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 주웠다 (3)
‘그러고 보니 30%가 육지랬나?’
도현은 모르달의 브리핑에서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워프에서 며칠 지내며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망할 시겔로…….’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시겔로가 크라켄을 집어삼키고 사라진 직후 떴던 알림창을 다시 확인한 도현은 얼굴을 구겼다.
[20시간 이후 워프가 파괴됩니다.]
벌써 4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빙판으로 몰려든 인어들은 자연스럽게 연회를 벌였고, 어느 순간 빙판에는 인어들로 가득 찼다.
그럼에도 계속 불어나는 인어들은 빙판 근처 수면 위를 표류하며 웃고 떠들고 마셨다.
마지막 만찬.
그들도 알고 있기에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다.
도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번 크로아 워프와 다르게 인어 워프의 하늘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지구에서는 못 보는 달과 별이 뜬, 평범하리만큼 평범한 하늘.
분위기를 휘어잡은 휘르카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뽑아냈다.
40대 중반으로 보여서일까, 그런 모습이 썩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도현은 그런 휘르카를 보며 연회가 열리기 전 자신에게 떠넘겼던 짐을 떠올렸다.
귀하다는 음식에서부터, 옷과 장신구, 생물. 그리고 밤의 인어족의 보물까지.
그 모든 게 모이고 모이니 집 옆 빙판에 산처럼 쌓여 버렸다.
도현은 관심 없었고, 그가 관심 없으니 모두 관심을 끊었다.
오히려 토토가 관심을 보였지만, 웬일인지 모르달이 혼을 냈다.
그 모습에 그는 더 어이가 없었지만.
‘……?’
도현은 이질적인 인기척을 느꼈다. 빙판에서 반대편쯤 되는 곳에서 느껴지는 것이 무척 노골적이었다.
‘마실이라도 다녀올까.’
몸을 일으킨 도현은 잠시 휘르카와 시선이 마주쳤다.
천 년을 사는 게 인어라며, 자신은 아직 500살이라 젊다는 휘르카는 도현을 향해 호의 가득한 눈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휘르카가 민혁과 아바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는 도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인기척을 따라 수면을 걷다 보니 육지가 나타났다.
30%밖에 되지 않는 육지.
‘경기도 크기쯤?’
드넓은 바다에 비해 면적이 좁은 것이지, 작다고는 할 수 없는 크기였다.
도현은 조용한 바닷가를 훑었다.
자갈이 가득한 바다 뒤로 이름 모를 나무들이 병풍처럼 늘어져 있었다.
대한민국이었다면 자정을 넘긴 새벽쯤.
빛이라고는 하늘에 뜬 달과 별이 전부인 탓에 웬만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잘못 디뎠다간 넘어지기에 십상인 곳이었다.
그런 경치와 달리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꼭 제브라드에 있는 것 같잖아.’
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느낌, 정말 불쾌하다.
일분일초라도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새까만 나무들의 그림자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훔쳐보는 게 취민가? 나오지?”
그저 쓸려 가는 잔잔한 파도 소리 사이로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발걸음이 들렸다.
“니, 생각보다 예민하네.”
클클, 웃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화르르륵!
영롱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 흔히 말하는 도깨비불이었다.
푸른 불꽃이 바닷가를 가득 채우자, 말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에서 흔하게 볼 캐주얼 차림의 30대.
세미투블럭 머리끝이 불꽃에 검푸른빛으로 반짝였다.
도현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빈정거렸다.
“요즘 도깨비는 지구도 팔아먹나?”
“아, 새끼. 골고타 기억 좀 봤다고 까칠하네.”
구수한 사투리. 랩 같기도 했고, 어떻게 들으면 외국어 같은 말에 도현은 헛웃음이 나왔다.
“개소리는 그만하고, 왜 불렀지? 여기서 한판 뜰까?”
불쾌할 만도 한데, 사내는 피식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마, 그런 거 아니다. 걍 내가 온 거는… 음, 다는 말 했다간 여기 가 못 버틸 것 같고… 조금만 알려 줄라고 왔다.”
도현은 얼굴을 더 찡그렸다.
