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76화 (76/200)

# 76

76. 주웠다 (4)

콰과과― 쩌저저적!

허무하게 보호막이 깨져 나갔다. 빙판이 부서지기 무섭게 길이 뚫리며 오르오타가 거대한 몸뚱이를 들이밀었다.

휘르카의 눈에 진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쉬고 싶었지만, 이놈을 앞에 두고 쓰러질 수 없었다.

선대 인어왕, 아니 아버지의 원수. 그리고 밤의 인어족의 염원을 위해서.

‘이제 허울밖에 남지 않았지만…….’

평온한 안식을 위해서라도 왕의 임무는 마쳐야 했다.

더욱 속도를 내며 달려드는 오르오타가 잔뜩 흥분한 투로 말했다.

[이 몸이, 이날을 위해 준비했다!]

고래왕의 몸이 붉게 물들었다. 미간 사이에 눈을 찌를 듯 강렬한 핏빛 구체가 몸집을 점점 부풀렸다.

한때, 2천에 가까운 인어를 몰살시켰던 그 힘이다.

휘르카는 이 공격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케라우노스를 꽉 쥐었다.

왕의 목숨을 대가로 일족을 지키는 힘.

‘내… 전부를 주마!’

휘르카는 자신을 쥐어짜 케라우노스에 밀어 넣었다.

밑바닥만 남은 힘을 넘어 생명까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창은 점점 투명하게 변해 갔다.

“수호의 창 케라우노스여! 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어라!”

밤의 인어족을 위해……!

콰지지지직!

케라우노스에 힘이 집중될수록 그의 주변에는 거친 스파크가 몰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해진 케라우노스에 푸른 번개가 서렸다. 번개가 강한 스파크를 튕겨 낼수록 휘르카의 푸른 머리카락은 하얗게 색을 잃어 갔다.

그리고.

“오르오타아아아아!”

쿠오오오오!

오르오타의 괴성과 함께 붉은 구체가 날아왔다.

10m가 넘는 붉은 구체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휘르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상체를 비틀어 뒤로 젖혔다.

케라우노스를 잡은 손의 근육이 핏줄과 함께 터질 듯이 팽창했다.

“가라아아아악!”

온 힘을 다해 케라우노스를 던졌다.

쐐애―액! 콰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음과 함께 거대한 번개가 되어 날아간 창과 붉은 구체가 맞부딪혔다.

카가가가각!

두 힘이 부딪힐 때마다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하며 불꽃과 스파크가 파편처럼 튀었다.

휘르카가 초조함으로 입술을 씹었을 때.

짜자자자작!

하늘에서 떨어진 수백, 수천 개의 벼락이 케라우노스에 모여들었다.

콰가가각, 푸욱!

구체에 케라우노스가 박혔다.

한 점에서 시작된 균열이 전체로 퍼져 나가며, 그 순간 빛처럼 쏘아진 창이 붉은 구체를 뚫고 오르오타에게 날아갔다.

콰―드득!

질긴 가죽이 뚫리는 소리에 이어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이 내려쳤다.

꽈과과과광!

오르오타의 몸이 벼락의 반발로 허공에 튀어 올랐다. 온몸을 휘감은 잔류의 벼락이 수면을 따라 퍼졌다. 저들의 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허겁지겁 도망치던 친위대까지 집어삼켰다.

푸화아아악!

50m의 고래가 뒤집힌 채 수면을 때리며 쓰러졌다.

“하, 드디어…….”

거기까지 확인한 휘르카는 입가에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보고 계십니까, 선조여… 우리는…….’

그는 자신을 감싸는 환한 빛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휘르카의 육신이 조각난 빙판 위에 무너져 내렸다.

“흐음.”

도현은 팔짱을 낀 채 검지로 팔뚝을 톡톡 쳤다.

고래에 비해 약한 인어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었더니, 저게 그 답이었다.

강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하는 무기.

“마검… 아니, 마창.”

