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 꼬인다 (2)
제브라드에서는 계급이라는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그걸 무시할 수 있는 건 힘을 가지는 것뿐.
‘하지만 어쭙잖다면 그것도 사장이지.’
지구도 비슷했다. 자본주의 세상이 되고서 돈이 곧 권력이라는, 모두가 입 밖으로 떠벌리지 않지만 유치원생만 되어도 부모의 직업과 재산으로 배틀이 시작 되었다.
그런 지구에서 모든 걸 무시할 수 있는 카드는 바로 헌터증이었다.
헛웃음을 흘리던 도현은 딜러가 굽실거리며 건네는 카드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우 헌터님, 차는 두 시간 안으로 계약서에 기재하신 주소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말하지도 않았는데, 도현을 따라 매장 내 모든 직원이 나서서 인사를 하며 배웅해 줬다.
도현은 고개를 까딱이고 매장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근처에 마트가 있던 걸 확인했었는데.
마트 가는 길에 차 매장이 보이지 않아 집에서 거리가 꽤 멀어진 상태였다.
지상에 내려오기 전에 마트가 있던 걸 확인했는데 막상 지상에 내려오니 방향을 알아보기 힘들다.
‘길치, 방향치는 어쩔 수 없나?’
다시 한번 차의 필요성을 느낀 도현은 어쩔 수 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위에서 보면 마트가 어딘지 알 수 있을 거다.
“마… 말도 안 돼…….”
아바는 입을 가린 채 숨죽여 경악했다.
3급 헌터.
같은 급으로 알려진 헌터라고는 차도식과 하지현밖에 없다.
아니, 차도식 헌터는 2급이 됐으니 공식 3급은 하지현이 다였다.
그런데 방금 봤던 헌터가 3급 헌터증을 소지하고 있었단다.
비밀리에 알려진 새로운 3급 헌터.
“그런 헌터를 이런 길에서 마주쳤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사람이니 돌아다닐 수는 있는 거지만 저런 차림으로 롤스로이스 매장을 드나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 어디 간 거지?”
너무 놀란 나머지 매장을 나온 사내를 쫓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얼굴을 기억했다는 거다.
정식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헌터라면 한 번쯤은 협회에 들르겠지.
워프 입장 때문이기도 했고, 헌터라면 협회의 뷔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친목 도모, 정보 교류, 그리고 헌터에게는 협회 모든 시설이 무료다.
“협회에서 죽치다 보면 오겠지.”
어쨌든 오늘은 쉬는 날이다.
일은 내일로 기약하며 아바는 휴대폰으로 마트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
아바는 지금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있는 건데?!’
첫 만남은 자동차 매장이었다. 두 번째는 마트였고, 지금은…….
마트에서 미행 아닌 미행을 했고, 계산 후 또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점심을 훌쩍 넘겨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조차 없었기에 포기하고 발 가는 대로 가게에 들어와 꼬리곰탕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꼬리곰탕이 나오자마자 그가 가게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후줄근하게 낡은 옷을 입은 사내.
얼굴과 몸은 새카맣게 탔지만, 이목구비는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게 잘생겼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마나를 측정해 보려던 몸을 멈췄다. 유령 같은 ‘그’ 때문이었다.
“하아…….”
포기하려 하면 계속 기회가 왔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대로 접근했다간 백 퍼센트 들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벌써 들켰을지도…….
‘어떡하지?’
몸은 기계처럼 꼬리곰탕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씹기 바쁜 자신을 깨닫고 아바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분노에 이를 갈았다.
그녀의 입에서 격양된 영어가 튀어나왔다.
“아씨, 몰라! 오늘은 쉴 거야, 쉴 거라고!”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순식간에 숟가락이 손자국 형태로 우그러졌다.
“앗!”
화들짝 놀란 그녀가 손을 펼쳤지만, 식탁 위에 떨어진 숟가락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으잉? 수, 숟가락! 아가씨… 외국인이잖아? 익스큐즈미? 스푼, 머니! 많……! 아휴, 답답해!”
홀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못마땅한 얼굴로 가슴을 쳤다.
그녀는 그제야 가게 안의 시선이 전부 자신을 향했다는 걸 깨달았다.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배상할게요.”
