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 주웠다 (2)
시겔로, 이 미친놈이 날뛰었다가는 워프째 날아가 버릴 테니까.
도현은 급속도로 죽어 가는 크라켄의 머리를 향해 시겔로를 휘둘렀다.
“……?!”
머리를 가로로 절단하려 했던 의도와 다르게 시겔로는 도현의 손을 빠져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시겔로의 검 끝에, 허공이 벌어졌다.
찌지지지직!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까지 쪼갤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그 크기에 도현은 가볍게 넘긴 생각들이 쏟아지듯 떠올랐다.
왜 크라켄이 나타났는가.
크라켄이 정말 3등급 워프에 맞는 몬스터인가.
크라켄이 품은 마나는 무엇인가.
“워프핵…….”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이 또 처먹었다간 이젠 정말 모든 힘을 복구하기 전까진 써먹지 못할지도 모른다.
도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겔로를 소환 해제했다.
그 순간, 크라켄의 머리가 갈라진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미친 새끼가?!’
저 문어 대가리를 먹기 위해 소환 해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젠 이놈을 이기기 위해서는 90% 이상 힘이 회복되어야 비벼 볼 수나 있었다.
결론은 예정대로 흘렀다.
시겔로는 거대한 크라켄의 머리를 꿀꺽 삼키고 사라져 버렸다.
[워프핵이 파괴되었습니다.]
[24시간 후 워프가 폐쇄됩니다.]
알림이 귀를 때렸다. 하지만 도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 미친 새끼…….”
그래, 왜 사고를 안 치나 했다.
짜증을 가득 담아 시겔로의 이름을 씹어 대는데, 예상과 다른 상황에 놀란 민혁이 다급하게 물었다.
“현아, 어떻게 된 거야?”
“보다시피.”
시겔로가 사라진 자리에는 머리를 잃은 크라켄의 다리만 축 늘어져 있었다.
바다의 왕의 끝이라기엔 너무나도 허무했다.
***
오랜만에 화가 잔뜩 난 도현을 본 민혁은 본능적으로 입을 닫았다.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아바도 얼굴로 궁금증을 표했을 뿐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갑자기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저 잔잔한 물결 소리만 들리는 바다.
숨 막힐 듯한 고요함에 진땀 흘리던 둘은 바다에서 빛이 터져 나오자 이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길 포기했다.
후화아아악!
바닷속, 바다 해수면 할 것 없이 빛무리가 터졌다.
제일 큰 빛무리는 현재 이들이 있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이곳.
크라켄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갈라진 바다의 물 벽에 모여든 인어에게서 터져 나오는 빛이었다.
어느새 한밤중이 된 바다가 빛으로 인해 대낮처럼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빛이 사그라들고 사람들이 갈라진 바다에 나타났다.
연예인도 울고 갈 다부지고, 늘씬한 미남 미녀들이었다.
푸른 머리에 푸른 눈.
나이에 따른 외형만 다를 뿐인 이들은 놀랍게도 인어였다.
그 수만 해도 몇천은 될 인어들이 무척 자연스럽게 걸어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민혁과 아바가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을 바라봤다.
도현은 팔짱을 끼고 머리를 삐뚜름하게 기울여 인어들을 지켜봤다.
열 걸음쯤의 거리를 두었을 때, 인어들이 멈춰 섰다.
팽팽한 긴장감이 날카롭게 변하려고 할 때. 선두의 인어, 휘르카가 도현을 향해 양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은인이여, 기나긴 저주를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휘르카의 뒤를 이어 인어들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저주를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라켄을 물리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른 물결이 파도처럼 이어졌다.
긴장이 넘쳤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기쁨으로 넘쳐 났다.
민혁과 아바도 워프에 오고 처음으로 편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아바는 미국에서 볼 수 없었던 생소한 형태의 워프에 눈을 반짝였다.
그때, 도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고마워할 게 아닌 것 같은데.”
민혁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다, 방금 떴던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민혁과 시선이 마주친 아바가 수긍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켄의 머리가 사라질 때 도현이 그랬었지?’
워프핵.
민혁은 처음이니 모르겠지만 아바에게 있어서는 흔한 일이었다.
한 해에 기하급수적으로 생성되는 워프를 감당하려면 선택권은 워프 파괴만이 해결책이었으니까.
그만큼 그녀는 워프핵을 파괴하는 이 상황이 익숙했지만, 반대로 몬스터가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들었던, 그래서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아… 워프 연구가!’
최초의 워프 연구가. 그중에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진미경 소장.
‘워프는 지구와 연결된 다른 차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침략자가 된 셈이죠. 그들을 이해하고, 공생하자는 게 아닙니다. 한쪽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단지, 우리의 삶이 있듯, ‘몬스터’라 부르는 그들에게도 삶이, 이야기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세상이 바뀌고 1년. 그녀가 발표한 워프라는 차원 해석의 결론이었다.
이 발표는 각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거센 항의로 이어졌다.
워프 연구가라는 자리까지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노아 이선이 3급 워프를 단독으로 파괴하며 이슈를 몰았다.
‘제가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진미경 박사의 ‘차원 해석’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헌터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기쁩니다.’
그 일 이후로 진미경 박사는 최초 워프 연구가에 이어 최초 워프 연구소 소장이 될 수 있었다.