어쩌면 인어들이 인어가 된 이유일지도.

“뭐, 어쨌든. 가 봐야지.”

예정대로라면 휘르카는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를 감싸던 빛이 미약하게나마 숨을 붙잡았다.

인어족을 지켜 왔던 선조들이었을까…….

도현은 쓰러진 휘르카를 어깨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뒷설거지할 시간이군.”

끝날 때 끝나더라도 최소한 함께할 시간은 벌어 줘야 하지 않겠나.

***

수습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현은 빙판에 돌아오자마자 휘르카를 마법으로 치료했고,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마지막까지는 함께할 정도는 되었다.

“은인,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가 뭔가……?”

백발의 휘르카는 수하들을 물리고 집 앞, 모닥불 앞에 도현과 독대를 했다.

너무 진지하게 묻는 휘르카와 다르게 도현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딱히?”

사실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헌터라서 일하러 온 것이지만. 오히려 도현은 바다이기에 해산물을 먹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 도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휘르카는 말문이 막혀 도현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도현 님, 도현 님은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

“도현 님과 비슷한 종족을 봤습니다. 그들은 밤의 인어족을 사냥하고 바다를 약탈했지만… 도현 님은 다르시군요. 밤의 인어족은 도현 님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도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밀려왔다.

예상대로 휘르카는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춰 입을 열었다.

“절 데려가 주십시오. 도현 님을 섬기며 손과 발이 되어 뜻에 따르겠습니다.”

휘르카는 공손히 바닥에 엎드렸다.

수인에 마족에, 이젠 인어까지.

그냥 살리지 말 걸 그랬나.

이상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몸에 주렁주렁 달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치솟는 짜증에 휘르카를 뻥 차서 인어들과 함께 내쫓아 내고 싶었지만, 빙판 위 모든 신경은 이쪽에 쏠려 있었다.

아직도 고개를 들지 않는 휘르카를 보니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저럴 모양이다.

지구에 돌아와 처음으로 난해한 고민에 휩싸인 도현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낼 때쯤, 인어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토토가 제 몸보다 3배는 큰 그릇을 번쩍 들고 뛰어왔다.

“압빠, 압빠! 이고 마싯쪄!”

도현 앞에 내려놓은 그릇에는 찰랑거리는 국이 담겨 있었다.

토토의 출현으로 어색하게 몸을 바로 한 휘르카가 말했다.

“푸카치입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꼭 마시는 음식이지요.”

“해장술이네.”

무슨 말인지 모르는 휘르카 너머 인어들이 저마다 그릇을 들고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모르달도 거대한 솥을 저으며 한 국자 떠 쭉 마시고 헤벌쭉 웃는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압빠, 빨리! 머거 바!”

토토의 재촉에 그릇을 들었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액체.

국이라기에는 시원한 냉기가 그릇에 서려 있었다. 미역 같은 해초류가 드문드문 보였고, 국 위로 떠다니는 살얼음은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살짝 냄새를 맡으니 잔잔히 퍼지는 향이 새콤하면서도 달콤했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후루루룩.

먼저 강한 짠맛이 혀를 때렸다. 뒤를 이어 시원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이 짠맛에 고통스러운 혀를 어르고 달래듯 살살 풀어 줬다.

‘이거……?’

거기에 국물과 함께 씹히는 해초와 살얼음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바다에서 물김치라니.’

정말 언밸런스한 조합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 당기는 입맛에 그릇에서 입을 떼지 못했다.

숨도 안 쉬고 그릇을 깨끗이 비운 도현은 감탄했다.

‘맛있는데?’

처음에 느꼈던 불쾌감은 어디로 가고, 가슴까지 시원해, 흠뻑 빠져 버렸다.

거기에 해초가 살얼음과 함께 씹히니 가려운 등을 긁어 주는 것 같달까.

그런데 뭔가 아쉽다.

맛도 있고 중독성도 있는데.

‘이 음식이 해장용이라고?’

