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73화 (73/200)

# 73

73. 주웠다 (1)

온 세상이 하얀 도화지처럼 변했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민혁은 모래성처럼 빙판에 무너졌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 세상을 물들였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왔다.

그 사이로 표적으로 삼은 크라켄의 눈이 보였다.

말짱했다.

“씨…발…….”

‘저런 걸 어떻게 죽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뱉을 힘도 없었다.

그대로 빙판에 쓰러졌다.

민혁은 크라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별똥별이 자신을 향해 떨어진다면 이런 크기일까, 흉흉한 형광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삼킬 듯 다가오자 그제야 공포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때,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크라켄의 눈 속에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다.

아바였다.

‘아…….’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민혁은 정신을 놓았다.

“Shadow of Vampire!”

그녀는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빙판에 깔린 그녀의 그림자가 쭈욱 늘어나더니 수백 마리의 박쥐가 되어 흩날렸다.

다시 모여든 곳은 크라켄의 눈이었다.

키이이익!

비명 같은 박쥐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형광 녹색 눈동자가 빛을 잃고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눈동자가 너무 큰 탓에 그 면적은 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턱없이 작았다.

그래도 타격이 있었다. 크라켄이 그 거대한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으니까.

쿠우우웅!

뱃고동이 울리듯 거대한 울음소리 뒤로 바닷속에 숨겨 뒀던 모든 다리가 빙판을 그러쥐었다.

“꺄, 꺄―악!”

방어막이 깨지진 않았지만, 지진이 난 것처럼 빙판이 출렁였다.

아바가 중심을 못 잡고 빙판 위로 넘어졌다.

크라켄의 눈을 공격하던 박쥐들이 사라졌다.

그녀는 눈앞의 크라켄이라는 절망과 짙은 공포에 먹혀 버렸다.

“으…어…어…….”

풀려 버린 다리로 빙판을 밀어 보지만, 덜덜 떨리는 팔다리는 그저 허우적거리는 몸짓에 불과했다.

툭.

그러다 손에 스친 민혁을 보고 넋이 나간 듯 멈췄다.

혼절한 민혁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어, 죽은 듯한 모습이었다.

공포로 가득 찼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곤 벌겋게 달아오르며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우도현, 이 개새끼야! 친구라며?! 친구를 죽일 셈이냐고오오오!”

여태껏 지켜보고만 있던 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왜 난리야?”

아바는 기가 막혔다.

날뛰는 크라켄에, 초보지만 몸이 부서져라 힘을 끌어 올린 민혁도 죽어 갈 판에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는 헌터라니.

저 새끼가 세계 정점의 우도현앓이의 주인공이라고?

“……쓰레기 새끼.”

저건 쓰레기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헌터라면, 최소한의 협력은 해야 할 거 아닌가!

그것도 팀장이란 새끼가!

‘이런 쓰레기를 본국에서 원한다고?’

성과를 닦달하던 본국에 의심이 피어올랐다.

저런 새끼를 데려가려고 했던 자신에게 혐오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인간미가 있는 김민혁이 백 배, 천 배 낫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욕과 살기를 담아 도현을 씹어 먹을 듯 노려봤다.

도현은 그런 시선을 가볍게 넘기며 낮게 웃었다.

“어떻게 내 별명을 알았지.”

최악이다.

고개를 돌려 버리려는데, 먼저 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런 놈은 한 방에 처리해야 하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현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비었던 손에는 검 하나가 쥐여 있었다.

‘단검? 아니, 길어…….’

아바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저게 무기……?

숏소드도, 그렇다고 소드도 아닌 애매한 길이다. 경계도 없이 칼날에 툭 꽂힌 손잡이까지.

포크에 꽂힌, 잔뜩 타 버린 스테이크 같았다.

불쾌감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

그녀가 그러든 말든 도현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긴장감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봐.”

도현이 장난처럼 검을 아래서 위로 그어 올렸다.

푸아아악!

방어막을 부수기 위해 달라붙었던 크라켄의 몸에서 푸른 핏물이 튀어 올랐다.

