근육이 검을 잡고 놓지 않았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땅바닥이 자신을 빨아 당기는 듯 훅 다가왔다.
이러다 다리가 접히면 검은 고사하고 자신까지 겨드랑이에 끼여 압사로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제, 젠장!”
그렇다고 검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헌팅은 무조건 성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부담스러웠지만, 마나를 쏟아붓지 않으면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그는 갑자기 머리털이 쭈뼛 서자, 본능적으로 검을 포기하고 호라타스의 배로 뛰어들었다.
간발의 차로 살벌하게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거대한 도끼가 검이 꽂힌 그 자리에 찍혔다.
퍽! 콰드득!
단숨에 찢긴 근육 사이로 뼈가 박살 나는 소리가 섬뜩하게 등을 찍었다.
캬아아악!
다리를 잃은 호라타스가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쿵, 쿠궁! 쿵!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위협적인 울음을 토했다.
묵직한 굉음이 파동이 되어 산을 울렸다. 놀란 몬스터들이 몸을 들썩이며 꽁지 빠지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숲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호라타스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 뛰어내린 진태성은 한 손을 허리에 올린 채 구경하고 있는 여자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붉은 입술에서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쉽다. 쥐새끼라서 그런지 꽤 날렵해?”
사내의 마음을 진탕시키는 목소리임에도 일그러진 진태성은 비릿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사내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무슨 일로 여길 행차하셨나?”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가죽의 헌터웨어. 목 중앙에서부터 배꼽까지 V자로 팬 부분은 맨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슴 위아래로 두 개씩 달린 벨트가 벌어짐을 잡아 주지만, 실용성은 제로에 가까운 치장용 방어구.
헌팅 대상이 누군지 의심될 패션이었다.
그녀, 이선하는 사슬이 감기지 않은 왼팔로 흘러내린 긴 생머리를 목 뒤로 넘겼다. 반동으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엉덩이 뒤로 흔들렸다.
저 마녀의 이명을 몰랐다면 혼이 쏙 빠질 모습이었지만, 진태성은 더욱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녀가 도도하게 말했다.
“당연히 사내 냄새 맡고 왔지. 그런데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함께 있을 줄은 몰랐는걸?”
일자로 잘린 앞머리 아래 청순할 정도로 앳된 얼굴이 화사하게 웃었다.
진태성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호라타스의 다리 하나가 날아갔을 뿐, 아직 헌팅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냄새를 맡고 온 하이에나까지…….
몸을 바로 세운 호라타스의 거친 숨소리는 적의로 가득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적의가 자신이 아닌 저 마녀를 향했다는 거다.
진태성은 당장이라도 웃고 있는 하이에나의 주둥이에 검을 꽂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무기는 너덜거리는 호라타스 앞발에 꽂혀 있었다.
‘젠장! 블랙이면 뭐 해?! 되는 일이 없잖아!’
제아무리 3급 턱걸이라도 무기 없인 5급 헌터와의 싸움도 싸움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필 4급 헌터다. 그것도 미친 도끼 마녀.’
똥 밟았다 싶은 진태성의 마음을 알아차린 이선하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지금 내뺄 생각해? 아니면… 저 새끼 호랑이가 날 공격하는 틈을 타 내 입에 칼이라도 쑤시려구?”
이어서 홍조 띤 얼굴로 ‘그런 플레이도 나쁘지 않은데―’라고 중얼거리자 진태성은 결국 욕설을 지껄이며 결정을 내렸다.
‘젠장, 모르겠다! 일단 튀자!’
자신의 무기도 중요했지만, 목숨은 하나니까. 호라타스도 하이에나를 공격할 테니 몸을 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계산이었다.
그 순간 호라타스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허허어엉!
진태성은 조소를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몸을 뒤로 빼는데,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어머, 도망가? 흐응, 어쩔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 뒤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셋?’
얇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멍청한 놈, 여왕님 주위엔 호위기사가 있다는 걸 모르냐?”
이어 두껍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진태성을 비웃었다.
“사내새끼가 도망이라니, 다리 사이에 달린 게 아깝군.”
