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 도를 아십니까? (3)
금을 한 올 한 올 심은 듯 반짝이는 단발.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만큼 차가운 회색의 눈동자가 긴장하고 있었다.
도현은 자신과 비슷한 키의 남자 뒤로 열린 방문을 보고 이해했다. 방문자다.
‘총이라…….’
자신이 제브라드에 떠돌 때만 해도 무기라기보단 귀족 사내들의 액세서리였던 무기였다.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문양을 새긴 화려한 총들은 몇 번 보긴 했지만…….’
이 총은 권총만큼 작은 데다 머스킷과 비슷했다.
“이것 좀 치우지.”
도현의 시선이 금발의 사내와 부딪혔다.
먼저 물러선 건 사내였다.
도현의 머리에서 총을 내려놓은 그는 복도 벽에 몸을 기댄 채 지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대체 여긴 어디지?”
차이나넥처럼 보이는 답답한 흰 칼라 아래로 쭉 뻗은 검은 코트.
허리쯤 두른 천 허리띠 때문에 마른 체형이 도드라져 보였다.
접힌 두꺼운 소매에는 동그란 은테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제브라드교의 신도.
‘그런데 총이라?’
그뿐이면 상관없었다.
누구나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총이었으니까.
하지만 방문자인 이 신도는, 위협이나 협박하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도현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왠지 마음이 통할 것 같았다.
대답을 바라는 혼란 가득한 시선을 무시한 그는 그대로 주방에서 씻어 둔 쌈 채소를 바구니째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멍청하게 서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밥 먹을래?”
기가 찬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던 에놀드는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리는 그를 다시 멍하니 바라봤다.
‘대체…….’
에놀드는 아직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분명 허공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고서 깨달았다.
설마 그 문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 문일 줄이야.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이곳이 집, 내부라는 걸 깨달았다.
특이한 구조와 낯선 물건들이 잔뜩 있는 공간.
도박으로 다져진 그의 높은 눈썰미에 이 모든 게 최고급이라는 걸 놓칠 리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알아낼 생각이었는데…….
목숨을 위협함에도 긴장감 없이 웃기만 하는 사내를 보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어려웠다.
마치 그녀를 보는 듯했다…….
‘제브라드, 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는 아련한 눈으로 자신이 열고 들어온 문을 쳐다봤다.
실제 눈앞에 나타났던 문과는 다르지만 분명 저 문이 맞았다.
하지만 비장한 마음으로 박차고 들어왔던 자신이 갑자기 후회되는 건 왜일까.
에놀드는 저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 죽어 가고 있었다.
오물과 벌레가 득실거리는 쓰레기장에서.
***
팔목과 손목에 박힌 단검은 신성력을 흡수해 그 힘으로 부패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교단의 이단자를 고문할 때 사용하는 무기.
그것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헤집어진 배와 난도질당한 몸…….
어느 것 하나 쉽게 볼 수 없는 상처는 그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진득한 검은 핏물을 내뱉었다.
진작 숨이 멈췄어도 멈췄을 몸이었지만, 이제는 비수가 되어 버린 신성력 때문에 살아 있었다.
비참했다.
“하… 하하…….”
에놀드는 공허한 웃음을 터트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입에 겨우 문 담배 끝에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힘줘 손가락을 튕겼다.
틱.
손톱 끝이 부딪히며 작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넘쳐 나는 신성력에 개인 편의를 위해 만든 잔재주였다.
끈적한 피를 태우며 메케한 연기를 뿜어 댔다.
푸확!
불을 붙임과 동시에 손목에 꽂힌 단검 사이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고통에 에놀드는 절로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연기를 깊게 마시고 뱉었다.
쓰읍, 후…….
“결국… 끝이군.”
에놀드는 하늘을 보며 다시 깊게 마신 연기를 내뿜었다.
우연이었다.
한 여자가 덩치 큰 사내 다섯에게 둘러싸여 범해지는 장면을 본 건.
흔히 뒷골목에서 볼 법한 풍경에 지나치려 했던 그가 멈춘 이유는 너무나도 앳된 목소리가 귀에 꽂혔기 때문이다.
짓눌린 신음과 조금만 힘주어도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체구.
아직 성인식도 지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와 함께 눈이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장정 다섯이 숨을 거둔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그 여자아이가 조용히 앉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찢어지고 늘어나 제구실을 못 하는 옷을 걸친 채, 시선이 마주쳤다.
‘헤…….’
산발이 된 은색 머리카락과 은색 눈동자가 너무 순수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은색?!
성녀의 증거였다.
성녀. 신 제브라드가 선택한 인간.
교황보다 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신이 존재하는 증거라고도 말했다.
6, 7세 때 제 발로 신교에 들어와 16세 성인식을 치를 나이에 숨을 거두는 아이들.
약 10년이라는 짧은 삶을 사는 이들은 꼭 10년에 한 명씩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 교단의 성녀는 14살. 2년 후에나 나타나야 할 성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큭, 하필 만나서는.”
