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 사는 게 그런 거지 뭐 (2)
모두가 만족한 식사를 마치고 홀에 모여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토토가 농장에서 가져온 하리오카 열매와 스네일이 분배되어 테이블에 올려져 있지만, 토토나 모르달만 쉬지 않고 먹어 댈 뿐이었다.
에스틴이 호기심으로 초록색 스네일을 집어 씹어 먹다 눈을 찡그리며 도현에게 되물었다.
“반마족을 도우라니… 진심이십니까?”
도현이 첫 명령을 내렸다.
제브라드에 있는 반마족을 도우라는 것.
본능적인 거부감에 마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오제아만이 평온했다.
도현은 에스틴의 말을 정정했다.
“돕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라는 거지. 지켜만 봐도 좋아. 시험해 보는 것도 좋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마족들은 도현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혼란만 가득한 그들에게 도현이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에둘러 표현 안 해. 말 그대로다. 너희들이 지켜보고 결정해. 반쪽짜리라고 다짜고짜 죽이려 들지 말고.”
도현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 없었다. 그저 떠올린 건, 햇병아리들이 기절했던 그사이에 확인한 커넥팅에서 그라드가 9서클에 올라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의 꿈의 경지라 일컫는 9서클.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당연히 따라붙고, 제브라드의 한 나라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지만 이상하게도 제브라드는 조용했다.
결론은 조용히 힘만 키우고 있다는 것.
‘아마도 이오르 때문이겠지.’
다섯 마족 때문이라 생각했던 도현은 알림을 보고 욕했다.
지구로 올 거리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이오르가 그라드를 쥐 잡듯 잡아 댄다는 것이었다.
뭐 약골 중에서 그나마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놈일 테니, 그라드는 살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힘을 길러야 했겠지.
악착같이 버텨 경지를 이룬 것을 보면 근성 하나는 감탄할 만했다.
‘햇병아리들이 가더라도 별문제 없을 것 같고.’
겸사겸사 그라드 밑으로 햇병아리들을 넣을 수 있다면 여러모로 편해질 것이다.
자신과의 거래가 마계 서열 1위였으니, 어떻게든 햇병아리들을 수하로 만들겠지.
‘이렇게 떠먹여 주는데도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결정을 못 내린 햇병아리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힘만 세면 뭐 해, 머리에 들어찬 게 죽인다, 살린다밖에 없으니.’
다시 쯧쯧 낮게 혀를 차는데 탄가트가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왕이시여, 제브라드에 가면… 정말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 한마디에 마족들이 움찔했다. 다른 말은 없었지만,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인 채 숨소리조차 조심한다.
도현은 그 모습이 귀여워 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오르를 찾으면 돼.”
요리도 최고지만, 정신 개조에는 이오르를 따라올 자가 없다.
지금의 제브라드에서 미친놈으로 이오르를 이길 놈은 없었으니까.
차원을 넘어 지구에 올 수 없으니 더 독이 올랐을 테다.
적당히 굴릴 수 있게 음식만 가끔씩 조달해 준다면 정말 남는 장사가 따로 없었다.
앞으로 그려질 햇병아리들의 고난에 도현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끼이익―
갑자기 테이블 옆으로 문이 생겨나며 저절로 문이 열렸다.
익숙한 문. 집의 방문이었다.
햇병아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제아가 모두를 대표해 인사를 올렸다.
도현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넌 남아. 가는 건 널 제외한 넷이야.”
당황하는 오제아 뒤로 네 마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감시자 없이 보내 준다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며 서둘러 문으로 향했다.
“아, 참.”
도현이 문을 넘으려던 넷의 걸음이 멈췄다.
보바를 보며 말했다.
“보바? 계산해야지? 모르달.”
“예……?”
“옙! 도련님!”
결국 입을 놀린 대로 모르달에게 수집품을 전부 강탈당한 보바는 넋이 나간 채 좀비처럼 걸어 나갔다.
달칵!
에스틴 바르제뷔트(마족)
121/남
마계 서열 10위 마신의 집행자->마계 서열 3위 꺼지지 않는 마계 화염의 지배자. 마계 절대자 그라드 휘고아타의 오른팔이자 친위대 1위.
능력치(상세 보기+)
특이 사항: 블루드래곤 이오르의 친우 레드드래곤 말마타의 끈질긴 구애로 살기 위해 극에 달한 화염을 깨닫습니다.
탄가트(마족)
119/남
마계 전쟁 참패(사망)->마계 서열 5위 제3안의 예지자. 마계 절대자 그라드 휘고아타의 왼팔이자 친위대 2위. 이계의 미식마왕.
능력치(상세 보기+)
특이 사항: 블루드래곤 이오르의 미식 테스트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갖가지의 음식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간의 경험으로 각성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레리아사 페니로아
123/여
마계 몬스터의 왕->마계 서열 4위 몬스터들의 어머니. 마계 절대자 그라드 휘고아타의 친위대 3위. 마검의 주인.
능력치(상세 보기+)
특이 사항: 제브라드 남쪽 끝 썩어 버린 땅을 발견, 마기를 모두 흡수합니다. 성검을 타락시켜 마검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녀의 검 아래 무릎 꿇지 않는 몬스터는 없습니다.
보바 소아튀르
110/남
마계 은둔자->마계 서열 10위 마족 호문클루스의 어버이. 마계 절대자 그라드 휘고아타의 친위대 4위.