남은 6명의 신 중 하나인 게 분명한 놈. 찾아온 건 예상외지만 지구 출신인 신 놈도 있을 줄이야.
‘골고타 기억에도 신상 정보는 없었으니까.’
그저 머릿수만 알고 있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랄까.
‘차라리 없애는 게 낫겠어.’
그렇게 마음이 기울었을 때, 사내가 탄식했다.
“하, 자슥. 인상 쓰는 거 봐라. 내 죽일라고? 히야… 진짜 매정한 새끼네? 이런 놈한테 부탁해야 한다니, 내 팔자도 참…….”
짜증 가득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뭐? 부탁?”
사내는 장난스럽던 모습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라.”
불쾌했다.
이 말만큼은 진심 같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뭐, 니한텐 호들갑 떨 일은 아니겠지만.”
“제대로 알아듣게 말해.”
도현이 손을 허공으로 뻗자, 사내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엄살을 떨었다.
“아이고야. 무서워서라. 더는 말 못 해서 그러는 기다. 그럼 간다.”
순간 바닷가를 둘러쌌던 푸른 불꽃들이 사라졌다. 새카만 주변엔 다시 정적과 함께 잔잔한 파도 소리만 감돌았다.
도현은 어이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대체 뭐야?”
***
도현이 빙판에 돌아온 건 수평선에서 해가 막 떠오르는 참이었다.
출신이 같다는 이상한 신 놈을 만난 뒤로 육지를 둘러봤지만, 그저 몬스터가 사는 숲일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 긴 외출을 다녀온 그는 빙판 근처에 다가갈수록 소란스러운 상황에 눈을 깜빡였다.
꽈과과과광!
빙판을 둘러싼 거대한 몸집의 물고기.
워프에 들어오자마자 추락할 당시 아바를 잡아먹으려 했던 그 고래였다.
큰 고래 주위로 작은 고래들이 사방에서 빙판을 향해 머리를 박았다.
어림잡아도 300이 넘는 수.
‘조용하더니 왜?’
크라켄이 사라져서?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일까.
도현은 슬쩍 빙판을 살폈다. 대부분의 인어들이 손에 다양한 마법을 담고 공격 신호만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켄과의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인어들이 긴장을 풀 시간은 잠에 들 때다.
밤에 활동하는 인어이니 평소라면 지금이 그때겠지.
쿠와아아앙!
제일 몸집이 큰 놈의 쩍 벌어진 입에서 괴성이 터짐과 동시에 빙판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방어막이 출렁거렸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방어막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진 놈이 숨구멍으로 푸쉬쉬쉭,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당연하게도 방어막이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래가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휘르카가 외쳤다.
“공격하라!”
그 한마디에 인어들은 고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천 개의 빛덩이가 빙판에 모여든 고래에게 쏟아졌다.
투두두다다다, 꽈과광!
폭격기가 미사일을 쏟아붓듯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터진다. 그 여파로 빙판 주변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휘르카가 손을 올렸다.
인어들은 절도 있게 공격을 멈췄다.
한 번쯤 표정을 풀 수도 있을 법한데, 잔뜩 긴장한 채로 대기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마치 잘 훈련된 군인 같아서, 도현조차도 살짝 감탄했다.
그는 거의 타격받지 않은 고래를 살폈다.
‘아무래도 저 큰 놈이 왕이구나.’
유일하게 몸집이 큰 고래. 검은 피부에는 수없는 상처로 가득했다. 특히 쩍쩍 갈라진 상처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주변에 몰린 고래들에 비해 두 배 이상이나 큰 놈.
아무리 인어의 머릿수가 많더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가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발을 옮기려는데, 휘르카가 인어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물러서라!”
빙판 끝에 몰렸던 인어들이 그 한마디에 빙판 끝에서 멀어져 갔다. 인어들이 모인 곳은 빙판의 중심, 거대한 모닥불이 있는 곳이었다.
빙판 끝자락, 그곳에 혼자 남은 한 인어 휘르카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도현은 몸을 바로 하고 팔짱을 꼈다.
지켜볼 심산이다.
휘르카는 눈앞의 고래들을 씹어 먹을 듯 노려봤다.
