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62화 (62/200)

# 62

62. 시작 (2)

리암 루카스는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어깨에 스치는 회색 단발, 심해를 갖다 박은 것 같은 시리도록 푸른 눈.

막 몬스터 워프 하나를 파괴하고 온 탓에 눈과 몸에는 흩어지지 않은 미약한 살기가 야수 한 마리를 연상케 했다.

그나마 대충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왔으니 사람 모습은 한 것 같달까.

“피곤하군.”

그는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워프란 게 생겨나고 그가 쉰 적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워프 파괴에 들어가면 최소 3개에서 많게는 10개의 워프를 돌아야 했다.

때문에, 시간도 최소 일주일. 최대 한 달 동안 워프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렇게 워프 파괴가 끝나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지만, 다시 자신을 기다리는 건 보고였다.

과로사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만 헌터가 과로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자체도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그래도 1년 전까지는 할 만했는데.’

그때는 그나마 세계 유일무이한 1급 헌터 노아 이선이 1선에서 활약했기에 숨 돌릴 틈은 있었지만, 그가 행방불명이 된 지금은 리암이 임시로 대표 헌터를 맡고 있었다.

그저 허울뿐인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을 보던 그의 눈에 불만이 서렸다.

본래라면 한 달 만에 돌아온 오늘만큼은 모든 걸 미루고 쉬었을 휴일이었지만,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은 미국 헌터 협회.

결국, 쉬지도 못하고 제일 높은 분의 부름으로 오게 된 게 못마땅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건지.’

미국 헌터 협회장.

늘 익살스러운 목소리는 의중을 알아채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업무 처리 능력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이였다.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다른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4급 헌터라는 것 정도랄까.

그리고 무척 말이 많다.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진 리암은 그 잠깐 사이에 5년은 늙은 듯했다.

띵!

리암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발을 내디뎠다.

긴 복도를 따라 양옆에 기둥처럼 선 경호원들이 그가 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겉으론 일반적인 보디가드 같아도 전부 5급 레드 헌터들이었다.

어림잡아도 20명 남짓.

3급인 자신에게는 낙엽들로 보일 이들이지만, 웬만해서 밀릴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어떤 국가든 3급 이상의 헌터들은 늘 부족하다. 그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귀화라는 물밑 작업에 열을 올렸다.

‘아바는 대체 뭘 하는 거지?’

변수가 많이 적용되긴 했지만, 그녀가 해내야 했다. 지금에 와서 다른 헌터를 파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엉뚱한 성격이나 헌터 같지 않은 밝음이 걸렸지만, 능력만큼은 좋은 헌터였으니 믿고 기다릴 수밖에.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문 앞.

“오셨습니까, 리암 루카스. 주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한 사내가 그를 반겼다.

올백으로 넘긴 금발 아래로 검은 슈트를 입은 올란드 그레이스.

따지자면 총지배인쯤 되는 인물이다.

미국 헌터 협회 협회장의 비서이기도 한 이 늙은이 역시 헌터다.

말없이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올란드가 짧게 문에 노크했다.

“들어와.”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올란드가 문을 열며 과한 몸짓으로 리암을 향해 몸을 비켰다.

달칵.

문이 닫히고 고급스러운 책상 너머 등을 보이던 의자가 돌았다.

리암을 부른 사내, 미국 헌터 협회장인 와이어트 콜튼이었다.

와이어트는 리암을 보고 담배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작은 남쪽 땅에서 일어난 일로 세상이 떠들썩해졌네.”

리암이 여기에 오기 전 짤막하게 들은 소식이었다.

베일에 싸였던 새로운 3급의 공식 데뷔.

그 데뷔 무대는 변이하는 석유 워프에 갇힌 헌터 구출이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한국을 먹여 살린다고 할 수 있었던 그 워프는 애초 4등급이었지만, 1주기를 거쳐 3등급이 되고 2주기에 접어들면서 1등급으로 변할 워프였다.

강한 헌터의 부족으로 폐쇄를 결정했었지만 그걸 번복한 차도식이 팀을 꾸려 헌팅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워프가 변이를 일으켰고, 동시에 워프의 소멸도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생겨난 마나 자기장.

모두가 접근하지 못하는 와중에 신생 헌터 우도현이 마나 자기장을 뚫고 홀로 들어가 헌터들을 구출했다는 소식이었다.

공식 3급 헌터라지만, 3급 헌터가 하지 못할 일을 해낸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걸 감추지도, 명확한 답을 하지도 않는 한국 헌터 협회장에게 세계 각지의 헌터 협회에서는 불만을 투덜거릴 뿐.

현재 헌터 강대국은 한국이었으니까.

신생 헌터에 대한 관심은 더욱더 높아졌다.

1등급 워프를 파괴한 3급 헌터.

말이 3급 헌터이지, 최소한 2급의 차도식 헌터와 비슷하거나 이상일 거란 추측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들썩이는 가운데 리암은 아바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으니까.

겨우 남은 방법이라고는 정공법인 신생 헌터를 미국에 귀화시키는 것이었지만, 세계 몬스터 시장을 장악한 블랙홀의 2세라는 말에 절대 통할 리 없음을 깨달았다.

애초 능력 부족이었다면 헌터 파견을 더 요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능력한 년.’

결국, 자신의 모든 노력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와이어트는 조용한 리암을 살폈다. 얼굴은 인형처럼 무표정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쯤은 집어낼 수 있었다.

와이어트는 슬쩍 미소 지으며 과장되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래, 리암. 네가 노아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늘 어려움이 많은 건 알지.”

“……?”

저 인간은 왜 또 저러는지.