능력치(상세 보기+)
특이 사항: 이오르가 수집품을 계속 강탈하자 지키기 위해 수집품에 ‘이지’를 부여, 발전하여 가디언을 만듭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함과 동시에 꿈꿔 왔던 자신만을 위한 하렘을 구축합니다.
그가 만든 마족 호문클루스는 블루드래곤 이오르와 블랙드래곤 라라루타마저 혀를 내두르는 최상품입니다.
타 차원 지구의 대한민국 언어를 습득한 이오르가 그를 가리켜 ‘방구석 폐인’이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참, 잘들 크는구나.’
특이 사항 같은 세세한 부분은 넘긴 도현은 마족들로 인해 그라드의 미래가 다시 한번 바뀐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인연을 무시할 수 없다니까.’
인연이 만들어 낸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이 만들어 내는 운명은 신조차 쉽게 손댈 수 없다.
‘그러니까 제대로 깽판 좀 쳐서 제브라드한테 이자까지 돌려줬으면 좋겠네.’
난처해할 제브라드를 상상하며 웃던 도현은 커넥팅 창을 켜 그라드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멈칫했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힘 때문이었다.
“네가 왜?”
도현은 제브라드를 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흥분한 모르달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꽥꽥대는 소리가 머리를 찔렀다.
“오오오오! 제브라드 니이이이임! 소인 모르달, 제브라드 님이 너무 보고 싶… 꾸에엑!”
“좀 맞자.”
바로 낚아채 잘근잘근 밟는데, 제브라드가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딱히 오랜만은 아닌데.”
현신은 아니더라도 빙의로 본 지 일주일이 채 안 됐다.
예전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휘황찬란했던 차림과 달리, 머리를 풀고 수수한 흰 원피스만 입은 모습이랄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도현은 애초 그녀의 면상만 봐도 불쾌했다.
제브라드는 삐딱한 도현을 무시하고 조용히 서 있는 오제아를 보고 도현에게 말했다.
“이 아이 때문에 왔어요. 곁에 두신다고요.”
“참견할 문제야?”
무슨 말이든 아니꼽게 받아치는 도현을 보면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마계를 기록하는 자예요. 비록 당신의 도움으로 온전해졌다고는 하나, 마계를 떠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 맹약했다는 게 중요하지.”
씁쓸하게 웃던 오제아가 멍한 얼굴로 두 눈 가득 도현을 담았다.
그녀의 바람처럼 도현도 보내지 않겠단다.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생각에 잠겼던 제브라드는 힘겹게 입을 뗐다.
“이렇게 하죠. 오젠타 아르샤. 지구에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하겠습니다. 대신, 지구로 올 수 있는 건 우도현. 그가 불렀을 때만 가능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도현이 물었다.
“언제든?”
“네, 언제든.”
“어떤 상황이든?”
“네, 어떤 상황이든지요.”
도현과 제브라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이 떨어지자 제브라드가 손을 들어 오제아의 이마에 살짝 갖다 댔다.
오른쪽 망막. 주종의 맹약의 문양이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보라색 눈동자가 은색으로 물들었다.
오제아는 눈을 깜빡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뭔가 자신을 보호하는 막이 생긴 것 같았다.
제브라드가 그녀에게 명령했다.
“마계로 돌아가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사도 못 남기고 오제아가 사라졌다.
도현이 픽 웃었다.
“마음을 읽지 못하게 막은 건 뭐야?”
“여자의 마음을 훔쳐보는 건 실례죠.”
마계의 밑바닥까지 까발려지는 걸 염려한 조치였지만 그녀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참 얄밉다고 생각하던 도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거만하게 팔을 올렸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쫓아낼 땐 언제고 뭐 하는 짓이지?”
제브라드는 차가운 도현의 시선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심시티 또 안 하실래요?”
“미친…….”
‘설마?’
오만상을 찌푸리던 도현의 눈이 커졌다.
제브라드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시간이 다 됐네요. 그럼 좀 바빠서.”
도현은 제브라드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을 바라보다 픽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 해 보자고.”
중얼거리는 도현의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서울의 한 판자촌.
박살 난 파편들 위로 잡초가 무성한 모습은 세월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늘에서 달이 깨져 떨어진 처음 그날, 판자촌은 커다란 달 조각 때문에 누군가의 보금자리였던 이곳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접근이 제한되었다.
차도식은 고개를 들어 커다란 달 조각을 바라봤다.
항공기 한 대 정도 크기의 워프. 진한 녹색의 3등급 워프였다.
2주기에 들어선 ‘크로아의 바위산’이란 워프로, 머리 두 개 달린 산양 몬스터, 투헤드 고트가 서식하는 곳.
동시에 엄청난 석유가 잠재된 워프였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을 먹여 살렸던 워프였지만, 마나석을 채굴할 수 있는 워프가 나타나고 마나석이 보편화되면서 이 워프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하지현이 차도식 옆에 서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오늘로서 끝이네.”
“그러게.”
담담히 내뱉는 차도식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이 워프처럼 자신도 언젠가 버려지지 않을까.
“아, 이제 도착했나 보다.”
차도식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500미터의 거리에서 천천히 들어오는 스타렉스 한 대.
차도식과 하지현 앞에 멈춘 차에서 건장한 다섯 사내가 내렸다.
195센티미터에 130킬로그램. 작은 산 하나가 움직이는 듯한 큰 덩치에서 위압감이 뿜어졌다.
일반인이었다면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얼어 버렸을 비주얼이었다.
채근석은 깍두기처럼 자른 머리를 벅벅 쓸어내리며 두 헌터에게 헤프게 웃으며 다가갔다.