4급 그린 둘과 5급 블루 하나. 아무리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해도 못 알아챌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몰랐다? 3급에 들어선 이 내가? 기척을 숨겨…….
“보조 계열 하이드!”
어디서나 유용한 보조계 헌터의 스킬이 번쩍 떠오른 진태성은 흙빛이 되었다.
“눈치 빠른 남자는 별론데.”
그녀는 처음으로 뚱한 얼굴이 되더니 팔에 감긴 사슬을 잡아당겼다.
촤라라락!
차갑고 서늘한 사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쩍 벌어진 호라타스의 주둥이가 그녀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씹어 먹혀 뒈져 버려어엇!’
진태성이 속으로 호라타스를 응원했다.
뜨끈한 악취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검은 이빨에 얼굴이 가려질 때쯤, 사슬에 이어진 도끼가 날아오며 호라타스의 턱을 쳐올렸다.
퍼억!
케헹!
안타까운 비명이 울렸다. 그대로 날려 나무를 찌그러뜨리고 바닥에 떨어진 호라타스는 축 늘어졌다.
진태성은 경악했다.
‘하, 한 방에? 서, 설마……?!’
묘기에 가까운 사슬 휘젓기로 도끼를 낚아챈 그녀는 도끼에 딸려 온 두 자루의 검을 왼손에 쥐고 진태성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너만 3급인 줄 아니? 쥐새끼?”
“3… 3급?!”
“그래, 난 이미 3급이야. 그것도 블루― 궁금해? 차도식이나 하지현을 보면 알잖아. X뺑이 치기 싫어.”
‘잠 못 자면 피부 푸석해진단 말이야.’라며 꺄르륵, 웃은 그녀는 손에 든 시미터를 바닥에 떨어뜨려 보란 듯이 자근자근 밟았다.
진태성은 뒤에 포진한 세 헌터도 잊고 분노에 눈이 뒤집혔다.
“씨발, 내가 어떻게든 네년만큼은 죽이고 죽는다!”
“어머, 무서워서 어떡해.”
진태성은 땅을 강하게 박차며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헌팅에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헌터를 헌팅하려면 이런 보조 무기는 필수다.
저가 아무리 미친 공격력을 자랑하는 마녀라 해도 주 무기가 도끼인 만큼 자신의 날렵한 몸을 따라오긴 힘들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이선하의 얼굴을 향해 노랗게 물든 단검을 입을 향해 찔렀다.
‘피를 머금은 요사스러운 마녀 주둥이, 시원하게 찢어 주지!’
그리고 무기를 챙겨 빠르게 도주하면 된다.
계획은 완벽했다.
비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여유롭다 못해 부드럽게 벌어진다.
진태성의 예상은 마녀의 당황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이 당황해 버렸다.
동시에 확신에 찼던 감각이 날카롭게 결론을 냈다.
이대로면 죽는 건 자신이다.
‘젠장, 튀자!’
그래도 팔은 가져가야지!
깨끗한 왼팔로 시선이 향했을 때였다. 갑자기 시커먼 덩어리가 둘 사이에 나타났다.
콰앙!
“꺅!”
“크헉!”
두 사람은 폭탄처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와지끈, 와지끈, 와지끈! 퍼억!
세 그루의 나무를 뚫고서 나무에 박혀 축 늘어졌다.
세 헌터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이 모시는 여왕님이 만신창이가 된 건 둘째 치고 불쑥 나타난 검은 벽… 아니, 빨간 털의 원숭이를 어깨에 걸친 사내 때문이었다.
현재 전 세계를 들썩이는 유명 인사 우도현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이 그렇든 말든, 도현은 토토의 말을 따라 기절한 호라타스에게 다가갔다.
신난 토토가 검지로 호라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바! 압빠, 토토 마리 맛찌?”
“오, 진짜 호랑이네?”
도현은 계양산 꼭대기로 향하던 도중 토토의 ‘호당이 잇써!’라는 외침에 산 중턱에 착지했다.
모로 누워 기절한 붉은 호랑이. 겉으로 보기엔 죽은 것 같지만 미약하게 숨은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