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53. 큰 하마를 건들면……(3)
단검이라기에는 조금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 같은 검. 특이하게도 날과 손잡이가 전부인 이상한 검이었다.
용종이 다급하게 꼬리를 휘둘렀다. 거리가 벌어진다 싶더니, 도현이 한발 빨리 검을 휘둘렀다.
퍼억!
검이 아닌 몽둥이에서나 들을 법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 한 방으로 지면을 긁고 바위를 부수며 날아간 용종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검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사실 도현과 결착을 짓기 위해 마룡화를 서둘렀다. 그래서인지 힘도 온전하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용종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정신을 잃었던 하지현은 어째서인지 말끔하게 회복했고,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차도식도 말짱했다. 두 헌터 주변엔 갑자기 삼켰던 흰 덩어리와 붉은 털 원숭이가 있었다.
모르달의 신성력에 호되게 당했던 용종은 두 헌터에게 미련을 버렸다.
그저 별것 없다 생각했던 헌터 도현도 자신이 감히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었다.
‘워프를 탈출해 힘을 기르고 모든 각성자를 먹어 치운다!’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이대로 도망치기 위해 용종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때 용종 옆에 도현이 나타나 검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꽈광!
벼락이 떨어진 것만 같은 굉음이 울리며 땅에 떨어진 용종이 울컥 검은 피를 게워 냈다.
“고작 이 정도로? 생각보다 종잇장인데?”
쿵!
도현이 발을 구르자 바닥에 처박혔던 채근석의 몸이 허공에 떴다.
도현이 허공에 아무렇게나 검을 던졌다. 떨어져 나뒹굴 것 같았던 검은 소리 없이 사라졌고, 도현은 꾹 말아 쥔 주먹을 용종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버벅!
타이어를 야구 배트로 치듯 찰진 소리가 수십 배속으로 돌린 듯 몰아치며 공기를 찢었다.
한 방, 한 방에 담긴 심상치 않은 힘에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용종은 1분도 참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렸다.
털썩.
도현은 용종이 기절하자 주먹질을 멈췄다.
“꼴에 용이란 놈이 이렇게 맷집이 약해서야.”
‘두드리는 맛이 없잖아.’라고 중얼거리며 그가 놈의 꼬리를 잡고 당겼을 때.
뚜욱!
번쩍 눈을 뜬 용종이 다짜고짜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워프 입구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던 도현은 손에 들린 꼬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저 멀리 점이 되어 버린 용종을 향해 몸을 날렸다.
키에, 키에엑―!
“하… 이젠 도망을 가?”
불쑥 나타남과 동시에 머리를 쓸어 올린 도현은 놈의 옆구리를 힘껏 차 버렸다.
빠아아아악!
척추가 꺾이듯 굴곡이 지며 총알처럼 날아간 놈은 워프 안쪽, 부글부글 끓어 대는 활화산 3개를 뚫고 바위로 가득한 절벽에 못처럼 박혔다.
다시 나타난 도현이 무심하게 용종의 얼굴에 주먹을 꽂으려고 할 때였다.
우드득, 뼈 소리가 나며 짐승의 주둥이가 사라지고 비늘이 떨어졌다.
그곳엔 익숙한 사람의 살결이 드러났다. 잔뜩 얻어터져 피멍이 든 채근석의 얼굴이었다.
“도, 도현아. 잠깐……! 나, 나다! 네 친우, 채근석이라고!”
“개소리 작작 해라.”
도현은 망설임 없이 멈췄던 주먹을 내리꽂았다.
꽈아아앙!
***
요란한 소리가 울릴 때면 땅이 뒤흔들리고 산이 터져 나가는 광경을 넋을 잃고 보던 차도식과 하지현은 다시 불쑥 나타난 도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싸, 싸가지, 괜찮아……?”
“처남님, 무사하십니까?!”
손에 쥔 도마뱀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모르달을 칭찬했다.
“잘했네.”
