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 도를 아십니까? (2)
도현은 오랜만에 옥상에 나왔다.
한쪽에는 자신의 키만 한 산이 쌓여 있었다.
크로아의 바위산 워프에서 사냥한 크로아로, 3마리만 도축했는데도 양이 엄청났다.
반대쪽에는 화덕과 그 위에 300인분은 거뜬히 끓일 솥이 있었다.
토토표 화덕과 솥.
우선 크로아 곰탕을 만들기로 결정 나자마자 몸이 달아오른 토토가 1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 왔다.
“우선 한 번 삶아서 핏물과 불순물을 빼야 하고…….”
도현은 프린팅한 레시피를 훑으며 할 일과 재료를 준비했다.
저녁 메뉴로 정한 크로아 탕.
크로아 탕을 만들기 위해서는 뼈로 우린 사골이 필요했기에 다른 날보다 저녁 준비가 바빠졌다.
도현은 솥뚜껑을 열어 부글부글 끌어 대는 물에 도축한 뼈와 고기를 쓸어 넣었다.
이대로 2시간을 끓여 물을 버리고 뼈와 고기를 깨끗이 씻어 다시 끓여야 한다.
“괜히 탕에 꽂혀서는…….”
투덜거리며 할 건 다 한 도현은 화덕 아래 아궁이의 불을 확인했다.
새카만 돌덩이에 붙은 푸른 불꽃이 가스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 돌도 크로아의 바위산 워프에서 구한 것으로, 석유가 샘솟는 곳이라 그런지 모든 게 불과는 찰떡궁합이다.
도현은 화덕과 솥에 시간 가속 마법을 걸었다.
2시간이나 걸릴 불순물 제거가 3분 만에 끝이 났다.
이제 고기와 뼈를 씻은 다음 물을 붓고 다시 끓여야 했다.
“이제 고기와 뼈를 씻고…….”
문득 조리 기구의 부재를 느꼈다.
양이 많은 것도 한몫했지만, 누가 이 시대에 곰탕을 집에서 끓이겠는가.
귀찮은 마음에 입으로 투덜거리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성격상 대충 하지는 못하겠다.
이대로 마법을 쓸까 말까 고민 중에 허공에서 모르달과 토토가 나왔다.
“도련님, 대야 가져왔슴다요!”
척하면 척이다.
모르달 머리 위로 들린 대야는 이름이 대야지, 그냥 보면 욕조라고 할 정도로 컸다.
물기가 묻은 대야 속을 확인한 도현은 솥뚜껑을 옆으로 치운 뒤 고기를 욕조… 아니, 대야로 옮겨 담았다.
모락모락 김을 피워 내며 고소한 향을 풍기는 고기가 눈에 들어오자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미약하게 누린내가 나는 것 같았지만, 레시피를 뽑았던 포스팅의 이야기로는 크로아 특유의 육향이라고.
이해하고 있어서일까, 그 향이 오히려 더 허기를 자극했다.
문제는 솥 안엔 아직 뼈가 남은 상태였다.
솥과 대야를 번갈아 보던 모르달이 당황해 외쳤다.
“이미 가득 찼슴다요!”
“압빠! 대야!”
조용하다 싶더니 토토가 다시 농장에 다녀왔는지 같은 크기의 대야가 하나 더 놓였다.
대장장이의 신의 축복을 받았다더니 찍어 내는 공장처럼 뚝딱 만들어 온다.
뼈까지 담고 나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누가 봤으면 식당 차린 줄 알겠네.’
그만큼 셋이서 먹는 양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도현은 다음 할 일을 위해 솥 안을 확인했다.
뽀얗게 우러난 물 위에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간간이 거뭇한 핏덩어리가 먼지처럼 떠다녀 보기만 해도 불순물을 왜 제거해야 하는지 이해가 갔다.
새삼 왜 요리의 기본은 정성이라고 하는지 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솥 테두리를 손으로 튕겼다.
그러자 솥 안에 있던 내용물이 점점 줄어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손을 튕겨 기름과 잔여물로 얼룩진 솥을 세척해 내고 두 대야를 바라봤다.
이 많은 걸 씻어야 하는데.
‘저걸 언제 다 씻어?’
정성은 개뿔,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
평소였다면 요리부터 뒷정리까지 손수 할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다.
“빠르게 하자.”
3초도 안 돼, 태세를 전환한 도현은 빠른 식사를 위해 마법을 팍팍 쓰기 시작했다.
곰탕은 크로아 탕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육수일 뿐이었으니까.
