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 큰 하마를 건들면……(2)
눈을 감은 차도식은 자신이 허공에 떠 있는 걸 느꼈다.
‘이게… 어떻게……?’
마치 물 위를 표류하듯 둥둥 뜬 몸은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워프의 새카만 하늘 위를 정말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몸을 일으킨 그는 발아래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거기에는 온몸을 던져 도현을 공격하는 채근석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저 싸움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볼 순 있지만, 소리가 안 들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피커를 끈 채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
‘처남님…….’
당장에라도 저 싸움에 끼어들어 도와드리고 싶었다.
차도식은 습관처럼 대검을 소환했지만, 대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의아함에 손등을 쓸다 멈칫했다.
반투명하게 비치는 손과 그런 손등에는 익숙해진 붉은 보석이 없었다.
차도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렸을 때 TV에서 봤던 유령과도 같은 모습인 자신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저 저 싸움을 지켜만 봐야 하는 이 상황이 정말 엿 같았다.
‘그러고 보니 대검 목소리도 들리지 않구나.’
쓴웃음을 짓던 그는 한편으로 홀가분했다.
채근석이 팀원을 죽였을 때부터 떠들기 시작한 대검은 몇 시간째 계약을 종용했다.
미친 듯이 자신의 성질을 돋웠지만, 역설적이게도 처남님이 오실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시해도, 무슨 말을 해도 멈추지 않던 목소리가 처남님이 나타남과 동시에 뚝 그쳤다.
‘처남님 때문인가……?’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나타난 것만으로 침묵하는 걸까.
그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씹었다.
‘차도식. 넌 한참이나 멀었다.’
처남님, 아니 도현 님을 위해 강해지자고 다짐했다. 그분께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울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2급이 되고 강해졌다 자신했다.
유일한 1급 헌터 노아이선이 행방불명된 이후, 공식 헌터 1위로 불렸지만 그뿐이었다.
곧 2주기를 맞을 3등급 워프도 제 손으로 파괴하지 못했고, 처리하고자 했던 채근석은 버젓이 살아 그분을 공격하고 있으니.
‘조금 강해졌다고 자만하다니. 여전히 관종 새끼구나, 차도식!’
차도식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검을 받은 그때부터 오로지 수련에 힘썼다.
밥 먹듯 워프를 돌아야 하는 상황에도, 잠깐의 휴식으로 일상을 보낼 때도. 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 가며 한계치까지 몰아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했다.
너무 부족했다.
그런 차에 기회가 왔다.
크로아의 바위산 워프.
거기다 문제가 많은 헌터 채근석까지.
두 가지의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 했던 자신의 욕심에 결국 아내인 하지현을 다치게 했다.
‘모든 걸 알게 되면 내 옆에 있어 줄까……?’
욕심 때문에 제 목숨만큼 소중히 해야 할 아내를 위험하게 만들다니.
최악이다.
‘헌터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실격이지…….’
입에 조소가 그려졌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해서 안 되는데.’
허탈했다. 이러고자 그렇게 악착같이 수련한 게 아니다.
그리고 수련만큼 아내에게 미안했다. 잘해 주지 못해서. 그렇게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는데…….
오만 감정이 뒤섞인 차도식의 시선이 싸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을 향했다.
거기에는 정신을 잃은 자신의 아내와 그런 아내의 손을 잡고 쓰러진 자신의 몸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물을 털며 걸어오는 모르달이 보였다.
***
모르달은 신성력으로 만든 성수에 몸을 씻고 후다닥 달려왔다.
분명 몬스터에게 씹혔다 뱉어졌을 때만 해도 차도식은 펄쩍펄쩍 뛰고 있었는데,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 도령? 잠니까요?”
툭툭 쳐도 반응 없는 차도식에게 다가간 모르달은 숨은 쉬고 있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이어서 하지현을 본 모르달의 눈이 커졌다.
“아이고야! 이거 마기 아님까요?! 아씨, 정신 차리심쇼오옷!”
