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 주웠다 (5)
잠깐 농장에 다녀온 도현은 아직 넋을 잃고 있는 휘르카를 불렀다.
“따라와. 시간 없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대로 그냥 죽을래?”
흐리멍덩하던 휘르카의 눈에 잠시 생기가 피어올랐다.
“혹시… 방법이 있습니까?”
“바다는… 음, 토토가 만든 게 있긴 하니까 급한 대로 임시로 쓰고.”
대체 무슨 말일까, 고민하던 휘르카는 도현이 손을 내밀자 얼떨결에 잡았다.
“간다.”
순식간에 세상이 바뀌었다.
눈앞에 울창한 숲이 보였고, 거기서 꽤 떨어진 곳에는 부글부글 끓는 바위산이 보였다.
그리고 꽤 멀리, 유물에서 그림으로 접했던 건물이란 것이 보였고, 그 옆에 물이 있었다.
순간 익숙한 짜고 비린 향이 훅 끼쳤다.
“아…!”
바다에 비하면 몹시나 작은 크기의 물이지만, 바다가 분명했다.
휘르카는 도현의 의도를 깨달았다.
새로운 터에서 새롭게 시작할 밤의 인어족.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현은 울먹이는 휘르카를 못 본 척 또 바뀌어 버린 농장을 살폈다.
농장이 업그레이드되면서 주민을 받을 수 있다. 제한도 없는 거로 봐서 인어를 수용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현재 농장은 육지밖에 없었다.
‘개척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개척하다 보면 언젠가 바다도 발견하지 않을까?
‘뭐, 그건 알아서들 하겠지.’
엄마가 늘 했던 말이 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도현은 토토가 만든 미니 바다를 향해 걸었다.
멀리서도 진하게 느껴지던 바다 냄새가 가까이 다가가자 온몸에 밸 것만 같았다.
‘바다라고 하기엔 작지만, 그래도 한강 크기쯤은 되겠어.’
그저 물을 만들었다길래 연못 정도로 생각했던 도현은 토토의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그 작은 몸으로 이 크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미스터리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의 어깨에 앉아 있던 토토는 호수 앞에 폴짝 뛰어내려 신나게 설명했다.
“물! 바다, 이쁜 거! 머글 거! 다 잇써, 압빠!”
토토의 말대로였다. 예전의 투박했던 솜씨는 어디 가고 바다를 뚝 떼어 통째로 옮긴 모습이었다.
뿌듯해하는 토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뒤 바다 건너 펼쳐진 초원 평야를 훑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뚫린 곳. 저 크기면 2천쯤 되는 인어들이 몇 대를 이어 간다 해도 넉넉할 거다.
막 옆에 도착한 휘르카를 보며 말했다.
“우선 이사하기 전에 그 몸부터 고치자.”
인벤토리에서 성혈을 꺼냈다.
헤미오르에게 준 뒤로 이번이 두 번째.
어리둥절한 휘르카에게 건네며 먹는 시늉을 하자, 잠깐 멈칫한 그는 뚜껑을 따고 마셨다.
도현이 회복 마법을 걸었다 해도 휘르카의 몸은 속에서부터 붕괴되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빠르게 빠져나가는 생명은 워프보다 먼저 소멸할 정도로.
그래서 도현은 인어들의 이주를 결정짓자마자 먼저 생각한 것이 휘르카의 완전한 회복이었다.
자신을 인정했다지만, 언제고 그들을 이끌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새로운 왕을 뽑으라고 해 봤자 자신을 붙들고 안 놓을 게 뻔했다.
‘있는데 굳이 뭐 하러.’
고쳐 쓸 수 있으면 쓰면 되지 않나.
다행히 휘르카가 먼저 의욕을 보였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도현 님은 신이신가…?’
분명 차원 이동이었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육지란 배고픔에 굶주린 몬스터가 득실대는 쓰레기장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자신을 감싸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나에서 어머니의 품을 느꼈다.
바다 대신 푸른 나무들이 찬란히 생명력을 뿜어내고, 생소한 몬스터들이 자연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졌던 바다에 비하자면 눈물로 보일 작은 바다지만, 그리움 정도는 달래기에 충분했다.
그런 바다를 건너 새로운 보금자리를 확인한 휘르카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곳에서 살아갈 달의 인어족.
욕심이 일었다.
거기에 자신도 함께할 순 없을까.
안타까움과 기쁨에 속은 괴로웠지만, 얼굴은 웃었다.