사실 피곤한 상태에서 이런 요리를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마나 회복이라는, 그 단어가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대충 때우고 잤을 게 빤했다.
양쪽 대야에 담긴 고기와 뼈가 세척되는 와중에 도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또 해 먹나 봐라.”
그 맛에 반해 매달 행사처럼 만들어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말이다.
세척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뼈와 고기를 다시 솥에 담자 물이 채워졌다.
혹시 모를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준비한 재료를 우림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월계수 잎, 통 생강, 통마늘, 양파, 씻은 양파 껍질, 계피.
종류도 다양했다. 300인분이다 보니 양도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솥뚜껑을 쥐었을 때 토토가 튀어나왔다.
“압빠, 이고 이고!”
제 머리만 한 검은 돌을 들고 와 대뜸 솥에다 넣어 버렸다.
마나석이었다.
“이걸 왜?”
애초 저게 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지만, 토토가 방정맞게 껑충껑충 뛰며 말했다.
“부카 산촌이 너어 머그면 힝 난대!”
부카 삼촌?
“부카누수? 부울…코눈수?”
“불카누스?”
토토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발음이 서툴러서 그렇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현은 마나석을 뺄까 말까 고민하는데, 토토가 손뼉 치며 말했다.
“압빠, 압빠, 토토 부꼰노리 하쭈아라!”
그건 또 뭔가 싶었지만, 지금은 만사가 귀찮다. 오늘은 정말 밥만 먹고 나면 뻗어 잘 생각이었다.
도현은 대충 그래, 그래, 맞장구치며 솥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시간 가속 마법을 걸었다.
5시간이 7분 30초 만에 지나고, 솥을 열었다.
열대야까진 아니지만 미지근한 여름밤에 안개처럼 퍼지는 김을 따라 뒤섞인 잡내 제거 재료 향과 함께 고소한 고기 특유의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그렇게 많던 고기도 오랜 시간 끓여서인지 1/3 정도 양이 줄었지만 그래도 많았다.
“도련님, 어떻게 하실 검까요?”
얼굴을 불쑥 내밀며 모르달이 물었다.
몇 번이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모르달의 두 눈은 이미 고기 10인분은 뜯은 듯했지만, 참는 걸 보니 크로아 탕에 대한 기대가 엄청난 것 같았다.
“수육은 정리해 두고 곰탕은 좀 더 끓어야겠어.”
도현이 고기만 다시 대야에 옮겨 담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방에 가서 위생 봉지를 잔뜩 가져온 모르달이 그새를 못 참고 뜨끈한 고기 한 덩이를 입에 넣었다.
해괴한 비명을 지르며 씹는 박자에 맞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이삿짐 박스 크기만 한 봉지 20개가 만들어졌다.
물론 곧 먹을 고기를 제외한 양이었다.
도현은 다시 곰탕을 끓였다. 양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대야에 던 다음, 솥에 다시 물을 채우고 두 번째 곰탕을 끓였다.
곰탕이라는 건 이렇게 세 번을 우린 뒤 3개의 곰탕을 섞어 먹는 게 제일 좋단다.
‘요리와 마법은 정말 궁합이 잘 맞네.’
특히 국내 요리는 시간과 관련된 요리가 많았으니 더 그랬다.
그렇게 세 번째 곰탕 끓이기까지 30분이 더 걸렸다.
옥상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불판이 달린 테이블로, 고깃집에서나 볼 법한 물건이었다.
그 불판 위에는 곰탕을 육수로 한 크로아 탕이 전골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냄비 옆으로 뜨끈한 김을 뿜는 수육이, 함께 먹기 좋은 쌈 채소와 각종 반찬으로 8명은 앉을 테이블이 벌써 좁아터질 것만 같았다.
당연히 맥주와 소주도 각자 취향만큼 놓여 있었다.
토토와 모르달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크으으, 크로아 탕! 크로아 탕이라니이잇!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뿅 갈 것 같슴다욧!”
“끼아! 마싯는 낸새! 빠리, 아빠 빨! 리!”
아직 술 한 잔 마시지도 않은 녀석들이 취한 듯 흥분한 모습에 도현은 웃음이 났다.
그는 묵묵히 소스 제조에 들어갔다.
국 대접에 들깻가루를 수북이 넣고 초고추장을 주욱 짰다.
이 양념장이야말로 크로아 탕의 꽃이라 할 수 있다는데, 그냥 넘어갈 수 있나.
골고루 섞은 양념장을 다시 세 그릇에 분배하고 크로아 탕과 수육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솔솔 풍겨 오는 향에 암살자도 울고 갈 속도로 젓가락을 놀렸다.