리암은 괜히 불안해졌다.

헌터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지만,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재벌가의 차남이다.

모두가 돈으로 산 지위라며 뒤에서 수군대지만, 리암만큼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매드아이즈.

각성과 함께 가진 능력 중 하나.

결과만 확인할 수 있었던 탓에 확실하게 안다고는 말 못 하지만, 전조 증상 같은 것은 있었다.

지금처럼 뜬금없는 개소리를 해 댄다는 것.

“리암, 강해지고 싶지 않나?”

노아 이선의 그림자에 짓눌린 리암을 모르지 않는 그가 정곡으로 찔러 대자 리암은 입술을 비틀었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때쯤, 와이어트가 덧붙여 말했다.

“2급, 아니 1급이 되는 거야. 노아를 넘어선 새로운 1급 헌터 말이지.”

노아 이산의 등급은 1급 골드. 다른 등급의 블루와 같다.

‘그 이상이라면 골드글라스?’

골드 위, 반투명한 골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인 크리스탈도 있지만, 그 등급은 신이 직접 와야 가능하다.

‘골드글라스라….’

그렇게 고생하며 바랐던 정상이지만 그게 쉬웠다면 이렇게 개고생을 했을까.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와이어트의 미친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와이어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오른손 손등을 리암에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능력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군. 영광으로 알게.”

즈즈즛.

삭막하던 방 안에 무거운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생각 이상의 마나 양에 흠칫한 리암이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모든 마나가 와튼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쩌어어억!

세로로 찢어진 손등을 가득 채운 건 눈이었다.

살아서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초록색 눈알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 댔다.

“소개하지, 휴레가크 님의 마안이네.”

와이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을 뚫어지라 보는 눈알을 보고 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에놀드가 다녀가고 일주일.

-지하 1층입니다.

도현은 반쯤 감긴 눈을 문지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압빠! 차 마나! 대따 마나!”

도현의 어깨에 자리 잡은 토토가 들뜬 목소리로 폴짝폴짝 뛰어 댔다. 그런 토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도현 뒤로 모르달이 총총거리며 따라 내렸다.

“역시 도련님! 이 모르달과 토토 님을 위해 차를 사셨다니! 이게 바로 TV에서나 보던 서프롸이즈~임까욧?!”

반짝임을 넘어 그렁그렁한 눈물을 맺고 있는 눈이나 광란의 트위스트를 추는 꼬리를 본 도현은 불쾌해졌다.

가뜩이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움직이는데.

행동은 빨랐다. 자연스럽게 걸으며 발꿈치를 뒤로 차올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모르달이 천장을 찍고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나 저만치 가 버린 도현의 뒤를 바짝 쫓아온 모르달이 굽실거렸다.

“아이고, 도련님. 저혈압이라 그런지 걷는 걸음도 특이하심다요, 후후훗! 앗, 이 차임니까요?”

모르달이 뭐라 떠들든 도현은 일주일 전, 자동차 매장 직원이 주고 간 키의 버튼을 눌렀다.

구후우웅!

낮으면서도 깊게 울리는 배기음이 마치 맹수의 울음소리 같았다.

음. 좋다. 이런 맛에 차를 지르는 건가?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 좋아진 도현은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늑하면서도 넓은 실내가 그를 반겼다.

구름 같은 의자에 앉으니 몸을 감싸는 푹신함에 다시 침대에 누운 기분이었다.

‘보자, 키를 모니터에 꽂으랬나?’

탁 트인 시야 아래 위치한 작은 모니터를 보니 키와 딱 맞는 홈이 보였다. 꽂으니 뚜껑이 내려오며 키를 완전히 감췄다.

그리고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식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도현 님. 로이 인사드립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오.”

“차가 말해! 싱기한 차!”

신문물에 오랜만에 감탄했다.

지금처럼 마나를 한 번 인식하고 나면 언제든 몸만 챙기면 된다더니, 이렇게 편할 줄이야.

왜 진작에 생각을 못 했을까?

아무튼, 이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현은 부모님의 회사인 블랙홀을 도착지로 설정했다.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차가 신기한 토토와 모르달은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차 안 여기저기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둘이서 그러든 말든 도현은 의자에 녹아내렸다. 달콤한 잠에 빠지려던 차에 귀를 때리는 목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도, 도, 도련니이이이임! 여기, 차에 냉장고가 있슴다요오옷! 오옷! 음료수가 이렇게도 많다니잇!”

“토토 까까 차잣써! 냠냠 마싯따아!”

딜러가 냉장고에 뭘 좀 챙겨 뒀다더니, 그걸 찾은 건가?

무거운 눈을 뜨려던 도현은 즐거워하는 토토의 목소리에 마음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 이러라고 산 차지. 예민해질 필요 없는 거야.’

다만 아쉬운 건 저 흉측한 흰 덩어리를 치울 자리 격리라든가, 자리 격리라든가, 자리 격리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집에 버려두고 나오는 수밖에 없겠지만.’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둘은 보물찾기 하듯 이곳저곳에서 발견한 물건을 꺼내며 탄성을 질러 댔다.

놀아 줄 필요도 없고, 대꾸해 줄 필요도 없는 이 편안함.

드론 택시를 탈 때마다 배정될 차가 없다든지, 배차 시간이 턱없이 길어 맨몸으로 날아다녀야 했던 날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후후,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 좋군.’

아늑하고 푹신하고, 알아서 데려다주기까지 하는 차가 있으니까.

‘극락이군, 극락이야.’

흡족한 도현의 입가가 풀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든 도현은 몰랐다.

딜러가 냉장고에 채워 놓은 게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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