“후후후, 소인이 좀 함다요. 그런데 저건 왜 살려 왔슴까요? 재활용도 못 함다요.”
모르달이 불쾌하다는 듯 코를 막으며 고개를 흔들자 모르달 머리에 앉은 토토도 주먹 쥔 팔을 붕붕 휘둘렀다.
“머그면 안 대! 불, 냥, 싯, 뿜!”
도현은 그런 토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말했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두 펫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도현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오제아.]
목소리가 출렁이는 파도처럼 도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뒤섞이는 워프 속 세상이 잠깐 멈췄다고 느꼈을 때.
찌―잉!
귀를 찌르는 이명과 함께 거대한 마나가 몰려오면서 땅 위에 새카만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부르셨나요, 주인님?”
백색의 티아라 형태의 뿔과 은색으로 빛나는 긴 생머리에는 어둠이 반갑게 춤추듯 일렁였다.
하루 만의 재회였다.
차도식과 하지현은 당황한 눈으로 두 사람을 봤다.
도현과 그 앞에 책 한 권을 든 채 다소곳이 선 여자.
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그냥 봤다면 아이돌이 헌터를 겸업으로 워프에 들어온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막 나타났을 때.
워프가 뒤집힐 정도로 폭사하는 소름 끼치는 힘에 차도식과 하지현은 끝이라 생각했다.
여태 다녀온 모든 워프를 통틀어도 저런 힘을 가진 몬스터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이번만큼은 도현도 막아 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말하지 않아도 시선을 주고받은 둘은 대검을 소환하고 수인을 맺으려 했다.
그때,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한 여인이 도현에게 나긋나긋한 인사를 올리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사고가 멈춰 버렸다.
도현은 감격한 오제아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하루 만에 보는 건데 왜 저러지?
‘아…….’
도현은 지구에 돌아오고 잠시 잊은 시간 축이 떠올랐다.
지구와 제브라드는 100배의 시간 차가 존재했다.
즉, 도현에게는 하루지만 그녀는 100일이라는 말.
얼굴만 봐도 다시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는 티가 적나라하게 났다.
뭐… 이해는 되는데.
우선은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다.
도현은 바닥에서 널브러져 부르르 떨어 대는 용종을 향해 턱짓했다.
화사하게 웃던 오제아가 도현의 시선을 따라 도마뱀을 보자,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어 버렸다.
살기까지 피우는 모습이 치워 버리고 싶은데 도현이 있어 참고 있는 듯했다.
오제아가 입을 뗐다.
“주인님, 저 쓰레기는 무엇인가요? 용종? 아니, 용종이란 이름도 아까운데, 같잖게도 마기를 품고 있다니.”
“신이 지구에 한 장난질.”
그녀의 말을 되씹은 도현은 일말의 기대를 지웠다. 어디에도 인간이란 단어는 없었으니까.
오제아는 그런 도현의 속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마룡이 격을 갖춰 신이 되었나 보군요.”
‘마룡? 격? 신?’
“하…….”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더러워진 도현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아해하는 오제아에게 물었다.
“저걸로 신 놈의 면상을 볼 수 있을까?”
도현이 용종을 살려 둔 이유였다.
오제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마신이 거부할 수 있어요.”
그래, 신이란 종족 특수 스킬이 있었지.
제브라드에서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해 했던 헛짓거리가 떠오르자 짜증이 밀려왔다.
아무튼.
“그렇다면 이놈은 버리는 패인가?”
오제아는 고개를 저었다.
“생물에게 내려진 신의 축복. 이는 생물이 숨을 거두기 전까지 회수할 수 없습니다.”
좋은 정보지만 지금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다.
도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결국, 그 방법을 써야 하나…….”
“네?”
내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신과 신의 대리라는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힘, 언어.
도현이라고 못 할 건 없었다.
단지 신의 힘을 찍어 누를,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할 뿐이었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이렇게 대놓고 엿 먹이는데 제대로 갚아 줘야지 않겠나.