그때 눈앞에 작은 병이 불쑥 내밀어졌다.
‘대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기대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삶의 갈구하는 마음으로 입에 병을 기울었다.
기대와 달리 어떤 맛도 느낌도 없었다.
의아함이 당황으로 물들 때쯤.
쿵! 쿵! 쿵!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크으읍!’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닫는 힘이 몸을 터트릴 듯 존재감을 뿜어 댔다.
걸을 때마다 집중하지 않으면 쓰러져 바스러졌을 몸이 묵직해졌다.
텅텅 비었던 뼈와 근육에 힘이 차올랐다.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감각까지 한층 더 예민해져 눈을 감고 있음에도 저 멀리 떨어진 숲속까지 보였다. 거기에는 사람 외형을 한 특이한 새가 보였다.
깃털을 정리하다 푸드득 몸을 털며 고개를 휘휘 젓는 모습이 눈과 귀에 들렸다.
끝없이 높은 하늘이, 단단한 대지가 들이쉬는 숨결이 느껴졌다. 모든 자연이 마치 자신의 일부 같았다.
생명, 그 찬란함. 벅차오르는 감정과 함께 이 세상을 부드럽게 감싼 마나가 자신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모든 게 자리를 잡았을 때. 기지개를 켜며 상쾌하게 펄럭이는 등 뒤의 날개가 홰를 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날개?!’
생각과 함께 백색의 날개 끝이 눈앞으로 뻗어졌다.
‘인어인 내게 날개라고?’
새하얀 깃털이었다.
얼떨떨한 시선으로 날개를 살피던 휘르카의 귀에 도현의 목소리가 꽂혔다.
“인간이 아니라 천족이었네.”
“아…….”
휘르카는 왈칵 차오른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대이주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도현과 함께 사라졌다 돌아온 휘르카는, 바다를 허망하게 지켜보던 인어들에게 한 쌍의 날개를 펼쳐 보이며 이주를 알렸다.
그 모습과 새로운 삶에 의욕을 되찾은 인어들은 절반은 농장으로, 절반은 바다로 향했다.
토토는 고래를 찾을 거라며 바다로 향하는 인어들을 따랐고, 그사이 정이 붙었는지 민혁과 아바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인어주를 홀짝이던 모르달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도현에게 물었다.
“오오, 도련님. 드디어 제브라드 님의 뜻을 이해하신 검까욧!”
함께 잔을 기울이던 도현은 심드렁하게 무슨 개소리냐고 한 대 치려다 멈칫했다.
느낌이 싸했다.
“제브라드의 뜻…?”
순간 모르달이 입을 닫았다.
홍조 띤 얼굴은 어디 가고 하얗게 질려 눈을 굴리다 아직 바다에 떠다니는 고래를 보곤 능청스럽게 일어났다.
“아이코, 아이코, 술을 마셨더니… 소인이 일도 잊고 나불거렸슴다요. 쩌어어기, 고래가 다 떠내려가기 전에 수거하고 오겠슴다요!”
“다시 말해 봐.”
줄행랑치는 모르달의 꼬리를 잡아 패대기친 도현은 모르달의 옆얼굴을 밟고 낮게 말했다.
“모, 몰 말임뉘까요…?”
“너… 온 목적이 뭐야?”
“쇼. 쇼윈, 됴룐뉨울 묘쉬교좌….”
“그래. 쉽게 불지 않겠다 이거지?”
도현이 주먹을 들었다. 묵직하게 실린 힘에 사색이 된 모르달이 버둥거렸다.
“줴, 줴부라두교으 교뤼윔돠요오! 와위교, 묘루돨 쥭눼에에엑!”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을 한참이나 보던 도현은 손에 힘을 풀며 발을 뗐다.
그러자마자 후다닥 바다로 도망치는 모르달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브라드… 대체 무슨 꿍꿍이지?”
모르달을 보낸 제브라드나 뜬금없이 나타나 헛소리하고 사라진 도깨비 놈이나.
조용히 살려는 사람, 왜 가만두지 못해 안달일까.
도현은 이를 아득 씹었다.
“그래, 움직여 주지. 대신에 내 뜻대로 움직일 거다.”
도현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이주를 마치고 현실에 복귀한 건 워프가 파괴되기까지 3시간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
***
“나왔다! 나왔어!”
“우 헌터님!”