대한민국에서 해장용이라면 차가운 것보단 칼칼하고 뜨뜻한 국물이 최고 아닌가.

푸카치는 냉수마찰이라도 한 듯, 얼얼할 정도로 입 안에 냉기만 가득했다.

딱 배탈 나기 십상인 상황.

‘인어라서 그런……?’

의아하던 것도 잠시, 갑자기 배 속에서 뜨끈한 기운이 손끝까지 퍼지며 후끈한 숨을 내뱉었다.

사우나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틀림없이 마나의 기운이야.’

국물이 파란색으로 반짝이는 이유도 마나 때문일까?

‘이 색은 모르달이 가져왔던 진주랑 같은 색인데?’

대왕조개의 진주.

그저 액세서리만이 아닌 요리에도 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도현은 눈을 감고 푸카치의 여운을 즐기며 다른 음식과의 조합을 떠올렸다.

‘고기랑 면도 잘 어울리겠어.’

고기 중에서도 잔뜩 양념에 절어 숯에 구운 고기가 딱이었다.

자글자글한 숯불 위에 양념에 푹 전 갈비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상상을 하던 도현은 갑자기 몰려오는 극심한 허기에 탄식했다.

고기가,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소도 좋고, 돼지도 좋고!’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제브라드에 있을 때는 고기에 고 자만 나와도 진저리 치던 자신이 고기를 먼저 찾다니.

왠지 즐거우면서도 짜증이 났다.

‘그놈의 제브라드.’

역시나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차원이다.

‘아무튼, 고기라면…….’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빙판 주위로 둥둥 떠 있는 고래가 보였다. 눈을 반짝이던 도현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잔잔한 파도가 치던 바다는 길을 잃고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토토도 느꼈는지 신나서 촐싹대던 모습은 어디 가고, 발을 동동 굴려 댔다.

“바다, 이상해! 흔들흔들, 막 웅지겨!”

그 말에 휘르카가 씁쓸하게 말했다.

“소멸이… 시작됐군요.”

워프가 파괴되기까지 10시간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

‘왠지 조용하더라니.’

바다에 거칠고 높은 파도가 일었다. 그럼에도 빙판은 영향받지 않았다.

마치 TV 속 재해 다큐를 보는 듯한 모습.

담담하려고 애쓰는 휘르카와 안절부절못하는 토토에 도현도 조금은 실감이 났다.

겪어 본 워프 파괴는 이번이 세 번째.

처음에는 토토가 청년기로 성장하며 파괴해 버린 워프였다. 시간이 너무 짧아 바로 나와 버렸고, 두 번째는 이미 진행 중인 워프였지만, 골고타 때문에 딱히 살펴보지도 못했다.

거기에 비하면 이 워프는 얌전한 편에 속했다.

아니면 바다로 이루어진 워프라서 느끼지 못하는 걸까.

눈에 보이는 건 그저 파도와 물뿐이니 말이다.

도현은 파괴되는 워프보다, 오히려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고래가 아쉬웠다.

복구된 방어막을 때리는 높은 파도를 멍하니 보고 있는 휘르카에게 물었다.

“고래,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 필요하시면 가져가셔도 괜찮습니다.”

대답하곤 다시 바다를 멍하니 보는 모습이 넋이 나간 듯했다.

쩝.

크라켄을 처리했을 때 그냥 나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결말은 역시 익숙지 않다.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휘르카가 충성을 맹세한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결론은 일족을 부탁한다는 말.

모든 걸 잃어 본 적 있었던 도현이었기에, 약해진 마음이 허락을 종용했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겪은 고생이 결사반대를 외쳐 댔다.

고민에 빠진 도현의 어깨 위로 토토가 뛰어올랐다.

“압빠! 고래, 나 고래 노리터 너코 시퍼!”

‘긍데 바다 화낫써! 무셔어…….’라고 덧붙이는 토토의 말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농장. 그리고 주민.

“오…….”

……잘하면 될지도?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토를 웃으며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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