먼저 두툼하게 썬 수육 한 점을 양념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말랑말랑하면서도 쫀득한 지방과 향으로 맡기만 했던 고소한 향이 씹을 때마다 입 안 가득 퍼졌다.
달짝지근한 것 같으면서도 그 뒷맛은 깔끔했다. 몇 번 씹지 않았는데 혀 위에서 얼음처럼 녹아 버린 고기는 삼켰다는 의식도 없이 그렇게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거 소고기 아냐?’
도현은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분명 두툼하게 썬 고기였다.
그런 고기가 순간 샤브샤브를 먹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고 고소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크로아 특유의 향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믿었을 거다.
푹 골 때 잡내를 잡으려고 썼던 재료들 때문인지 비린 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열 점을 더 먹은 후 겨우 멈춘 도현은 크로아 탕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반적인 숟가락은 감질나는 탓에 우동이나 일본식 라멘을 즐길 때 사용하는 스푼을 준비했다. 크기는 두 배로, 국자로 착각할 만한 비주얼이었다.
세숫대야 같은 대접에 던 탕을 한 스푼 떴다.
후루룩!
“으으음!”
진한 육수가 혀에 착착 감기며, 씹히는 고기는 씹을수록 담백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사이로 피어나는 크로아의 특유의 묘한 향이 입맛을 더 돋웠다.
그 매력에 이끌려 계속 들이켜고 보니 국자가 냄비 바닥을 긁고 있었다.
모르달과 토토의 눈에 불만이 서렸다.
도현은 입맛을 쩝 다셨다. 이제 시작인데 끊겨 버리니 흥이 식을까,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래도 그 전에 교통정리가 먼저였다.
‘일인 일 전골 해야겠는데.’
이렇게 되면 애써 준비한 불판 테이블이 무용지물이지만.
‘뭐, 즐겁게 먹으면 되지.’
맛있는 음식에 넉넉한 인심과 더불어 기분도 좋아져, 조금 부지런을 떨기로 했다.
곰탕을 끓였던 솥만 테이블 옆으로 가져왔다.
마법으로 끓게 만든 뒤, 전골을 빠르게 끓여 냈다.
‘식지 않게 시간 동결도 걸고.’
콧노래를 흥얼대며 전골냄비 크기의 대접을 가득 채워 두 펫 앞에 놓았다.
그제야 토토와 모르달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은 입 안의 크로아 수육처럼 풀어졌다.
도현은 다시 수육 다섯 점 위에 엄마표 묵은지 하나를 척척 올려 입에 넣었다.
와작와작!
시원하면서도 묵은지의 새콤달콤한 맛이 수육과 어우러졌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맛에 수육을 못 끊지.”
수육도 수육이지만 수육에 묵은지의 조합은 정말 사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즐기는 가운데, 복부 깊은 곳에서부터 뜨끈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졌다.
평소처럼 움직일 순 있지만 피로를 느껴 조금 무거웠던 몸은 숙면한 듯 개운해졌다.
“마나 회복?”
밑바닥 치던 힘이 발끝에서부터 쭉쭉 차올랐다.
이게 이렇게 금방 차오를 리…….
“아, 마나석.”
토토가 곰탕에 넣었던 그 마나석이 이렇게 빛을 발했다.
“끄오오옷! 힘이 넘쳐 남다욧! 캬아아아, 양양이 탕! 아니, 크로아 탕! 수육! 쥐이이익임다욧!”
“토토 더버! 더버! 꺄윽!”
토토와 모르달은 폭탄주를 원샷으로 마시고는 붉어진 얼굴로 주절주절 떨어 댔다.
너무 큰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은데…….
‘뭐… 문제없겠지.’
괜히 끓는 피를 이상한 데 쏟으면 난감한 건 도현이다.
국내 공식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도현이니, 어딜 가나 토토와 모르달이 자신의 테이밍 몬스터라는 것도 다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 걱정을 하던 도현은 픽 웃었다.
언제 그런 거 신경 쓰고 다녔다고.
‘정 안 되면 농장에 풀어놓으면 되지.’
거기서는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즐겁게 식사 시간을 보내던 도현은 뻗은 손에 잡혀야 할 쌈 채소가 없자 입맛을 다시고 일어났다.
모르달이 홍조 띤 얼굴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소인이 갔다 오겠슴다요.”
“아니, 먹고 있어.”
맛있는 음식 때문일까, 도현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넌 누구냐?”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는 한 사내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