그제야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기절한 것을 깨달은 모르달이 호들갑을 떨었다.
차도식은 체력과 마나가 심각하게 고갈되어 탈진한 상태이지만, 하지현은 정말 심각했다.
특히 옆구리의 큰 상처. 마기로 인해 썩어 들어가며 독이 몸 전체로 퍼지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도련님도 난감하시겠슴다요.”
모르달은 기절한 차도식을 짧은 발로 퍽퍽 차며 울분을 토했다.
“대체 뭘 한 검까요! 아씨가 왜 이렇게 된 검니까욧! 반려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왜 이렇게 약해 빠진 검니까욧!”
화풀이를 끝낸 모르달은 짧은 앞발로 하지현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무식하다면 무식할 수 있지만, 차도식이 들이부은 수십 병의 포션 때문에 다행히 마기는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 마기만 몰아낸다면 금방 치유될 정도였다.
“아씨, 조금만 참으심쑈!”
모르달의 몸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앞으로 뻗은 양 앞발을 타고 은빛 신성력이 하지현을 감쌌다.
후우우웅!
하지현의 몸이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터진 상처에서 새까만 물이 흘러내림과 동시에 불타올라 사라지며, 덧났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갔다.
시체 같았던 얼굴도 복숭앗빛으로 혈색이 돌았다.
그녀의 몸이 다시 땅에 내려앉자,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느리게 눈을 떴다.
“아…….”
마침 모르달의 특제 힐 한 방으로 벌떡 일어난 차도식이 다짜고짜 하지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지현아!”
“오빠……? 모르달?”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인지하는 그녀에게 차도식이 다급하게 질문을 쏟아 냈다.
“괜찮니?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응… 몸이 너무 개운해.”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차도식 뒤로 모르달이 가슴을 부풀렸다.
“이제 괜찮을 검다요, 이게 다 제브라드 님의 은총임다! 엣헴!”
다른 차원에서 첫 포교 활동이었지만, 두 헌터는 모르달을 넘어 채근석과 전투 중인 도현을 보고 있었다.
역시 그의 곁엔 평범이란 단어는 찾기 힘들었다.
***
도현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앞을 봤다.
쾅! 콰광! 콰과과광!
가시가 무수히 박힌 꼬리와 두 주먹으로 쉼 없이 보호막을 치는 채근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왜! 왜! 깨지질 않아?!”
워프를 뒤흔드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공기가 파르르 떨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보호막 안의 도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지겨웠다.
차라리 쥐어 팰까 고민도 했지만, 친구였던 놈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의문이 먼저 떠올랐다.
‘어떻게 저 힘을 사용하는 거지?’
도현이 제일 궁금한 것은 채근석의 힘이었다.
마룡화라고 하는 힘.
주변에 죽은 헌터만 봐도 어떻게 힘을 각성한 건지는 알 만했다.
그런 힘을 일개의 인간이 사용한다?
애초, 각성으로 가질 수 있는 거긴 한가?
비슷한 상황을 생각해 보던 도현은 강혁을 떠올렸다.
‘삼촌의 금수화 같은 게 아니야.’
저건 종족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형태.
거기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이 사이에 낀 음식 찌꺼기만큼 무척이나 찝찝했다.
마치 누군가 던져 준 것 같달까.
‘던져 줘?’
좀 더 생각하던 도현은 보호막을 두드리던 공격이 끊기자 고개를 들었다.
“……?”
주변은 흙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사람 형체가 있었지만, 살랑거리는 꼬리나 크기. 골격의 형태는 몬스터에 가까웠다.
몬스터…….
오직 힘만 위해 인간이길 포기한 자의 완성된 모습.
그래서일까, 그 어떤 몬스터보다 더 위험했다.
‘헌터로 치자면 1급쯤?’
강한 것도 그렇지만, 어쨌건 저건 몬스터임과 동시에 인간이었으니까.
현실과 워프를 드나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어?”
그때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워프, 헌터, 각성…….
이 모든 시초이자 시발점인.
