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48화 (48/200)

# 48

48. 꼬인다 (1)

덩치에 안 맞게 순박한 얼굴을 한 채근석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이쿠야, 조금 늦었습니다. 차 헌터님, 하 헌터님, 잘 지내셨습니까?! 허헐~ 하 헌터님 너무 예뻐지신 거 아니십니까? 이거 참, 출장 때문에 결혼식 못 간 게 너무 아쉽네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못 보다니! 크으윽!”

너스레를 떨며 인사하는 모습에 하지현은 미소 지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차도식만이 입을 일자로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식이 말했다.

“10분 뒤에 브리핑에 들어갑니다.”

“예, 차 헌터님.”

오늘의 목표는 크로아의 바위산 워프를 파괴하는 것.

3등급 워프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치했던 것을 차도식이 2등급으로 오르고 곧바로 추진되었다.

그게 2주기와 맞물리게 되면서 유명한 헌터 회사의 3등급에 근접한 4등급 헌터 한 팀을 모집했다.

모두 내뺐지만, 딱 한 팀. 채근석이 휴가 기간이라며 흔쾌히 지원했지만…….

‘뒤가 구린 놈.’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같이 행동하는 채근석의 본모습을 들은 차도식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다른 헌터들은 몰라도 블랙홀에서 스타트를 함께 끊었던 차도식과 하지현은 주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저 심증밖에 없었지만.

플래티넘 헌터라는 회사 자체가 출장도 잦고 험한 워프를 관리하기 때문에 사건, 사고가 잦다.

그게 정말 액면가대로라면 말이다.

‘이를 드러내진 않겠지만.’

주 팀장에게 듣기로 격차가 너무 심할 경우 절대 이를 드러내지 않는단다.

‘두고 보면 알겠지.’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맣게 몰려오는 구름이, 비라도 시원하게 한바탕 오려는 듯했다.

***

“흐아아암!”

도현은 반쯤 감긴 눈으로 잉여로움을 만끽했다.

어젯밤, 햇병아리들이 다녀가고 무척이나 평화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2주기에 들어선 워프에 밥 먹듯 돌아다녀도 몸이 모자랄 시간이었지만, 어째선지 헌터 협회에서 연락 한 통 없었다.

3급 헌터라는 걸 한동안 숨긴다더니 그 때문인 걸까?

‘뭐 이러든 저러든 가만히 둔다면 나야 좋지.’

리포트 위크가 이번 주로 끝나고, 다음 주에 뒤풀이나 하자며 연락이 오긴 했지만 아직 시간이 꽤 남은 편.

그 누구도 터치 안 하는 공식적인 휴일인 셈이다.

“하아, 좋다.”

살짝 몽롱하면서도 깨어 있는 의식 사이로 배 위에서 끽끽대는 토토를 보고 있으니 밀려오려던 지루함도 금세 사라졌다.

‘휴대폰으로 틀어 준 월드튜브 먹방이 그렇게 좋은가.’

심심하다는 녀석을 위해 틀어 준 게 벌써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단지, 좀 신경 쓰이는 건 열심히 공부 중인 모르달이랄까.

모르달은 얼굴을 파묻었던 책을 테이블에 내려 두며 감탄을 내뱉었다.

“캬아― 닭요리가 이렇게 심오할 줄은 몰랐슴다요. 치킨, 그 신성한 이름만 알았을 뿐, 사촌인 오븐 구이, 숯불 구이라든가 사돈에 팔촌으로 찜에 탕까지 있다니!”

‘저런 헛소리나 해 대니…….’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시피를 많이 보긴 했지만, 유독 닭 요리를 파고드는 이유는, 어제 제브라드가 가게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 이유였다.

“가게에서는 제브라드 님을 계속 뵐 수 있는 검까요?!”

별생각 없는 물음이었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모르달은 ‘지구의 음식을 대접해 드리겠다’며 레시피를 열심히 섭렵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요리 학원 등록하려고 했었는데.’

요리하겠다고 보는 사람마다 말했던 게 벌써 2주쯤 됐다.