바다의 모든 걸 삼키는 고래. 바다의 생명체나 바위, 흙 할 것 없이 전부 먹어 치우는 놈들이었다.
심지어 동족까지 먹어 치우는 그들은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당연하게도 인어들이 바다에 터를 잡은 그날부터 고래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몇천 년 동안 이어진 전쟁 끝에 고래를 바다의 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300년 전 이야기.
오르오타는 보호막을 들이받던 것을 멈추고 휘르카를 비웃었다.
[저주가 풀렸어도 몸을 숨기는 건 여전하구나, 휘르카여.]
“오르오타……!”
휘르카는 씹듯이 낮게 읊조렸다.
대왕흑고래의 왕 오르오타. 선대 인어왕의 죽음을 헛되게 했던 그놈이다.
헐떡이던 그놈의 숨통이 끊기기 직전, 탄생한 크라켄으로 고래족은 도망갔다. 그 자리에 남은 인어만이 크라켄의 제물이 된 것이다.
바다의 새로운 포식자가 된 크라켄은 인어를 맛본 뒤로 인어만을 공격했다.
그때마다 밤의 인어족은 목숨을 걸며 일족을 지켰지만, 크라켄은 인어를 먹을수록 강해졌다.
거기에 도망친 고래들은 크라켄이 오간 뒤 2차로 인어들을 약탈했다.
그렇게 아제라나스의 광활한 바다를 누비던 수만의 인어들은 50년 만에 반 토막이 나 버렸다.
심지어 훨씬 강해진 크라켄은 인어에게 저주를 걸었다. 바다를 다루던 인어는 능력을 잃었고 모습까지 흉측하게 변했고, 그저 크라켄을 위한 번식만 하는 먹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길고 길었던 200년간의 치욕.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왔다!
휘르카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는 희열과 분노를 담아 외쳤다.
“케라우노스!”
양손을 꽉 쥐자 푸른빛을 머금은 은색의 삼지창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여명이 밝아 오는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새카만 어둠.
번쩍!
푸른빛과 함께 세상이 반으로 쪼개졌다.
꽈과광!
직격으로 맞은 오르오타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으윽! 케라우노스… 흐흐, 고래족을, 이 대왕흑고래의 왕을 우습게 보지 마라!]
파르르 몸을 한 차례 떨던 고래왕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삐이이익―!
고음의 초음파가 오르오타를 중심으로 동심원이 거칠게 바닷물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휘르카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했다.
오직 거대한 몸뚱이밖에 없는 고래 놈들이 마나를 다룬다고……?
속마음을 읽은 듯 고래왕의 눈이 휘어졌다.
[인어는 아주 좋은 먹이지.]
“……!”
초음파는 보호막을 뚫고 인어를 덮쳤다.
끄아아악!
어리고 연약한 인어들이 피를 토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내 소중한 일족이……!’
부릅떠진 휘르카의 망막에 쓰러지는 인어들이 담겼다.
감지 못한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 르. 오. 타아아아!”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위에 또다시 푸른 벼락이 내려쳤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닌 수십, 수백 개였다.
쿠르릉, 꽈광, 꽈과광!
수면 위로 머리를 들이미는 고래들에게 푸른 벼락이 가차 없이 떨어졌다.
벼락을 맞은 고래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배를 뒤집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헉, 헉……!”
휘르카는 손에 쥔 케라우노스를 빙판에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크흐흐… 후자타에 비해 아직은 애송이구나. 모두 내 먹이가 되어, 아제라나스의 왕을 경배하라! 크하하하!]
아직도 건장한 오르오타의 목소리에 휘르카는 이를 갈았다.
고래 대부분이 벼락에 죽었건만, 오르오타와 그의 친위대 넷은 건장했다.
친위대가 초음파를 뿜어냈다.
휘르카는 오싹함을 느낌과 동시에 인어들을 보며 비명처럼 외쳤다.
“모든 인어들은 반대편으로 도망쳐라!”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빙판이 요동쳤다. 거대한 마나를 뿜은 초음파는 수천 m에 달하는 해일과 함께 빙판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