‘거기다 지구에 관여한 신이 한두 놈도 아닌 것 같고.’
이럴 때라도 출혈 서비스 좀 해 줘야지.
더군다나 마기를 가장 잘 아는 오제아도 있지 않은가.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오제아에게 물었다.
“마법진 좀 그려?”
“네, 주인님. 제 특기예요.”
“그럼, 목줄 채울 만한 거 없을까? 워프 밖으로 뛰쳐나가면 곤란하니까.”
오제아의 눈이 반짝였다.
‘주인님이 처음으로 나에게 일을 주시다니!’
그것도 명령이 아닌 부탁이다.
‘꺄아아아!’
기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녀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늘 자신의 힘에 자신감 넘치는 그녀였기에 이참에 각성한 힘까지 모두 보여 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있죠! 제가 온 힘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주인님!”
엄청나게 활기찬 모습에 그저 오랜만에 불러서 그런 거라 넘기며 모르달에게 말했다.
“가장 강력한 방어막 준비해.”
“방어막… 말임까요?”
“그래. 신성력으로.”
뭔가 질려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으니 상관없었다.
이어서 오제아에게 말했다.
“시작하자.”
***
차도식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하지현에게 토토를 맡긴 모르달은 다급하게 힘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힘을 끌어 올리는 모습에 왜 이렇게 불안해질까…….
‘대체 무슨 일을……?’
신이란 말이 오갔다.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 같은데,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궁금함보다 불안으로 가슴이 뛰었다.
아니, 두려움이었다. 원초적인 본능에서부터 느껴지는 두려움 말이다.
-이, 이건……!
음산한 목소리가 차도식의 귀를 파고들었다.
도현이 나타나고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심장’의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미친놈이 이젠 무슨 짓을 하려고!
골을 울려 대는 목소리에 차도식은 얼굴을 찡그렸다.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뭐라도 아는 게 있어?’
-……모른다. 하지만 예상은 가는군. 윗놈을 끌어 내리려는 짓이겠지. 크큭, 역시 미친놈이야.
‘뭘… 끌어 내려?’
-말 그대로다. 용종 한 마리로 이 세계를 분탕질하려다 미친놈한테 걸린 거지. 크크큭, 분명 미친놈을 모르는 놈일 거다.
차도식은 대검 ‘심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끌어 내린다는 게 무슨 말인데?’
-신. 용종이란 씨앗을 뿌린 마신 말이다.
“뭐……?”
“오빠……?”
“끼잇?”
멍청하게 되묻고 보니 옆에 있던 하지현과 토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헛기침하며 아니라고 잡아뗀 차도식이 소름 돋은 팔을 쓸며 다시 물어보려 할 때였다.
모르달이 짧은 양손을 하늘로 펼쳤다.
“끼요오오옷!”
이상한 소리와 함께 돔 형태의 방어막이 두 헌터와 두 펫을 덮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따뜻한 마나가 몸을 감싼다. 눈앞에 투명한 은빛이 물이 흐르듯 반짝이는 게,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 착각이 일었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방어막.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 사이로 오제아가 용종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에 살아 움직이던 어둠이 흘러내리며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3쌍의 날개.
차도식은 그 날개를 보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사정없이 콱 꼬집었다.
“허억!”
머리를 치고 울리는 고통과 함께 자신을 삼키던 어둠이 흩어지는 걸 보며 숨을 들이켰다.
“지현아!”
놀란 차도식이 옆에 쓰러진 하지현을 살폈다. 기절한 듯 눈을 감은 그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는 토토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혼이 빨려들 것만 같은 새카만 날개에 차도식은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했다.
그들이 어떤 상황을 겪었든 상관없는 오제아는 용종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덜컥 겁이 난 용종의 몸이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듯 꿈틀댔다.
“놔… 놔아……!”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온몸으로 거부했지만, 용종 아래, 지면에는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지면을 물들였다.
촤르륵, 촤르륵!
마법진에서 가느다란 검은 사슬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용종의 몸을 구속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