에놀드는 슬픈 눈과 달리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알려져서도, 존재해서도 안 될 성녀.
그는 ‘쌍둥이 성녀’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행동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를 벗은 겉옷으로 감싸자마자 안아 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뒷골목을 빠르게 빠져나와 달리고 또 달렸다.
그저 교단에 신고해 아이를 보내기만 해도 될 일이었다. 그 뒷일은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또렷하게 담아내는 눈동자.
그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고 밤이고 낮이고 내달렸다. 교단에서 언제 냄새를 맡고 쫓아올지 모르니까.
세상의 시작과 함께 존재한 교단이 뻗지 않은 곳은 험한 산이나 척박한 땅, 몬스터가 우글대는 곳밖에 없었다.
당연히 먹을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와 지나치는 곳엔 몬스터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도주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아니,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신교가 닿지 않는 유일한 나라.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이단 심판자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도주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에놀드는 다시 연기를 깊게 마시고 내뱉었다.
쓰레기장에 처박힌 자신과 달리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썩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팔목에 단검을 쑤셔 박던 이단 심판자.
그 면상 뒤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끌려가던 성녀…….
자신을 향하던 울음 가득한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아, 신성력도 이제 바닥이군.”
샘솟는 샘물처럼 넘쳐흘렀던 신성력이 처음으로 메말랐다. 그에 대한 확답으로 부패를 증식시키던 단검이 손목에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동시에 손이 밖으로 꺾였다.
손가락 사이에 들렸던 담배가 굴러떨어졌다.
툭, 치이이익.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가 오물 웅덩이로 빠지며 단발마를 질렀다.
그 모습이 마치 저 자신 같아 에놀드는 피식 웃었다.
“뭐, 나쁘지 않은 결말이야.”
더러운 세상, 더럽게 가는 거 특별할 게 뭐 있나.
그런데도 이상하게 미련이 남았다.
울음 가득했던 은빛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일주일이라는 애매한 시간.
마르지 않는 신성력을 가진 자신조차 힘들어 끙끙댔던 그 상황 속에서 아이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연 적도 없었다.
‘말을 못하니?’
그때,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며 씁쓸하게 웃던 아이의 모습에 에놀드의 입가가 작게 일그러졌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대로 끝이야……?
정말?
갑자기 현실이 훅 밀려오자 세상을 비웃던 얼굴이 무너졌다.
“크흑……!”
억눌린 울음을 시작으로 억억거리며 짐승처럼 슬픔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빌어먹을 신님, 마지막으로 빌 테니, 제발 그 아이 좀 살려 줘요…….’
불평불만만 했던 거 미안해요.
매번 욕 지껄였던 거 미안해요.
술도, 도박도, 담배도……
모든 벌, 달게 받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 좀…….
빛도, 고통도, 소리도 사라졌다.
어둠이 내려앉고, 모든 게 지워지려 할 때쯤.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에놀드는 자신도 모르게 찡그린 눈을 억지로 떴다.
그리고 또렷해진 시야에 한 여인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피처럼 붉은 긴 머리. 청초하면서도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미소.
그가 여태 봐 왔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그럼에도 익숙하리만큼 그리운 기운을 가진 여인.
신 제브라드.
그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에놀드, 고생했어요. 남은 삶은 자신을 위해 살아요.]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고민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따스한 빛이 몸을 감쌌다.
엄마 품속 같기도 했고, 따뜻한 물속 같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눈을 떴을 때, 주변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당황한 그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건 끝없는 지평선뿐.
“아, 몸이……?”
만신창이였던 몸은 말짱했다.
까맣게 굳고 해진 옷이 아니었다면 지독한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에놀드는 습관적으로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아니, 끌어 올리려 했다.
“……신성력이 없어?”
거짓말 같았지만 익숙했던 신성력은 사라지고 텅 빈 몸뚱이만 남아 있었다.
문뜩 죽어 가던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남은 삶은 자신을 위해 살라던 그 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 하하…….’
제브라드.
나의 신이여…….
더는 사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사해야 할까, 살려 준 걸 감사해야 할까…….
황량한 대지만큼 황량해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에놀드는 몸을 바로 했다. 다시 살아났으니,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으니까.
‘문……?’
그런 그 앞에 빛바랜 낡은 나무 문 하나가 보였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아 떴지만, 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허허벌판에 어떻게 문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기적을 한 번 겪은 그는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고.
“다 부질없지.”
복잡한 생각을 지웠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신이었던 그녀가 고쳐 준 이 몸뚱이가 전부다.
이대로 떠돌아다녀 봤자, 3일도 안 돼 이단 심판자들을 만나겠지.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은 눈 아래로 다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습기를 가득 먹었던 회색 눈동자는 다시 떴을 때 시리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놀드는 옷 깊숙이 숨겨 두었던 총을 꺼내 쥐고 문을 발로 찼다.
텅!
그는 그렇게 도현의 집으로 초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