그런데 막상 등록하려고 보니 뭔가 좀 내키지 않는달까.

재료 손질부터 완성까지 시스템이 해 주니 마음이 가벼워진 것도 있고, 저렇게 열심히인 모르달이 있어서기도 했다.

‘그래도 이젠 맛도 느끼니까.’

게으르게 빈둥대는 것도 좋지만, 맛있는 요리가 먹고 싶다. 궁금하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라…….’

의욕 충만하게 계획을 만들려는 도현은 자신의 배 위에 엎드렸던 토토가 발딱 일어나자 시선이 돌아갔다.

“농장, 하무니 왓써!”

“엄마가 왔다고?”

스네일 때문인가 보다. 매일 3, 4번씩 자주 드나들던데.

어느새 농장 관리자가 된 토토는 자연스럽게 농장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늘 엄마가 오가는 걸 알려 주는데, 오늘따라 말하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굳이 갈 필요는 없겠지.’

도현은 귀찮음 때문에 토토의 말을 무시했다. 오히려 반기는 건 모르달이었다.

“오오! 이럴 때가 아님다요! 토토 님, 함께 가시지요!”

둘은 신나서 도현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농장으로 가 버렸다.

휑한 적막감이 거실에 뿌려졌다.

“자주 이랬으면 좋겠네.”

비록 주인의 허락 없이 우르르 가 버린 못된 펫들이었지만 도현은 혼자가 된 이 시간이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휴대폰이 조용했지.”

엄마의 굴림으로 워프에 드나든 뒤로 연락이 줄더니 최근 엄마에게 커밍아웃한 뒤로 전화가 안 왔다.

시도 때도 없이 올 때는 닦달하는 것 같아 싫었는데 반대로 또 잠잠하니 괜히 신경 쓰인다.

‘뭐, 차라리 잘됐지.’

농장에 오가면서 토토와 모르달을 자주 볼 거니 알아서 소식을 전할 테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이놈들이 뻔질나게 농장에 가는 게 차라리 낫다 싶다.

“그럼 오랜만에 혼자서 맛있는 거라도…….”

기지개를 켜던 도현의 눈에 고장 난 TV가 보였다. 이어서 다른 가전제품들을 쭉 훑었다.

“……마트에 다녀와야겠다.”

구매하고 나면 이번에는 정말 절대 방어를 걸어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드론 택시나 타고 가 볼까?”

나간 김에 오늘은 정말 요리 학원도 알아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휴대폰을 찾아 소파를 두리번거리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 토토가 가져갔나 본데.”

평소라면 반겼을 상황이지만, 오늘만큼은 곤란했다. 하필 며칠째 내린 비로 밖은 흠뻑 젖은 상태다.

이런 날은 날아다니는 것도 귀찮다.

“이참에 차 한 대 뽑을까?”

드론 택시를 기다리는 것도 귀찮고 두 놈을 데리고 밖을 쏘다니는 것도 별로다.

호기심이 많아 옆길로 샐 때가 많았으니.

고민은 짧았고 그저 간단히 외출할 생각을 했던 도현은 차부터 사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

아바는 오랜만에 외출했다.

헌터 교류 일정 중 드디어 사무 보조가 끝나고 한 달이라는 자유 시간을 얻은 탓이었다.

황금물결 같은 머리카락을 모자 속에 밀어 넣고, 간단한 캐주얼 차림으로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헌터가 되기 전, 그녀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집도, 학교도, 성적도, 성격도. 전부 무난한 정도.

그런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먹는 것과 헌터 이야기였다.

그중에서도 K헌터. 대한민국 헌터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한국어까지 마스터할 정도.

우연한 계기로 각성하고 미국 헌터가 되었지만…….

그런 그녀의 활력소는 지금처럼 계획 없이 돌아다니며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가 먹는 것이었다.

발이 가는 대로 걸으며 기분에 따라 음식점에서 사 먹는다든지, 팝콘과 콜라를 뜯으며 영화관에서 하루 종일 죽친다든지, 내키는 대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시 에너지가 생겨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시야가 방해됐지만, 쉬는 날이다. 그것만으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운치 있게 느껴졌다.