쿠어어어어―!

풍덩, 풍덩! 아파트 한 동 크기의 다리 두 개가 바다로 떨어지며 물기둥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괴성을 지르던 크라켄이 방어막에 붙은 다리를 떼더니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도현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숨어? 숨으면 못 찾을 줄 아나?”

도현이 시겔로를 바다를 향해 쭉 뻗었다.

“밥값 해라, 시겔로.”

‘밥값?’

어처구니없는 말에 아바는 저 인간은 애초 미친놈이었던 걸로 결론지었다.

눈앞에 이런 현실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짜자자자작!

도현이 뻗은 검에서 뿜어진 검은 스파크가 바다를 가르고 날아갔다.

그 순간.

콰콰콰콰콰!

바다가 갈라졌다.

모세의 기적.

종교가 있든 없든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적 있는 단어였다.

도현의 손에 들린 시겔로 앞으로 바닷물이 갈라지며 바닷속에 숨겨졌던 육지가 드러났다.

아주 잠깐의 갈라짐이라면 이해 범위라고 납득했겠지만, 검은 빛줄기가 가로지른 바다는 칼집을 내고 쪼갠 과일처럼 속살을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그리고 그 끝, 수평선이 닿을 만한 저 먼 곳에 거대한 몸집의 크라켄이 쿵, 하고 물이 사라진 바닥에 떨어졌다.

아바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마음과 달리 입을 쩍 벌리고 휘둥그레진 눈을 비비고 또 비벼 눈앞의 현실을 확인했다.

‘이… 이게 사람의 힘이라고……?’

도현은 넋이 나간 그녀를 두고 쓰러진 민혁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레이트 리커버리.”

진한 녹색 빛이 민혁의 몸을 감쌌다. 하얗게 질렸던 민혁의 얼굴에 핏기가 돌며 얕았던 숨이 한결 편하게 들이쉬어졌다.

그녀가 멍하니 도현을 쳐다보자, 민혁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아이고, 삭신이야. 사흘 밤낮으로 노가다 뛰었… 아, 몬스터! 몬스터 어떻게 됐어?!”

“저기.”

도현이 검 끝으로 갈라진 바다 사이에 꿈틀대는 크라켄을 가리켰다.

눈을 한참 끔뻑이던 민혁은 아바처럼 도현을 멍하니 봤다.

도현이 크라켄을 향해 턱짓했다.

“뭐 해? 찌끄레기 주우러 가야지.”

전혀 긴장감 없는 말이었지만, 잠깐의 정적이 감돌았다.

도현이 눈을 끔뻑이며 민혁을 보자, 민혁은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핫!”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 정도로 웃어 젖히던 민혁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일어났다.

‘그래, 이런 놈이었지. 우도현이란 놈은.’

고등학생 때였다. 대뜸 알바 월급 탔다고 한턱 쏜다며 간 곳이 일본 당일치기였다.

전날 여권 챙겨 오라던 이유가 이거였을 줄 누가 알았겠나.

가서 한 거라고는 시내를 걸어 다니다 라멘만 먹고 돌아온 것.

황당하기도 하고 그저 한 끼 식사를 위해 일본에 왔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모든 비용은 도현이 냈기에 불만은 있을 수 없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참신한 발상.

그때의 그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같아 보이는 건 뭘까.

민혁은 아직 남은 웃음을 털어 내며 바다를 바라봤다.

모세의 기적을 연상케 하는 갈라진 바다.

그 거리만 해도 10km는 될 것 같았다.

저 멀리 수평선이라는 경계에 숨만 붙어 헐떡이는 크라켄이라니.

‘포세이돈이 나와도 놀랍지 않겠다.’

신화 속 신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망상을 하며 민혁은 도현에게 물었다.

“야, 저걸 어떻게 주워 와? 빙판에 올라가겠냐?”

“인벤에 넣으면 되잖아?”

“인벤토리? 야, 그게… 하. 헌터면 다 있는 줄 알아?”

“어.”