신(神).
대격변. 제브라드와 다른 신들의 합작이라고 추측했던 때가 있었다.
‘절대 좋은 뜻으로 모였을 리 없지.’
그렇다면 그 신들이 할 짓은?
“……!”
도현은 얼굴을 굳혔다.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은 시야에는 검은 비늘이 덮인 도마뱀이 서 있었다.
희열에 찬 채근석이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마룡화다!”
크아아아아앙!
주변 일대가 채근석이 지르는 괴성에 땅이 쩍쩍 갈라지고 공기가 터져 나갔다.
멀리서 지켜보던 차도식과 하지현, 두 펫이 난데없는 강풍에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채근석이 싯누런 눈으로 도현을 직시했다.
크르르르!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독사처럼 꼿꼿하게 선 꼬리가 검은 독을 뚝뚝 흘리며 날아왔다.
동시에 도현의 어깨에 앉은 토토가 튀어 나가려 하자 그는 토토를 냅다 뒤로 던졌다.
‘쿠에엑!’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모르달에게 잘 전달된 듯했다.
도현은 무심하게 눈앞의 몬스터를 바라봤다.
문득 예전 추억이 떠올랐다.
제브라드에 떨어지기 전, 친우 세 놈과 함께였던 그때. 도현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 친우 중엔 당연히 채근석도 있었다.
늘 제멋대로여서 함께 어울리는 자신을 걱정하는 소리가 많은 녀석.
그래도 선은 아는 녀석이었다.
그래서였다.
501년 하고도 6개월 만에 만난 채근석이 자신을 깔보고 빈정거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건…….
도현의 입에서 탄식처럼 한숨이 흘렀다.
깊고 씁쓸한 맛에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보게 되었다.
새카만, 죽은피처럼 퍼진 구름이 소용돌이치다 휩쓸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꼭 자신의 마음 같았다.
“후회하나? 어쩌지, 이미 늦었는데.”
몬스터가 된 채근석이 켈켈 웃었다.
[용종]
채근석의 머리 위로 뜬 이름.
모습에도, 목소리에도, 그가 그리워했던 친우는 이제 없었다.
도현은 입을 열었다.
“내 친우, 채근석은 자신을 희생해 워프를 파괴했다.”
덤덤한 저음.
오히려 그래서 공허하고 슬프게 들렸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차도식과 하지현은 어째서인지 또렷하게 들리는 도현의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현을 덮었던 방어막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는 가볍게 한 발 내디뎠다.
반 박자 늦게 알아차린 채근석, 아니 용종이 길어진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크아아아아!”
화염 방사기처럼 거대한 브레스를 토했다.
도현은 자신을 덮쳐 오는 화염을 쟀다. 적어도 5m는 될 것 같은 크기.
순식간에 코앞까지 몰려온 브레스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마룡화라더니 뱀보다도 못하네.”
“우도혀어어어언!”
용종이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도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콰직, 콰작! 쾅! 쾅!
헌터 경력이 헛되지 않은 건지 매섭게 내지르는 주먹과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돋아난 지 몇 시간 안 됐을 꼬리도 본래 제 몸의 일부인 양 휘두르는 모습에, 왜 차도식이 몰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용종의 공격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모든 게 도현에게 닿지 않아서다.
콰악!
도현의 얼굴에 꽂히려던 주먹이 도현의 왼손에 틀어막혀 부르르 떨었다.
당황한 채근석이 주먹을 빼내기 위해 늑골을 향해 다리를 날렸지만 도현은 몸을 살짝 트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 버렸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몸부림만 쳐 대는 용종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도현이 손을 끌어당겨 용종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내 친우의 몸을 제물로 태어난 신의 노예야, 죗값은 치러야지?”
도현의 눈이 진지해졌다. 오른손을 허공에 뻗음과 동시에 그가 사라졌다.
“……!”
순식간에 채근석의 등 뒤에서 나타난 도현은 언제 꺼내 들었는지 모를 검을 쥐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