“꺅, 우 헌터 어깨에 토토 님도 보여! 너무 귀엽다!”
“모르달 님!”
워프에서 300m 떨어진 워프 관리소 주변이 들썩였다.
뭉텅이로 모여 있는 모습이 기자들 같았지만, 간혹 비명이 들리는 걸 봐서 기자들만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도현 팀이 관리소로 다가가기도 전에 먼저 몰려온 기자와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우 헌터님! 인어의 메아리 워프는 어땠습니까?”
“김민혁 헌터님! 신입이신데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우 헌터와 어떤 사이입니까?”
“Hunter Ava, what’s your relationship to him? How did you become a member of the team?”
소란이 가중되자, 워프 관리소의 문이 벌컥 열리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박 사장이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워프를 날려 먹어?! 헌터면 다야?! 내 워프! 어쩔 거야! 어쩔 꺼냐고오오오!”
“박 사장님!”
서둘러 나온 조 소장이 박 사장을 말렸지만 이미 기자들의 외침에 묻혀 버렸다.
도현은 유난히 짜증스러웠던 워프 탓에 기분이 저조했다.
특히, 끝에 모르달의 뻔한 거짓말도.
불쾌감에 이어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그런 도현의 기분을 알고 있음에도.
“쿠헤헤헤, 안녕하시렵니까요! 소인 모르달임다욧!”
모르달은 인사를 따라 비명이 높아지자 헤벌쭉 웃었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모르달의 꼬리를 잡았다.
“켁! 도, 도련님. 왜 이러심까요?!”
도현은 워프 관리소 입구에서 계속 삿대질하며 꽥꽥대는 박 사장을 향해 모르달을 던져 버렸다.
쿵, 콰직! 퍼서석!
단숨에 워프 관리소가 박살 났다. 거기에 휩쓸려 튕겨 난 박 사장은 떼굴떼굴 바닥을 굴렀다. 오직 조 소장만 멀쩡한 모습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도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어. 라. 빗. 나. 갔. 네.”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못 여는 그때, 민혁이 도현의 등을 툭툭 치며 휴대폰을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헌터 협회에서 헌터들에게 발송된 전체 문자였다.
[특수 경보 발행. 인천 계양산 ‘큰 송곳니 호라탄’ 워프 터짐. 계양산 아래 거주지 습격 예상. 2주기 4등급 몬스터 워프. 헌팅 중인 헌터를 제외하고 경기권 헌터들은…….]
“워프가 터져?”
한글을 읽었음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기자 하나가 설명했다.
“계양산 일대가 워프 속 세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현재 하 헌터와 헌터 협회장님도 가셨는데…….”
‘찌롱이? 삼촌?’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통신이 연결되기 무섭게 울려 대는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 100통, 문자만 40통이 쌓여 있었다.
더 다급해진 도현은 최근 문자를 확인했다.
강혁 삼촌에게서 온 문자였다.
[워프 터졌다. 계양산 몬스터 천 마리 이상. 빨리]
1시간 전 문자였다.
‘1시간, 아니 최소 2시간일 수도 있겠어. 그 시간에 계양산이 워프에 먹혔다고?’
생각 이상의 속도에 불현듯 도깨비가 떠올랐다.
‘조심해라.’
‘이제 시작이다. 뭐, 니한텐 호들갑 떨 일은 아니겠지만.’
“……X발.”
도현은 지면을 박차고 날았다.
무너진 사무실 파편 더미를 들추며 나오는 모르달과 민혁과 아바가 불러 댔지만, 터진 워프를 눈으로 확인해야 속이 풀릴 것만 같았다.
‘계양산이 어디지?’
분노로 일단 몸을 움직이고 봤지만, 금방 멈춰 버렸다.
길치, 방향치인 그가 위치를 알고 찾아간다는 것은 워프 하나 박살 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힘을 끌어 올렸다. 기운을 읽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도 시작과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워프가 많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잖아.’
더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워프니 뭐니 다 박살 낼까 하는데 토토가 몬스터 기운을 읽고 팔을 쭉 뻗었다.
“압빠, 압빠, 쩌어어기 이상항 거 이써. 노리터… 하피? 크노아? 가튼 거!”
터진 워프에서 나온 몬스터의 기운을 읽은 거다.
“잘했어.”
도현은 미소 지으며 토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5분.
차를 끌고 가더라도 최소 30분은 걸릴 거리였지만, 도현에게는 충분하다 못해 넉넉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