“어디로 가 볼까? 한국에 오면 최대한 많은 음식을 먹어 보라던데.”

마음을 짓누르는 임무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걸 잊고 놀 생각이었다.

먹방의 성지 한국.

그 범위의 장소도 다양했다. 가게, 시장, 백화점, 마트까지.

특히나 근처 마트에는 워프에서 생산된 식자재가 직판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크기도 컸고 무척 유명했다.

생각만 해도 기대에 부푼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마트로 향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 거다. 길 건너편 자동차 매장에 눈이 간 것은.

시승 차량에서 내리는 한 사내가 보였다.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인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딜러들을 둘러보다 제일 가까운 딜러에게 다가갔다.

그럼에도 무시당하는 상황.

‘무시당할 만하지. 롤스로이스 매장에 저런 차림… 어?’

매장의 사내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카드 한 장을 꺼냈다.

툭.

카드가 겹쳐져 있었던 건지, 꺼낸 카드 아래로 다른 카드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을 부릅뜬 아바처럼 매장 내 모든 딜러가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보고 있었다.

진한 마나가 풍기는 카드.

헌터증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매장 안의 소란에 귀를 기울였다.

도현은 자신보다 빠르게 몸을 던져 바닥에 떨어진 헌터증을 줍는 딜러를 보며 어리둥절했다.

“블랙 허, 헌터증… 3, 3급!”

‘헌터증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도현에게는 귀찮은 이력 중 하나일지 몰라도 이 매장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시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였나 보다.

“우, 우도현 헌터님.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시, 시승해 보시겠습니까……?”

방금 시승하고 내렸는데. 무덤덤하게 쳐다보고 있자, 딜러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귀찮으니까 빨리 사고 가야겠다.

“이거로 주세요.”

“이, 이분 말씀이십니까? 롤스로이스 팬텀으로, AI로이의 자율 주행과 호텔 부럽지 않은 실내를 갖추었고, 최고급 마나석을 장착하여 인벤토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계약서 주세요.”

“계… 예, 옙!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은땀을 흘리며 부리나케 달려가는 딜러 뒤로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

“우도현 헌터님, 차 한잔 드릴까요?”

“오렌지 주스로 부탁합니다.”

더는 묻지 않고 여직원도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 헌터증 소란 뒤로 매장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도현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걸리적거리는 시선을 느꼈지만, 오늘은 만사가 귀찮다.

차 말고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 빨리 끝내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

귀찮고 지루하고 맹숭맹숭했다.

뭔가 자극적인 게 당기는데…….

“민혁이 아주머니 떡볶이가 진짜 맛있었지.”

쫀득한 떡에 매콤한 소스, 씹을 때마다 부담 없는 달콤한 맛이 진한 어묵 육수와 함께 매콤한 소스의 삼박자가 정말 최고였다.

절로 고개를 끄덕여지며 군침이 넘어갔다.

“그럼 빨리 마트 갔다가 먹으러 가야지.”

저번처럼 배를 채울 정도까진 아니고, 적당히 입가심으로 먹고 맛있는 걸 또 먹으러 다닐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요리 학원도 등록하고.

“우 헌터님, 여기 계약서입니다. 찬찬히 읽어 보십시오.”

도현은 건성으로 훑은 뒤 사인을 하고 엄마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

차의 가격이 상당했다.

못 사는 건 아니지만 엄마에게 연락이 갈 것이고 못 믿겠으면 전화하겠지.

하지만 오늘 휴대폰의 주인은 토토다.

애초 뭐든 긁어도 된다고 한 게 엄마였으니까.

‘스네일 계약 건도 있으니 괜찮겠지.’

엄마와 체결했던 스네일 계약.

원재료비라 해서 도현에게 매달 입금되는 금액이 100억을 웃돌았다.

이 돈이 평균이고, 워프가 파괴됐다는 소식에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하니 아래로 떨어지진 않을 거다.

결국 차값이라 해 봤자,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시킨 값이랑 비슷할 정도.

‘가치가 이 정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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