유창한 한국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아주머니는 잠깐 놀라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데 외국인인데 한국말 정말 잘하네? 예의도 알고. 호호, 맛있게 먹고 가요.”
‘아…….’
아바는 입술을 씹었다.
당황한 나머지 한국어로 대답해 버렸기 때문이다.
협회에서는 그녀가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모른다. 그래야 모두가 긴장을 풀고 떠들어 댈 것이고, 그 대화 속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실제 며칠 전에도 워프가 파괴되었다는 지라시(Tabloid)도 듣지 않았나.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우그러진 숟가락을 들어 집게손가락으로 손잡이를 쭉 훑었다.
우그러진 숟가락의 손잡이가 매끈해졌다.
숟가락을 다시 쥐고 꼬리곰탕을 뒤적거렸다.
분명 새로운 음식이고 맛도 있는데, 신경은 온통 유령 같은 그와 함께 온 사내에게 꽂혀 있었다.
***
도현은 오랜만에 즐거웠다.
마트를 나와서 근처의 제일 큰 요리 학원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나오는 민혁이를 만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주머니께 들러 떡볶이를 먹으려고 했더니.
어째, 오늘따라 뭔가 착착 맞아떨어진다.
‘아, 이러다 사고가 나중에 몰아치는 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감을 느꼈지만 마음 한쪽 구석으로 치워 버리고 민혁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요리사가 되고 싶어서 요리 학원에 왔다는 거야?”
“어. 맛있는 거 좋아하니까. 만들어 먹는 것도 재밌더라고.”
“하하, 현아 너 진짜 뜬금없다. 아니지,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허락하신 거야?”
허를 찌르는 말에 도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민혁은 배를 잡고 넘어갔다.
“너 나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와, 천하의 우도현이 요리라니. 진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도현은 자신의 이야기에 무방비해진 친구를 보며 웃었다. 그러나 속은 좋지 못했다.
벌써 26살이 된 친구. 중학생 때부터 봐 온 놈이라지만 갑자기 성숙해져 버리더니 잘났다는 얼굴도 고생으로 네, 다섯 살은 많아 보였다.
반대로 자신은 행방불명됐을 때 그 모습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단지 큰 덩치와 심드렁한 표정 때문에 건들지 못할 뿐이다.
게다가 늘 입는 옷들이 집에서 노는 백수 같았기에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예외라면 여학생들이 잘생긴 백수라고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도현이 먼저 피해 다녔다.
아무튼.
“넌 아주머니 도와드리려고 등록한 거야?”
“어… 어. 근데 이거 비밀이야. 한식 자격증이라도 따야 엄마가 불안해하지 않지. 근데, 현아. 요리가 왜 그렇게 어렵냐? 차라리 200킬로그램짜리 모래를 하루 종일 나르는 게 더 낫겠더라.”
고개를 짤짤 흔드는 민혁을 보니 도현은 기가 찼다.
“너 공부 잘했잖아?”
“공부 잘한다고 칼질 잘하냐? 그리고 난 문과라고. 요리에 수학이 필요할 줄은… 하, 누가 알려 줬어야지.”
정말 억울했나 보다.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칼 쥐는 것도, 칼질의 종류도, 재료마다 다루는 방법도, 일일이 외우고 복습한다고 수업을 쫓아가는 것도 빠듯하다고.
도현은 하소연하는 친구를 빤히 바라보다 말을 툭 던졌다.
“너 연예인 해라.”
“멸치 똥 따는 것… 어? 연예인? 푸크크큭, 왜 네가 스폰이라도 해 주려고?”
“어.”
“됐다, 됐어. 내가 잘생겼던 것도 다 10대 때 말이지, 지금 보면 알잖아. 많이 쳐줘 봤자 제 나이로 보이는 거. 그런데 연예인? 차라리 헌터가 더 가능성 있겠다.”
“그럼 헌터도 하던가. 헌터 연예인 좋네.”
도현이 계속 반장난식으로 대답하자 민혁이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우도현. 너도 재벌 2세 놀이에 빠졌냐? 미안하지만 난 거기 놀아 줄 생각 없다.”
그렇게 말하곤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좋아하는 꼬리곰탕에 시선도 주지 않을 만큼,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뒤로 돌아 빠져나가려는 민혁이의 등을 보고 도현이 말했다.