“아… 정말 한 대 때리고 싶다. 너무 잘나고 강한 놈이 친구라서 더 짜증 나.”

진심을 담아 말했음에도 도현은 픽 웃을 뿐이었다.

도현은 턱을 쓸며 잠깐 고민하더니 툭 내뱉었다.

“일단 가 보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혁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어… 어?”

빙판을 박차고 날아가듯 뛰는 도현의 뒤로 자신의 몸이 날아가고 있었다.

물만 봤다면 느끼지 못했지만, 갈라진 바닷속 바닥을 보자 잔상도 느낄 새 없이 화려한 색감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멀미로 위장이 뒤집히려 할 때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크라켄이 나타나 있었다.

츄우우욱!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크라켄은 뭍에 떠밀려 온 생선처럼 물을 토해 내며 남은 6개의 다리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민혁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크라켄 앞에서 고민 중인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냥 여기서 분해하고 갈까?”

“심각하게 고민한 결과가 그거야?”

민혁은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저 빙판만 해도 어마어마한 힘을 썼을 텐데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바다를 가른 건 또 어떤가, 크라켄이 누운 이 부분까지 가른 것도 상상이 안 갔다.

그런데 직접 와 보니 크라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저 끝까지 계속 갈라져 있다.

폭만 해도 성인 10명이 서도 될 넓이. 이 모든 걸 유지 중이라는 게 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괴물 같은 놈…….’

“대체 너 5년 동안 뭐 한 거야? 다른 세계라도 떨어졌었냐?”

“어.”

“어… 어?”

대충 진심을 담아 대답한 도현은 시겔로를 안마기처럼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을 차린 민혁이 다시 물어보려고 입을 열려는데, 멀리서 아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혁 씨!”

토토와 모르달을 달고 온 아바는 크라켄을 보고 다가오다 멈췄다.

“아, 아직 살아 있네요……?”

“고민 중이야.”

도현이 ‘이참에 회로 떠 먹어 볼까, 아니 문어는 숙회지.’라고 중얼거리자 아바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금 전까지 공략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먹거리로 전락해 버리니 그 괴리감과 충격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토토가 냉큼 도현의 어깨에 올랐다.

“압빠, 무너 마싯겟따!”

눈을 반짝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맛있는 건 알아서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데 모르달까지 다가와 군침 가득, 촉촉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도련님, 문어 숙회 먹는 검까욧?! 매운탕과 조개 구이도 좋지만 역시 문어숙회가 진리이지 않슴까욧!”

즐거웠던 도현이 입꼬리를 내리며 모르달을 빤히 쳐다봤다.

움찔 놀란 모르달이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굴렸다.

도현은 모르달 너머, 벽처럼 솟은 바다의 인어들을 검지로 가리켰다.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모르달이 아공간에서 스캔 레이저와 캡슐을 꺼내 들고 줄행랑치듯 바다로 달려갔다.

“이, 일하고 오겠슴다요! 제 몫도 남겨 주심쑈, 도련니이이임!”

도현은 꼬리 빠지게 달려가는 모르달을 보며 혀를 찼다.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치밀어 올랐던 짜증은 좀 가셨다.

도현은 흠, 콧숨을 내쉬며 시겔로를 들었다.

민혁에게 몬스터 수거를 맡길 생각이었지만, 인벤토리가 없는 이상 자신이 해야 했다.

‘돌아가면 아공간 주머니라도 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크라켄을 부위별로 훑었다.

크라켄의 피부는 보기에 매끈하고 여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웬만한 무기도 박히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미끄럽고, 단단했다.

그가 아직 시겔로를 쥐고 있었던 이유였다.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얌전하지?’

시겔로가 딱히 관심 끌 뭔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손질 시스템도…….’

이놈은 레벨이 얼마나 높은지, 손질 시스템이 거부했다. 레벨을 올려야 한다는 메시지만 떴다.

‘뭐 어쨌든.’

손으로 대충 잘라도 크게 문제없는 크기니 오히려 잘됐다.

‘손질 끝날 때까지만 얌전히 좀 있어라.’

주문 아닌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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