그 일화를 떠올리던 아바는 머리끝까지 치솟는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민혁만이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휘르카는 도현이 툭 던진 말에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은… 피할 수 없지요. 하지만 밤의 인어족의 염원을 풀어 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연륜이 묻어나는 푸른 눈동자에 순수한 기쁨과 호의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티 없이 맑게 빛나, 아바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저렇게 아름다운 인어가 그런 악독한 저주에 걸리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도현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던 도현이 시겔로가 먹다 남긴 크라켄의 다리를 챙겨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하얀 덩어리, 모르달이 물속에서 갈라진 바다로 급하게 튀어나와 헛것이라도 본 듯 떠들어 댔다.
“도, 도련니이이임! 인어가, 인어가, 인간이 되었슴… 헉! 이것들은 뭠니까욧?!”
‘비린내 남니다욧! 으웩!’이라 외치며 코를 부여잡고 파닥이는 모르달에게 휘르카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모르달 님, 다시 부탁드립니다, 생명이 다한 제 일족을 돌려주십시오.”
아무래도 사체를 수거하다 문제가 생겼나 보다.
‘그런데 정말 인어 고기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을까?’
도현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제브라드의 세에렌은 해일을 일으키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 외에 특출 난 게 없었다.
솔직히 그 재능도 일족의 보호와 번식을 위한 것일 뿐.
그런 쓸모없는 것들과 달리 인어가 옛이야기처럼 효과가 있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젊어지기만 해도…….’
이 워프가 3주기를 맞든 4주기를 맞든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남겨 두려 하겠지.
‘하긴. 그게 영생이니까.’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무력으로 하는 전쟁이 아닌, 돈과 인맥이라는, 물밑 시궁창 전쟁 말이다.
도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돌려줘.”
모르달이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씰룩였다.
휘르카와 인어들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도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채 반밖에 남지 않은 크라켄의 사체를 인벤토리에 넣고 손을 털었다.
“저녁 다 됐겠다. 저녁 먹자.”
말 끝나기 무섭게 도현은 어깨에 앉은 토토와 민혁만 챙겨 쌩하니 먼저 가 버렸다.
구시렁거리며 캡슐에서 인어 사체를 꺼내는 모르달과 덩그러니 남은 아바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또 나만 놔두고 갔어?!”
***
빙판을 해산물로 가득 채우려 했던 도현의 기대와 달리 빙판을 채운 건 사람의 모습을 한 인어들이었다.
그 사이로 2, 3m 크기의 소라 껍질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모두 인어가 빚은 달의 인어주라는 술의 빈 통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조개껍질을 깎아 만든 잔을 들고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은 축제를 즐기는 것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위, 바글바글 끓어 대는 솥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고, 빙판 중심에 활활 타오르는 불이 빙판을 환하게 비추었다.
대왕 조개를 굽던 장작은 어느새 3개로 늘어나 2배 더 큰 조개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고, 매운탕을 끓이던 솥은 5개로 늘어나 맑은 해물탕이 올려졌다.
당연하게도 모든 재료는 인어들이 바다에서 직접 가져온 것들이었다.
이 모든 연회의 중심은 역시나 도현이었다.
집 앞, 인어들이 접근하지 않는 공터에 앉은 도현은 눈앞에 작게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며 푸른 진주를 깎아 만든 술잔을 손안에 굴리고 있었다.
그런 도현 옆으로 민혁과 아바가, 맞은편엔 휘르카와 그의 휘하라고 소개한 베칸과 이로나가 앉아 있었다.
도현을 제외하고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얼큰하게 취한 휘르카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그때 바닷속 화산이 폭발한 거요! 바다가 쪼개지고, 뒤집히며 물이 끓어올랐지!”
그 분위기를 베칸이 이었다.
“새빨갛고 뜨거운 물이 왈칵왈칵 쏟아졌습니다. 그 물에 닿은 모든 것은 불타올랐고, 결국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어머니의 노여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로나가 슬픈 눈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화를 풀어 드리기 위해 제를 올렸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영원의 안식처가 무너져 내렸죠. 그곳에 처음 보는 문물이 있었습니다.”
민혁과 아바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동시에 물었다.
“무엇이었습니까?”
“뭐였어요?”
대답은 휘르카에게서 나왔다.
“우리, 밤의 인어족의 잊힌 문물이었지.”
두 사람은 언제 흥분했냐는 듯 탄식했다.
빙긋 웃는 휘르카는 다시 진지해졌다.
“아주 오래전 인어는 인어가 아니었네. 은인들과 같은 모습이었지.”
민혁이 눈이 튀어나올 듯 호응했다.
“사, 사람이었다고요?!”
“그래, 그래. 그 시대에는 이렇게 바다가 넓지 않았어. 바다 대부분이 마른 땅이었지.”
어떤 이유에서 바다가 되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인어들은 마른 땅이 물의 품으로 돌아온 날을 어머니의 부름이라고 일컬었다.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어느 소설에서나 다룰 법한 것들이었다.
전설이라든지, 바닷속 특이한 곳이라든지, 인어들조차도 가 보지 못한 먼 바다나 깊은 바다 같은.
많은 이야기들 중에 도현의 흥미를 끈 건 단연 바닷속에 가라앉았다는 문물과 육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