“근석이 만났다.”
“…….”
“그놈 잘나가는 헌터더라. 팀도 꾸려서 출장도 가고. 그런데 많이 변했던데― 뭐 변했다기보단 본래 성격이 나왔다고 해야 되나.”
“그놈 얘기는 왜 하는데?”
김민혁이 고개만 돌려 물었다.
도현은 씨익 웃으며 테이블을 노크하듯 톡톡 두드렸다.
투명한 막이 도현이 앉은 테이블을 감쌌다. 소리도, 모습도 차단하며 왜곡시켜 버리는 사일런트 팬텀이란 마법이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외국인 여자 때문이기도 했고, 건네줄 것도 있었다.
“김민혁, 너 생각나서.”
“너 지금 나 놀려?”
“야, 김민혁. 언제까지 삐딱하게 볼 건데. 친구 잘되라고 밀어주는 난 안 보여?”
“내가 아는 우도현이란 놈은 호구 아니거든. 오지랖의 ‘오’ 자도 모르는 놈이고.”
정답이었다.
괜히 기분 나쁜 도현은 투덜거렸다.
“거참 친구란 놈이 뼈를 때리네.”
그러면서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반지 케이스 크기만 한 상자를 꺼내 김민혁 앞으로 밀었다.
“뭔데?”
“친구를 친구로 안 보는 놈이 처음으로 친구 노릇 해 보려고.”
“뒤끝 있는 건 우도현이 맞는데.”
“믿든 안 믿든, 자기 전에 먹고 자라. 먹고 가슴 벌렁거리면 전화하고.”
“……고맙다.”
도현을 한참 쳐다보던 김민혁이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 때였다.
테이블 옆, 지나다니는 통로에서 뭔가 불쑥 튀어나왔다.
“압빠! 큰일 낫쏘!”
“도련님, 큰일 났슴다! 큰일욧!”
토토와 모르달이 다급하게 도현에게 달라붙었다.
자유 시간이 끝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뭐가.”
마침 토토가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징징 울려 댄다.
“압빠, 저나! 저나아아!”
미심쩍은 얼굴로 휴대폰을 받아 확인하니 강혁 삼촌이다.
뭔가 불길한데.
“여보세요?”
(조카야!)
다급한 강혁 삼촌의 목소리에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요?”
곧바로 강혁 삼촌이 목을 쥐어짰다.
(도식이랑 지현이가 워프에 갇혔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어……?”
갇혔다?
‘일부러 무기까지 줬는데?’
그렇게 높은 등급의 워프가 있었던가?
애초 워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던 도현은 습기 가득한 목소리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거기가 어딘데?”
(3등급 워프, 2주기다. 그런데 워프가 이상해졌어. 변이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접근도 할 수 없어.)
침착하게 말했지만, 횡설수설한 게 느껴졌다. 도현은 위치가 어디인지 듣고서 전화를 끊었다.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김민혁이 말했다.
“바쁜 거 같은데 먼저 가 봐.”
당황스럽고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담담하게 말하는 친구를 보며 심각했던 도현이 싱겁게 웃었다.
“그래, 고맙다.”
김민혁도 따라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주던가.”
“어, 맛있는 거 해 줄게.”
“오냐, 가 봐, 바쁘잖아.”
“어.”
도현이 일어났다. 테이블에 걸어 둔 마법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데 뒤에서 김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조심해라.”
“어. 걱정 마. 보기보다 이 형님이 세거든. 아무튼, 갔다 와서 보자.”
김민혁은 자신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계산을 끝내고 나가는 도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 몸을 바로 했다.
자신 앞에 놓인 꼬리곰탕.
밥알은 퉁퉁 불어 있었고 그 사이로 고깃덩어리가 섬처럼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슥슥.
고기 한 토막과 밥을 떠 입에 넣었다.
곰탕 특유의 진하고 깔끔한 맛이 밥알과 씹히며 고소했다.
식었다고 생각했던 곰탕은 딱 먹기 좋은 온도였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잘 익은 깍두기를 크게 한입 베었다.
아삭아삭!
새콤한 깍두기가 톡 쏘는 맛과 함께 버물어진 양념이 입 안의 밥알과 함께 섞여 씹혔다.
맛있다.
미소 짓는 김민혁을 아바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